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이인에 대한 내용은 김희봉(1874) 문서 참고하십시오.
<colbgcolor=#ddd,#000><colcolor=#000,#ddd> 김희봉 金喜奉 | |
본명 | 김희봉 |
출생 | 1907년 4월 16일 |
전라남도 대정군 우면 (現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 |
사망 | 1991년 4월 22일 (향년 84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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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공산주의자, 항일운동가.2. 상세
김희봉은 1907년 4월 16일 전라남도 대정군 우면(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신도리에서 태어났다.1926년 6월 10일 경성부에서 일어난 6.10 만세 운동은 곧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제주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같은 달 25일 제주공립농업학교(현 제주고등학교)에서도 이에 영향을 받은 동맹휴학 사건이 있었다. 당시 교장 서리였던 야나기다 히토히코는 걸핏하면 한국인 학생들을 차별하는 말을 일삼았기 때문에 학생들은 오랫동안 불만이 쌓였고 이것이 당시 있었던 6.10 만세 운동의 영향을 받아 동맹휴학으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2학년 재학생이었던 김희봉, 양공팔 등 동맹휴학 주동자들은 일본인 교장서리의 이같은 언동에 대해 장헌식 당시 전라남도지사 및 사토시 다카하시 조선총독부 학무국 학무과장에게 탄원서를 제출하였으며, 학교 직원회에도 진정서를 보냈다.
그해 7월 12일 제주공립농업학교 당국은 동맹휴학에 참여한 1, 2학년 학생 전원에게 무기정학 조치라는 초강경책을 썼다. 이에 동창회 및 학부형회와 제주 지역 유지들은 긴급히 모여 대책위원으로 홍순녕 등 5명을 선출하여 학교 당국에 맞섰다. 결국 일제에 의해 야나기다 히토히코 교장 서리가 평안북도로 좌천되고[1] 동맹휴학을 주도한 김희봉 등이 퇴학 처분을 받음으로써 상황은 종결되었다.
학교를 퇴학당한 후, 그는 1931년 10월 일본 와카야마현으로 건너가 그해 11월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섬유노조 와카야마지부 책임자에 선임되어 항일 노동운동에 앞장섰다. 1933년 2월 일본인 니시무라의 권유로 일본공산당에 입당하여 기관지『적기(赤旗)』 배포책으로 활동하며 노동운동을 계속하던 중, 1933년 4월 6일 숙소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일제에 검거된 김희봉은 그해 7월 31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11월 21일 와카야마지방재판소에서 징역 5년형을 언도받았다. 그는 이에 불복하고 공소하여 1934년 2월 5일 오사카공소원에서 징역 4년형(미결 구류 40일 통산)을 언도받고# 오사카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귀국 후 1991년 겨울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