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테무게 옷치긴의 후손으로 만주에서 40만의 기병이라는 대규모 군벌 세력을 이루었다.2. 생애
원사 종실세계표에서는 나얀이 벨구테이의 증손자, 예수부카의 손자, 광녕왕 조도(爪都)의 아들이라고 기록됐다. 그러나 후대 신원사에서 보정한 가계에 따르면 나얀은 칭기즈 칸의 막내아들 테무게 옷치긴의 후손이며 할아버지 타가차르, 아버지 아줄(阿術魯)의 뒤를 이어 요동을 다스렸다.카이두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나얀도 은밀하게 그와 통하며 반란을 꾀했다. 1284년(지원 21년) 북경선위사 역력살합(亦力撒合)은 나얀을 감찰한 뒤 그가 다른 뜻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대비를 요청했다. 1286년(지원 23년) 음력 2~3월 사이 산북 요동도·개원등로의 선위사가 폐지되고 행성이 설치됐다. 함평로에 행성의 치소가 설치됐으며 또한 원주민인 여진족과 수달달의 궁시 소지가 금지됐다. 이에 동방의 제왕(諸王)과 여진족 등의 원망이 높아졌다.
요동과 만주에 대한 이러한 개혁안은 지방 세력의 반발로 없던 일로 돌아갔지만 나얀은 반란을 일으키기로 마음을 정했다. 나얀은 카치운의 후손인 싱나카르, 삼촌 야부겐에게 사람을 보내 카이두와 호응하기로 약속했다. 카사르의 후손 식투르, 카치운의 후손 카단도 여기에 동참했다.
1287년(지원 24년) 나얀은 거병했으나 쿠빌라이 칸은 이미 타추와 아들 아야치(愛牙赤)에게 군대 1만을 보내 방어를 준비하고, 사람을 보내 만주의 군대·지방관(선위사)·교통로를 통제한 뒤였다. 나얀은 처음에는 친정한 쿠빌라이의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으나 밤에 화포로 기습당한 이후 패전을 거듭했다. 결국 쿠빌라이군에게 패하고 사로잡힌 나얀은 주살당했고 모반에 가담했던 다른 왕들도 각개격파당했다. 나얀 사후 쿠빌라이는 타가차르의 다른 아들, 즉 나얀의 삼촌인 나이마다이에게 나얀의 부중을 이끌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