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7-31 22:01:50

수로왕비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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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수로왕비릉.jpg
수로왕비릉 항공 전경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사적 제74호
김해 수로왕비릉
金海 首露王妃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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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 120번지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 왕실무덤 / 고대
면적 45\,185㎡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제작시기 가야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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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교통4. 외부 링크5. 사적 제74호

1. 개요

수로왕의 아내였던 허황옥이 묻혀있다고 알려진 . 사적 제74호로 지정되어 있다.

2. 상세

파일:external/dbscthumb.phinf.naver.net/659aa224-d924-46.jpg?type=m250_fst_nce&wm=Y?.jpg
수로왕비릉[1]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의하면, 왕비는 성이 허(許), 이름은 황옥(黃玉)으로 알려져 있으며, 원래 인도 아유타의 공주로 16세에 배를 타고 가락국에 와서 수로왕의 왕비가 되었다고 한다. 왕자 10명을 낳았는데, 그중 2명에게 어머니를 따라 허씨 성을 주어 지금도 그 후손이 이어진다고 한다.

높이 5 m 정도인 원형 봉토무덤으로서, 무덤의 밑부분에 특별한 시설은 없다. 무덤 주위에는 얕은 돌담을 4각형으로 둘러 무덤을 보호하고 있으며, 앞 쪽에는 긴 돌을 사용하여 축대를 쌓았다. 중앙에는 비석이 있는데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릉(駕洛國首露王妃 普州太后許氏陵)'이라는 명문을 2줄로 새겼다.

무덤에 딸린 부속건물로는 숭보제·외삼문·내삼문·홍살문이 있다. 보통 평지에 있는 무덤과는 다르게 언덕에 위치하고, 무덤 앞에는 인도에서 가져왔다고 전하는 파사석탑(破邪石塔)[2]이 있다. 이 파사석탑은 고려 중기 일연삼국유사에 실린 탑상편 금관성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에서도 등장한다. 현대에 조사한 결과 실제로 한반도에서는 찾을 수 없는 성분의 돌이라고 한다.

세종 28년(1446)에 수로왕릉과 함께 보호구역을 넓혔고 임진왜란도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의 비석과 상석 등은 인조 25년(1641)에 다시 정비하면서 설치하였다고 한다.

왕릉에 비해서는 시설이 소박한 편이고 수로왕비릉이라고 오래전부터 전해져 왔으므로 수로왕릉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본다면, 내부의 구조는 널무덤(토광묘) 또는 돌덧널무덤(석곽묘)일 가능성이 높다. 문화재청.

3. 교통

부산김해경전철을 타고 박물관역에서 내리거나 김해 버스 1, 1-1, 8-1, 58-1, 59-1, 72, 140, 911, 부산 버스 122, 부산 버스 123, 급행 1004를 타면 청소년 문화의집 정류장에서 내려 5분 정도 걸어가면 도착할 수 있다.

4. 외부 링크

5. 사적 제74호

가야의 시조 수로왕의 왕비무덤이다.

『삼국유사』「가락국기」에 의하면, 왕비는 성이 허(許), 이름은 황옥(黃玉)으로 알려져 있으며, 원래 인도 아유타의 공주로 16세에 배를 타고 와서 수로왕의 왕비가 되었다고 한다. 9명의 왕자를 낳았는데, 그 중 2명에게 왕비의 성인 허씨 성을 주어 지금도 그 후손이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한다.

높이 5m 정도의 원형 봉토무덤으로서, 무덤의 밑부분에 특별한 시설은 없다. 무덤 주위에는 얕은 돌담을 4각형으로 둘러 무덤을 보호하고 있으며, 앞 쪽에는 긴 돌을 사용하여 축대를 쌓았다. 중앙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릉(駕洛國首露王妃 普州太后許氏陵)’이라는 글이 2줄로 새겨져 있다.

무덤에 딸린 부속건물로는 숭보제·외삼문·내삼문·홍살문이 있으며, 보통 평지에 있는 무덤과는 다르게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무덤 앞에는 인도에서 가져왔다고 전하는 파사석탑의 석재가 남아 있다. 세종 28년(1446)에 수로왕릉과 함께 보호구역이 넓혀졌으며, 임진왜란 때 도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의 비석과 상석 등은 인조 25년(1647)에 다시 정비하면서 설치하였다고 한다.

왕릉에 비해서는 시설이 소박한 편이고 수로왕비릉이라고 오래전부터 전해져 왔으므로 수로왕릉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본다면, 내부의 구조는 널무덤(토광묘) 또는 돌덧널무덤(석곽묘)일 가능성이 높다.

※(수로왕비릉 → 김해 수로왕비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1]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2] 얼핏 보기엔 그냥 돌을 쌓아놓은 것이지만 자세히 보면 돌에 붉은 무늬가 있으며 인위적으로 석탑을 조각한 약간의 흔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