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개
정식 명칭은 인왕산 국사당(仁王山國師堂). 한국 무속신앙에서 신을 모셔놓고 굿을 하는 데 편하도록 민가와 좀 떨어진 곳에 짓는 굿당 중 하나로, 중요민속문화재 제28호(1973년 7월 16일 지정)로 지정되어 있다.매년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사당을 국사당(國師堂)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2. 역사
국사당의 신목.
인왕산 국사당의 건립연대는 확실치 않다. 다만 건축 양식이나, 진열하고 있는 무신도의 신격, 조선왕조실록에 남산의 산신을 목멱대왕에 봉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목멱신사(木覓神祠)에 관련된 기록이 있어 조선시대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 국사당은 서울 남산 꼭대기(지금은 팔각정이 위치)에 지어진 건물이었다. 그러나 1925년 일본인들이 남산 기슭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으면서 국사당이 자기들의 신사보다 높은 곳에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이전을 강요하면서 결국 지금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이전 장소를 인왕산 기슭으로 택한 것은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그곳에서 기도하던 자리라고 전해지기 때문이다.[1]
앞면 3칸, 옆면 2칸이고 양끝의 2칸은 이곳으로 이전한 후 새로 지은 것이다. 1칸은 4쪽의 여닫이문으로 되어 있고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내부의 3면에는 무신도가 걸려있고 마루에는 제상을 차리고 굿을 하는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반 건물보다 구조는 간단한 편이나 그 규모는 더 크며, 이전 당시 원래 사용하던 자재들을 그대로 가져와 건축하였다.
3. 모시는 신들
국사당에 모셔진 신들은 다음과 같다.4. 내부 모습
국사당의 내부 모습. 내부의 단청은 단청 중 가장 화려한 금단청으로, 조선시대에는 유교 건물에서는 검소함을 추구했기에 거의 사용하지 않고[7] 사찰같은 종교건물 위주로 사용했던 단청이다. 한국전쟁의 화마에 여러 사찰들이 휘말려 소실되었기 때문에 현재 한국에서 금단청이 쓰인 건물은 많지 않다. 인왕산 국사당은 몇 안되는 금단청이 남아있는 건물 중 하나이다.
5. 기타 정보
국사당은 무당개인이 운영하는 신당이 아니라 관리자인 당주(堂主)가 따로 소유하고 있으면서 무당의 요청이 있으면 유료로 빌려주는 굿당이다. 일반 개인도 절처럼 개인적으로 찾아와 참배하고 기도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주변에 여러 암자와 교회가 섞여 있지만 역사적 상황 때문인지 이렇다 할 종교적 분쟁을 빚는 경우는 흔치 않다.[8] 사직공원 쪽 인왕스카이웨이와 인접해 있으며, 등산로로 20여 분을 걸어 들어가야 한다. 외관으로도 굿이 있는 날이 아니면 절, 암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조성제와 최준식 등 일부 무속 연구자들은 이 인왕산 국사당을 이슬람의 메카나 일본의 이세 신궁처럼 한국 무속신앙의 중심지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무속신앙은 이슬람이나 신토처럼 국가 주도하에 하나의 단일 교단 형태로 통일된 적이 없다.[9] 과거 나라에서 특정 지역의 명산대천에 직위를 내린 것도 어디까지나 나라를 지켜달라는 주술적인 의미와 민심의 위무 차원일 뿐 특별히 국가 주도로 무속신앙의 교리나 교단을 정비하고 각 지방신의 위격을 일일이 구분해 모든 지역에 통일시키거나 한 적은 없다. 즉, 전통적인 무속신앙이 통일된 체계없이 각각의 지역에서 각자 자생해온 만큼, 국사당이 한국 무속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는 표현은 적절치 못하다.[10] 하지만 무속 연구가들이 그 사실을 몰라서 무속신앙의 중심지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국사당은 국가에서 인정하고 제사를 지내는 수호신사이며 수도 한양에 위치해있다는 상징성 때문에 무속신앙의 중심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일단 그 규모와 역사는 무속 시설 시설 중에서는 가장 크고 오래되었으니, 그것을 기준으로 한다면 틀린 주장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1] 전해지는 얘기에는 이성계가 젊었을때 비가 내려 노모와 딸이 사는 한 허름한 집에 잠시 신세를 졌다. 잠을 자는데 대들보 세개가 등에 얹히는(무학대사가 해몽해준 그 꿈)꿈을 꾸었다. 집주인 할머니가 그 꿈을 듣고 왕이 될 것이라는 해몽을 해주었다. 그때 마침 옆에 자고 있던 딸이 그것을 듣고 깨 이 손님이 왕이 되냐고 떠들었다. 당황한 이성계에게 노파가 딸의 뺨을 때리라 시켰고 이성계는 엉겁결에 따귀를 쳤는데 딸은 죽고 말았다. 그리고 노모가 하는 말이 액땜했으니 오늘 일은 발설하지 말라며 내보냈다. 훗날 이성계가 그 집을 찾아보니 흔적도 없었고, 노모와 딸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운게 지금의 국사당이라고 한다. 출처: 이경재 저 가람기획(2002년) <청계천은 살아있다>에서 발췌함.[2] 최영이라는 주장이 있다.[3] 천연두를 옮기는 신.[4] 역시 천연두와 관련된 신.[5] 점술과 관련된 신이다.[6] 예능의 신.[7] 예외적인 경우로는 환구단이 있다. 환구단 단청은 유교 건축물임에도 화려한 편이다.[8] 반면에 이태원의 부군당은 기독교인이 토지를 매입해 바로 옆에 교회가 들어왔다. 물론 이 곳도 다행히 별 사고는 없다. 여담으로 역사적으로 이쪽도 일제에 의해 안좋은 일을 많이 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 순사들이 말을 타고 앞을 그냥 지나다니다가 사고가 생기다보니 함부로 못 건드렸다고 한다. (민속원 저, '서울 이태원 부군당굿' 참조)[9] 국교로 지정된 적이 없다. 불교 도래 이전에는 국가 체계자체와 융합된 제정일치 사회가 있었지만 후대의 유교(조선), 불교(삼국, 고려)처럼 국가의 사상적 근간을 이루는 국교로 섬겨진 것과는 다른 형태다.[10] 다만 이런 체계가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라서 가령 무속신앙 내에서는 자체적으로 각 지역의 유명한 명산대천이나 기도터의 품계를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