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5 09:44:59

냅코 프로젝트

1. 개요2. 전개3. 작전4. 결과

1. 개요

미국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워싱턴 OSS(전략첩보국)에서 일본을 상대로 한 비밀첩보작전. 일본이 점령하고 있는 한국에 고난도 훈련을 받은 최정예 특수요원들을 투입해서 일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거점을 확보해 일본을 무력화 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극비로 진행된 이 작전의 이름은 냅코 프로젝트(NAPKO Project). 선발 요원 총 19명. 이름 대신 암호명 A, B, C, D 로 불린 이들은 모두 한국인이었다. 1945년 8월 광복 직전에 펼쳐진 이 작전은 나가사키, 히로시마에 떨어진 핵폭탄으로 인해 일본이 무조건적으로 항복함으로서 프로젝트는 해체되었다.

2. 전개

1945년 5월 나치 독일이 패망한 후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전선인 일본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에 한국을 통해서 일본을 침투, 정보 수집 및 첩보 활동, 지하 조직 조성 및 무장 저항 운동까지 이어가려고 하는 조직적인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이 작전을 지휘한 칼 아이플러 대령은 OSS 워싱턴 본부 냅코 프로젝트 책임자였다. 회고록에서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서 '냅코'가 무슨 뜻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Kidnap Korea, 한국을 납치하다'는 의미로 '냅코 프로젝트'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그 당시 극비 작전명은 아무거나 붙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냅코(NAPKO)'에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

3. 작전

최정예 한국인 요원들을 한국에 투입시켜서 일본의 군사 및 경제 전반의 정보를 수집하는 작전.

요원들이 나고 자란 연고지를 중점적으로 검토한 뒤에 그 중에서도 반일 감정이 높은 3곳을 침투 지역으로 결정하였다.

1. 아이넥 미션(Einec mission) : 조선총독부가 있는 서울로 침투해 경제 상황과 일본군 부대의 주둔 위치 파악. 발각위험이 가장 크지만 첩보가 성공한다면 확실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서울에 인맥이 많은 요원과 일본 경찰에 노출된 적 없는 요원을 선별해서 침투시켰다. 서울에 있는 한인애국자들의 도움을 받아서 지하 조직을 구성을 실현하고자 했다.

2. 차로 미션(Charo mission) : 진남포를 경유해서 평양으로 침투. 평양은 반일 감정이 가장 높은 지역이었다. 훈련 성적이 가장 뛰어난 요원들이 투입시킬 예정이었다. 이 차로 미션조는 칼 아이플러 대령이 가장 신뢰하는 팀이었다.

3. 무로 미션(Mooro mission) : 황해도 인근의 외딴 섬 한 곳을 탈취 작전기지로 활용. 현지사정에 밝은 요원들이 들어가서 주민들을 설득시키는 작전이었다.

일본의 감시망이 삼엄했기 때문에 모든 작전은 잠수함을 타고 수행할 예정이었다. 완벽한 위장을 위해서 한국 옷, 일제 안경, 일제 삽 등을 지급했다.

OSS 특수요원은 침투방법, 은닉방법, 무선통신 접선방법, 살인방법, 사보타지 방법 등 을 배웠는데, 이는 전형적인 첩보 공작원(스파이)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겠다. 즉, 현대적 스파이를 제일 처음 만든 곳이 미국 OSS이다. 이전에는 이런 식의 스파이 작전이 없었다.

냅코 요원의 자격 조건은
  1. 영어, 일본어, 한국어 3개 국어능통자
  2. 뛰어난 체력의 소유자
  3. 지략과 전술이 뛰어난자
  4. 독립정신애국심이 투철한 자가 필요했는데,

당시 미국에 있던 장석윤을 통해 칼 아이플러 대령은 이러한 사람들을 모집하기로 했다. 장석윤은 태평양 전쟁에서 끌려온 포로 중 한국인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위스콘신 주 맥코이 포로수용소에 포로로 위장 잠입을 했다. 장석윤은 스스로를 필리핀에서 잡힌 포로라고 속이고 가명을 쓰면서, 약 40일 동안 100여 명의 한국인 포로관찰보고서를 썼다. 어떤 사람이 애국심이 강하고 체력이 뛰어나고 똑똑한가를 써서 세 명의 요원을 선발했다.

또한 버마(미얀마) 전선에서 탈출한 한국인 학병 3명도 냅코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대학을 나온 엘리트인 재미한인들 중에서도 참여했다.

이렇게 한인 19명이 모였다. 유한양행의 유일한 회장도 이 중의 한명이다. 암호명 A 라고 불리었다.
"암호명 A[1] 는 회사의 존망을 무릅쓰고 그의 사업 조직망을
OSS 작전을 위해 이용하는 것에 기꺼이 동의했다."
NAPKO Project of OSS 중에서..

이들은 한국독립을 위한 투쟁에 목숨을 기꺼이 던지겠다는 애국심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LA 산타 카타리나 섬(Santa Catalina island)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군사기지로 활용되었는데, 여기서 한인 19명의 훈련이 시작되었다. 이 섬 곳곳에 여러 조가 흩어져서 훈련받았으며, 서로의 존재를 모를 정도로 완벽하게 외부와 차단되었다. 유격훈련, 사격훈련, 정보수집을 위한 무선교신, TNT폭파, 나침반 사용, 지도해독법, 지도 작성, 공중 폭파, 지뢰 설치, 자동차 엔진 파손법 등등 고강도 첩보 훈련들을 배웠다. 이들은 최정예 특수공작원으로 거듭나게 된다.

4. 결과

한국 비밀침투작전 냅코 프로젝트의 실행일은 1945년 8월 18일로 정해졌다. 하지만 미국은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고, 결사항전을 외치던 일본은 6일 뒤인 1945년 8월 15일에 무조건 항복 선언을 하게 된다. 한국은 갑작스럽게 광복을 맞게 되었고, 미국은 모든 대일작전을 취소했다. 산타 카타리나 섬에서 한국에 침투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던 19명의 한국인 요원들에게도 해산명령이 내려졌다. 작전 3일전에 해산명령이 내려진 것.

포로를 전쟁에 활용하는 것은 제네바 협약 위반이었기 때문에 이를 숨기기 위해서, 미군은 버마 탈출 학병과 맥코이 포로수용소 출신 한인들은 하와이 포로수용소로 도로 수감시키게 된다. 일본을 상대로 함께 싸우던 전우라 생각했던 미군이, 하루아침에 다시 한인들을 포로수용소에 포로로 수감했던 것. 그래서 19명 중 한 명이었던 박순동이 지은 책 이름이 <모멸의 시대>이었다. 일본군 학병으로 강제징용되어 나갔고, 그걸 목숨걸고 탈출해서 일본과 싸우기 위해서 OSS 냅코프로젝트에 다시 목숨을 걸고 참가했는데, 전쟁이 끝나니 나라가 없어 다시 포로수용소에 갇히고 만 신세를 <모멸의 시대>로 기록했던 것. 이러한 과정 때문에 냅코 프로젝트가 1급기밀로 분류되었으며, 30년이 지난 뒤에야 밝혀지게 된다.

하지만, 19명의 요원들 대부분은 냅코에 참여한 사실을 죽을 때까지 가족에게도 함구했다.[2] 유일한 역시 사후 20년 뒤에야 냅코 프로젝트 암호명 A 인 것으로 밝혀졌다.
할아버지께서 OSS 훈련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굉장히 놀랐어요
왜냐하면 단 한 마디도 안 했거든요
훈련받을 당시 비밀보장맹세를 했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훈련에 대해서 말하지 않기로요
놀라운 것은 할아버지와 다른 사람들 모두 전쟁이 끝난 뒤에도 한마디도 안 했다는 거죠
유일한의 손녀 유일링의 2017년 인터뷰 중

재미한인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아버지를 원망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중에 자식들이 다 성장하게 되고, 재미독립운동가들이 한국정부로부터 포상을 받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돌아가신 과거의 아버지와 화해를 하게 되었다. 인터뷰를 보면 다들 엄격했던 아버지를 원망하며 살다가 80살이 넘어서 아버지 대신 독립유공자상을 받게 되는데, 이에 아버지가 독립운동 비밀유지 때문에 자식에게 엄격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눈물을 흘렸다.

냅코 프로젝트에 참여한 요원 명단은 장석윤, 박기벽, 이태모, 이초, 최창수, 유일한, 최진하, 이근성, 변일서, 김강, 변준호, 차진주, 하문덕, 박순동, 이종실, 박형무, 김필영, 김현일, 이종흥이다.


[1] 여기서 암호명 A는 유일한 박사를 지칭한다.[2] 작전명조차 부대원들에게 극비였기 때문에 일개 버마 탈출 학병이었던 박순동은 자신이 했던 작전이 냅코 프로젝트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고 미국의 대일특수첩보작전 정도로만 알았을 것이다. 참고로 <모멸의 시대>는 광복 후 20년 뒤인 1965년에 박순동에 의해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