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78787><colcolor=#ffffff> 성명 | 남영희(南榮熙) |
생몰 | 1905년 12월 30일 ~ 1989년 12월 24일 (향년 84세) |
출생지 | 충청남도 아산군 음봉면 동천리 |
사망지 |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 |
매장지 | 충청남도 아산군 음봉면 동천리 선영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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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905년 12월 30일 충청남도 아산군 음봉면 동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6년 6.10 만세 운동에 가담했고, 여름 수원고등농림학교에 재학하던 중 교내에 조직된 건아단(健兒團)에 가입했다. 건아단은 농민 대중을 계몽시켜 신사회 건설을 꾀한 학생결사로, 그들의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농민을 계몽시켜서 농촌사회를 계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건아단원들은 수원군 안룡면 고견리를 비롯한 여러 마을에 농민 야학을 설립해 농민 의식을 고취시켰으며, 단군 연호를 사용했다.그러던 1927년 9월, 강원도에 수학 여행을 간 건아단원들은 일본인들이 대규모 농장을 세우고 조선 농민들을 소작인으로 부리며 착취하는 것을 보고 분개했다. 그들은 민족농장 건설을 꾀하기로 하고 1928년 6월에 일본 도쿄에 설치되어 있던 조선농우연맹(朝鮮農友聯盟)에 가입하고 ‘조선인에 의한 조선농촌개발’이라는 조선농우연맹의 주장을 뒷받침하기로 했다. 이후 1928년경 조선농우연맹이 국내에서 지방 강연 등 계몽 활동을 할 때, 수원고농생 한전종(韓典鍾)이 연사에 참여했다. 그러나 일제 경찰에 의해 강연 활동이 중지되었고, 한전종은 무기정학을 당했다.
건아단은 이로 인해 일제 경찰에게 발각될 것을 우려해 명칭을 계림농흥사(鷄林農興社)로 개칭했다. 그러나 건아단 출신으로 김해공립농업학교에 교사로 근무하던 김성원(金聲遠)이 건아단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농민 계몽 운동을 수행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계림농흥사는 1928년 여름에 급히 명칭을 조선개척사(朝鮮開拓社)로 변경했지만, 끝내 경찰의 수사망에 걸리고 말았다. 결국 1928년 9월 조선개척사 단원 전원이 체포되었는데, 그 중엔 남영희도 있었다. 그는 체포 후 18개월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30년 3월에 경성지방법원에서 면소판결을 받았다.
이후 고향에서 조용히 지내던 그는 8.15 해방 후 서울로 상경하여 강남구 압구정동에 자리를 잡고 6.10 만세 동지회장을 역임하며 독립운동에 관한 강연 활동을 수행했다. 그러다가 1989년 12월 24일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4세. 그의 유해는 충청남도 아산군 음봉면 동천리 선영에 매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남영희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