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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이궁 니조 성 [ruby(元離宮二条城, ruby=もとりきゅうにじょうじょう)] | |
니노마루 궁전의 정문인 당문([ruby(唐, ruby=から)][ruby(門, ruby=もん)]) | |
니노마루 궁전 입구 | |
<colbgcolor=#610051> 형태 | 성, 궁전 |
소유주 | |
주소 | |
홈페이지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이름 | 한국어 | 고대 교토의 역사 기념물 |
영어 | Historic Monuments of Ancient Kyoto (Kyoto, Uji and Otsu Cities) | |
일본어 | 古都京都の文化財 (京都市、宇治市、大津市) | |
프랑스어 | Monuments historiques de l'ancienne Kyoto (villes de Kyoto, Uji et Otsu) | |
국가·위치 | 일본 교토부 교토시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등재연도 | 1994년 | |
등재기준 | (ii)[1], (iv)[2] | |
지정번호 | 6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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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토부 교토시 나카교구에 있는 성.
천수각은 터만 남았다
2. 역사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01년에 재건을 지시하여 2년 후에 니노마루(二之丸) 부분이 완공되었다.[3][4] 그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천황으로부터 쇼군으로 임명받고 이곳에서 취임 축하연을 벌였다. 혼마루(本丸)와 니노마루, 천수각은 손자 도쿠가와 이에미츠 시절인 1626년에 현재의 규모를 갖추었다. 이에야스는 천황이 머무르던 교토고쇼를 보호하고 자신이 교토를 방문했을 때 머무를 장소로 사용하기 위해 니조 성을 지었다고 하지만 건축 비용은 서부의 도자마 다이묘들에게 뜯어냈다.
1611년에는 천황의 양위식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수도인 교토로 상경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사카 성에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불러 니조 성에서 만났다. 교토의 백성들이 히데요리를 열렬히 환영했고(도요토미 집안의 위세가 여전했고) 22살의 장성한 히데요리를 보고 이대로 두면 훗날 도쿠가와 쇼군가가 위험해지겠다는 위기의식이 들어 오사카 전투로 이어지는 도요토미 가문 멸족을 결심했다고도 전해진다.1615년에 도요토미 가문 말살을 위해 펼쳐진 오사카 전투에서는 니조 성에 불을 지르고 그 틈을 타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암살하려는 음모가 발각됐다. 그 음모를 꾸민 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편이 되어 있던 후루타 오리베의 가신인데 이 책임으로 후루타 오리베는 할복을 명받아 자결했다.
1634년 제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까지 쇼군 즉위 의식이 치러졌으나 19세기 말까지 쇼군의 발걸음은 뚝 끊겼다.
별 볼일 없던 니조 성을 200년도 지난 후에 다시 찾은 사람은 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였다. 이에모치는 상경해 천황에게 양이를 약속했다. 3년 후인 1866년 이에모치가 급서하자 15대이자 마지막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니조 성에서 쇼군 자리를 계승했지만 에도 막부는 이미 기울대로 기울어 요시노부는 니노마루의 오오히로마(大広間, 거실)에서 40여 명의 중신들을 모아 놓고 통치권을 천황에게 반환한다고 선언했는데 1867년의 이 사건을 대정봉환이라고 한다.
1884년 7월 니조 성은 궁내성이 관할하게 되며 일본 황실의 별궁으로서 니조 이궁(二条離宮)이 되었다. 1939년에는 황실에서 교토시로 소유권을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3. 건물 구성
니노마루 궁전 전경 |
- 니노마루 어전(二の丸御殿): 모모야마 시대에 발달한 쇼인즈쿠리 양식의 대표적인 건물. 국보 건조물 제75호로 지정되어 있다. 단독 건물이 아니라 여섯 동[5]의 건물이 복도를 통해 이어져 있는 구조이다. 6개 동 33개의 방마다 화려한 벽화가 있는데, 각각의 방의 용도에 맞는 그림으로 꾸며져 있다. 이 중에서 대광간(大広間)이 대정봉환을[6] 선언한 장소다.
궁전 안의 기다란 나무 복도를 걸어가다 보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데 이 특유의 소리가 마치 휘파람새 소리와 비슷하다고 하여 꾀꼬리 소리의 복도(鴬張りの廊下)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복도 밑에 쐐기못이 설치되어 있는데 복도를 밟으면 압력에 의해 나무 복도와 함께 빈 공간에 고정된 못들이 움직이면서 소리를 내는 것이다.[7] 빛을 막기 위해 궁전 내에서는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참고로 원래 니노마루 어전은 현재보다 전각이 더 많았으나 일본 제국 시기에 상당수 사라졌다.
- 니노마루 정원(二の丸庭園): 궁전 뒤에 위치되어 있는 아담한 정원으로, 연못이 있고 주변에 암석이나 나무 등을 배치하는 지천회유식 정원이다. 1626년에 코보리 엔슈(小堀遠州, 1579-1647)라는 에도 시대의 건축가이자 정원설계사가 설계한 작품이다. 팔진의 정원(八陣の庭)이라고도 불리며 연못 중앙에 샘을 상징하는 돌이 3개 놓여 있고, 연못의 좌우로 학과 거북이 모양으로 돌이 배치된 게 특징이다.
- 혼마루(本丸): 니조 성의 제1성곽으로 성 안에 다시 성벽을 쌓고 해자를 둘렀지만 니조 성에서 가장 수난을 많이 당한 곳으로 천수각은 낙뢰를 맞아 불타 버리고[8] 1788년에는 궁전까지 화재로 사라졌다. 지금의 건물은 황실의 별장인 가쓰라 이궁(桂離宮)의 일부를 이용해 다시 지은 것이다. 혼마루 어전 내부는 일반에게 공개하지 않으며 외부만 관람이 가능하다.
- 세이류엔(清流園): 1965년에 민간에서 얻은 정원석과 다실 등으로 조성한 정원. 여유롭게 돌아보기 좋다.
4. 행사
3~4월 중에는 야간 조명을 밝히는 라이트업 행사가 있으며 9~11월 중에는 니조 성 축제가 열린다.5. 찾아가는 길
교토역에서 9, 50, 101번을 타고 니조조마에(二条城前)에서 내린다. 12번 버스도 이곳을 지난다. 지하철을 이용하려면 토자이선 니조조마에역까지 가서 내리면 된다.입장료는 일반 성인 기준은 2022년 11월 기준으로 니노마루 궁전까지 입장하는 경우 1,300엔, 궁전은 제외하고 공원만 입장하는 경우 1,000엔이며, 수장고 입장료는 추가로 100엔이다. 입장료가 최근 들어 급격히 인상되고 있으므로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하는 것이 좋다.
입구에 교토시에서 운영하는 주차장이 있어 주차가 가능하다.
6. 가이드
성 안에 들어서면 니노마루를 보기 전에 커다란 음성지원 안내판이 있다. 일본어, 영어, 중국어, 한국어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다만 소리가 너무 커서 마당에 쩌렁쩌렁 울릴 정도이니 그냥 한번 읽기만 하고 가자. 입구에서는 한국어로 된 음성 가이드 기기를 빌릴 수 있다. 진행 순서에 따라 기기를 조작하여 순서대로 설명을 들으며 진행하게 된다. 대여료는 500엔이다.[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2]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3] 재건이라는 말을 보면 알겠지만 이전부터 있던 성으로, 혼노지의 변 때 오다 노부타다가 이곳에 있다가 아케치 미츠히데 군에게 포위되어 자결하였다.[4]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는 관련이 없는 성이다. 히데요시가 거주했던 성은 후시미 성.[5] 원대(遠侍), 식대(式台), 대광간(大広間), 소철의 간(蘇鉄の間), 흑서원(黒書院), 백서원(白書院)[6] 에도 시대에 모든 실권을 장악했던 막부의 쇼군이 1867년 11월 9일 통치권을 천황에게 반환할 것을 선언한 사건.[7] 이는 '박석'과 같이 처음부터 소리가 나도록 설계된 것은 아니며, 추후에 소리가 나는 대로 붙여진 것이다.[8] 복원되지도 않은 채 터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