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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식(1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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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명식(1890).jpg
경덕
송산(松山)
본관 김해 김씨[1]
출생 1890년 9월 26일
전라남도 제주목 신좌면 조천리
(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사망 1943년 4월 11일
서훈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3.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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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자는 경덕, 호는 송산이다.

2. 생애

1927년 7월부터 1928년 2월 사이에 경성복심법원 검사국에서 작성한 <왜정시대인물사료>에 따르면, 김명식은 1890년 9월 16일에 출생했다고 한다. 반면 와세다대학 학적부에 명기된 기록에 따르면, 그는 명치 24년(1891년) 9월 26일 생이라고 한다. 그는 전라남도 제주목 신좌면 조천리(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2] 제 16통 5호에서 부친 김문주와 모친 송권숙의 4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부친 김문주는 1891년부터 1894년까지 정의현감을 지냈으며, 그의 집안은 김해 김씨 조천이동파로 조천 일대에서 상당한 명문가였다.

15살 때인 1905년 구좌면 김녕리에 사는 김희서와 결혼했고, 1919년 오인성을 둘째 아내로 둬서 딸 수원을 얻었으나 이듬해에 오인성과 사별하였다. 또한 <왜정시대인물사료>에 따르면, 첩으로 송옥을 두었다고 한다. 허호준 교수의 <혁명가 김명식의 생애와 사상>에 따르면, 김명식은 아들 김갑환, 김성환, 딸 김순애, 김순실과 김수원 등 2남 3녀가 있었다고 한다. 반면 <왜정시대인물사료>에는 장남 김갑순과 장녀 김정옥만 명기되어 있다. 1926년 관종원의 탐방 기사[3]에 따르면, 김명식의 가족은 처 송씨 외에 2남 3녀가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허호준 교수의 주장대로 김명식에게는 자녀가 2남 3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명식은 1902년부터 1906년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고, 1910년 제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어 경성 유학길에 올라 1911년 4월 경성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2년 일본 교사에게 대항하다 퇴학당했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가서 와세다대학 중학과의 '교외생' 과정을 마친 후, 1915년 9월 13일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치경제과에 입학하여 1918년 7월 5일 졸업했다. 1919년 봉래정에서 신아상회를 설립하여 무역상으로 생계를 꾸렸으나 1920년 1월 사업이 실패하여 폐업한 뒤 신문사, 잡지사 등에 몸담으면서 문필 활동을 전개했다. 동아일보에는 논설반 기자로서 무기명 사설과 함께 기명의 글을 발표하였고, <신생활>에는 이사 겸 주필로 참여하면서 편집과 집필의 핵심인사로 황동했으며, <조선지광>에는 주요 기고자로 활동하였고, <삼천리>, <비판>, <동광>, <조광> 등 각종 잡지에 글을 발표했다.

그는 사회주의, 국제 정세, 국내외 경제, 조선 역사, 세태, 교육, 여성, 주역, 종교, 문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왕성한 집필 활동을 했다. 150편이 넘는 글을 본명 외에도 송산, 솔뫼, 나산, 파롱생 등의 이름으로도 발표했다. 송산은 그의 호이며, 솔뫼는 송산을 고유어로 바꾼 것이고, 나산은 고향의 산인 한라산에서 첫 글자를 뺀 것이며, 파롱생은 1937년 주역사상에 대한 글을 동아일보에 연재할 때의 필명으로, '절뚝발이 귀머거리'라는 뜻이다. 이는 당시 병마에 시달리던 상황을 그대로 드러낸 이름이다. 그는 고향을 떠나 독립해서 살게 되면서부터 경제적 형편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왜정시대인물사료>에는 "재산: 없음. 생계 곤란함"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김명식의 항일운동가이자 사회주의 운동가로서의 면모는 1910년대 중반부터 1920년대 중반까지 나타났다. 이 시기는 일보넹서 유학하던 시절부터 <신생활>사에서 활동하던 때까지로, 20대 중반 부터 30대 중반까지 해당된다. 그는 1915년(또는 1916년)에 발족한 조선, 중국, 대만 3개국 청년들의 국제적 비밀결사인 신아동맹당에 참여하였고, 1916년 4월 신도래 학생환영회에서 적국에서 공부하는 의미는 정신을 강고히 해 장래 큰 일을 할 인물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1917년 여름에는 국내에서 독립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고, 재동경조선인유학생학우회에도 깊이 참여해 1915년 10월부터 1916년 2월까지 간사부장을 맡았으며, 1917년 10월부터 1918년 2월까지 회장을 역임했다. 또한 <한지광> 편집도 이 시기에 맡았다.

1920년 조선노동공제회에 의사(평의원)으로 참여했으며, 전국적 차원의 청년운동조직이던 조선청년연합회에 참여해 기관지 <아성> 간행을 맡았다. 1920년 6월 사회혁명당 발족을 주도했으며, 1921년 5월 사회혁명당이 고려공산당 국내지부로 전환될 때 기관지 담당자로 선임되었다. 그를 비롯한 사회혁명당 세력은 주로 동아일보 사설을 통해 자신들의 견해를 선전했다. 1921년경 고려공산당을 탈퇴한 뒤 유진희 등과 함께 '신생활사 그룹'을 형성했다. 이후 신생활사에서 이사 겸 주필로 활동하다 1922년 말 필화사건으로 일제 형사에 의해 검거되었다. 1923년 1월 1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대정 8년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 이후 함흥형무소에서 수감할 때 중노동에 시달린데다 말라리아와 늑막염에 시달려야 했으며, 장딴지 종기로 수술하고 나서 탈구되어 한 다리가 짧아지고 갈빗대를 두 치 이상 잘라내야 했고, 방광염으로 고생하던 중에 양쪽 고막까지 막혔다.

출옥 후 경기도 경찰부 관내 요시찰인 명부에 기재되어 공산주의자인 '2종'으로 분류되었으며, 1927년 신간회 제주지부의 지회장에 이름을 올렸으나 겅강이 악화되어 별다른 조직 활동을 하지 못했다. <왜정시대인물사료>에는 그에 대해 “성행: 오만함. 치열한 배일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공산주의에 찬동하여 그 사상을 선전할 우려가 있음”라고 기록했다. 그는 이후에도 언론에 여러 글을 게재하였다. 1932년 잡지 <비판>에 '조선종교론'과 '민족단체 재건계획'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으며, 1936년 5월 오사카에서 동향의 동지 목우 김문준이 옥사하자 "목우를 곡함"이라는 제목의 글을 민중시보 1936년 6월 21일자 기사에 게재했다.

1930년대 중반부터 일제에게 영합하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1935년 10월 <삼천리>에 기재한 <북중정권의 새로운 형태-실질적 보호, 형식적 완충>에서, 그는 만주에 대한 일본의 태도를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듯하면서도 일본의 입장을 두둔하는 논조를 전개했다. 특히 "적화열렬을 방위하기 위한 일중만 3국의 실제적 합작"이란 표현이 기술되어 있다.

그래도 <고구려 고증>(1935.9), <만리장성까지 나갔던 고구려>(1935.10), <왕검 변해>(1935.11) 등 한국사와 관련된 글을 게재하였고, <의회 정치와 독재 정치>(1936.1), <독재정치와 의회정치>(1937.5)에서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주의자의 관점을 유지했다. 그러나 중일전쟁 시기에 쓴 글에서는 그의 논조가 확연히 달라진다. <전쟁과 평화>(1938.8)에서 친일 성향의 논조를 전개했으며, <건설의식과 대륙진출>(1939.1), <전시 조선인 의복 문제-우리 의상의 유래>(1940.3), '씨제도'의 창설과 '선만일여'(1940.3)에서 이러한 친일적인 논조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건설의식과 대륙진출>에서는 일본의 '신동아건설'이라는 목표의 달성을 위해 한민족은 일본과 중국 사이에 '조화역'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전시 조선인 의복 문제-우리 의상의 유래>에서는 "건원관계로 말미암아 인력을 사용함으로써 비롯"되어 중국에서 들어온 백색의상이 민중생활을 억압하고 있으므로 백색 위주의 우리 의복에 대한 개량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으며[4], <'씨제도'의 창설과 '선만일여'>는 창씨개명을 옹호하는 입장을 드러냈다. 또한 1938년 1월 조선어학연구회의 기관지 <정음>에 <한글운동과 파쇼 의식>을 게재했다. 그는 이 글에서 조선어학회가 추진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철저히 반대했고, 1912년 조선 총독부에서 정한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창씨개명을 옹호하는 입장을 보였으면서도 정작 본인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으며, 1941년 4월 1일부터 동아일보에 "제1차 대전 후 세계사"라는 글을 7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이후에는 북제주군 구좌면 세화리에 위치한 차녀 김순실의 집에서 요양하다가 1943년 4월 11일에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나라를 찾기 전에는 사망신고도 하지 말고 내 무덤에 비석도 세우지 말라.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김명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3. 참고 문헌

  • 김동윤, <송산 김명식의 생애와 문학>, 한국문학회, 2013.


[1] 조천이동파[2] 김해 김씨 집성촌이다.[3] 곽종원, <새해에 환우들은 엇더하신가. 환우 기명식, 황옥, 현상윤 군을 찾고>, <개벽> 제66호, 1926.[4] 이것은 일제의 농촌진흥운동과 관계 깊다. 이 운동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시장경제’에 종속되지 않는 자급자족, 정신적인 측면에서 상호부조, 유색의복 착용, 천황에 대한 충성, 일장기 게양 등을 강조했다. 특히 유색의복 착용 운동은 초창기 진흥운동의 중심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