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곡부 공씨[1] |
출생 | 1914년 12월 24일 |
황해도 해주군[2] (현 황해남도 해주시) | |
사망 | 1998년 10월 29일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대림동 대림성모병원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762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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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2. 생애
공태훈은 1914년 12월 24일 황해도 해주군(현 황해남도 해주시)에서 태어났다.그는 일찍이 일본으로 유학가서 도쿄농업대학 축산학과에 재학했다. 그러던 1938년, 그는 김두혁·김운하(金雲夏)·김태훈(金泰薰) 등과 동지적 결합을 맺고 동교 유학생 모임인 계우회(鷄友會)를 중심으로 독립의식을 길렀다. 또한 이들은 별도로 항일결사 평안(平安)클럽을 조직했는데, 이때 그는 동지 포섭의 일을 맡아 활동했다. 평안클럽은 공산주의를 배제하고 민족의식 고양에 힘을 썼으며, 투쟁방략으로 농민계몽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먼저 교직에 재직하면서 학생들을 상대로 독립정신을 고양했다.
1940년 도쿄농업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공태훈은 평안남도 평양부 하수구리(현 평양시 중구역 서문동)에 본적을 두고 평양 광성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앞서 귀국하여 평안남도 대동군 소재 송산고등농사학원(松山高等農事學院)을 근거로 활약하고 있던 동지 김두혁 등과 긴밀한 연락을 가지며 평안클럽의 사업을 수행했다. 그러나 계우회의 항일 활동이 경찰에 발각되면서 평안클럽 역시 드러나고 말았고, 결국 그는 1941년 3월에 체포되어 1년간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2년 3월 평양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8.15 광복 후 동국대학교 농업생물학과[3] 주임교수로 재직하며 농림대학장을 역임하였고 1980년에는 인삼을 주성분으로 한 항암제 개발에 성공하였다.# 이후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동으로 이주하였으며, 정년퇴임 후에는 동국대학교 대학원 교수로 연구를 계속하였다.#
1998년 10월 29일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대림동 대림성모병원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공태훈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1998년 10월 31일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