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족보명 | 권오옥(權五玉) |
자 / 호 | 서언(瑞彦) / 백우(白愚)[1] |
본관 | 안동 권씨[2] |
출생 | 1924년 5월 2일 |
경상북도 안동군 일직면 망호리[3] | |
사망 | 2007년 12월 18일 |
서울특별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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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2. 생애
권오복은 1924년 5월 2일 경상북도 안동군 일직면 망호리의 농가에서 아버지 권영국(權寧國)[4]과 어머니 의성 김씨 김대락(金大洛)의 딸 사이의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권영국은 개화된 지식인으로서 한문 성경을 즐겨 읽었고, 경술국치를 당한 후 조선총독부로부터 일직면장에 취임하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거절하였다.# 그 또한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아 어려서 한문을 수학하였다.그는 1944년 9월 고향 안동 및 의성군 사람 10명과 함께 근로보국대에 징집되었다. 당초 일본제국 육군 제44부대에 배치될 예정으로 일직면 운산리 운산역을 출발하여 중국 화중 지구로 이동 중, 중국인 복장을 한 누군가가 "충칭에 임시정부가 있으니 탈출하라"라고 귀띔한 것을 듣고 배선두(裵善斗)·이용득(李龍得) 등 7명의 동지들과 함께 소총과 식량을 휴대하고 후난성 헝양 지방을 지나던 본대를 이탈하였다.
이후 국민혁명군 지역 방위대원에 인계되어 여러 부대 및 군벌들을 전전하다가 탈영한지 6개월 만에야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도달하였고, 한국광복군에 입대하여 청년훈련반 교육을 수료했다. 1945년 2월에는 충칭 근교의 토교(土橋)[5]로 거처를 옮기고 토교대(土橋隊)에 편성되었고, 곧 총사령부 경위대에 편입되어 임시정부 청사를 경호하는 데에 진력하다 8.15 광복을 맞았다.
그는 1945년 11월부터 상해교민관리소 요원으로 근무하다가 관리소가 해체된 1946년 6월에서야 귀국할 수 있었다. 귀국 후 임시정부 경호대장이었던 김동수로부터 국방경비대에 입대하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거절하고, 그해 8월 말 고향 안동으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좌익과 우익이 대립하던 해방정국에 두려움을 느껴 임시정부 사진을 비롯해 광복군 모자, 제복, 임시정부 명단과 주소를 적은 수첩, 휘장 및 배지 등을 전부 소각했다.
이후 서울특별시로 이주하여 평범하게 지내다 2007년 12월 1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권오복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2007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