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9-17 10:51:29

강백산(성군 순종대왕 일대기)

1. 개요2. 작중 행적3. 기타

1. 개요

성군 순종대왕 일대기의 주인공. 원 역사의 순종에 빙의했다.

2. 작중 행적

원 역사에서는 조지원과 같은 세계선 사람으로 대학 시절 구한말 조선을 포함한 '실패 국가 살리기 프로젝트'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러다 또라이 미국 대통령 때문에 제3차 세계 대전이 발발해[1] 핵을 얻어맞고 망해가는 대한민국에서 육군 병장으로 군복무 중 대한민국이 중국에 항복하고 전쟁이 끝나자 백두산 초소에서 철수하던 도중 백두산 천지를 바라보며 "어느 신이든 제발 한번만... 좀 도와주시면 안 됩니까?"라고 한마디 빌었다가 백두산 산신령에 의해 원 역사의 순종 이척에게 빙의되었다. 8세 때 천연두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 강백산이 빙의되었는데, 빙의 직후 상태창 드립 치면서 생쇼하자 놀란 민자영이 무당들을 불러 굿을 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무당들은 세자에게 양귀가 씌었는데 세자가 양귀를 잡아먹고 양귀의 신기(神氣)를 손에 넣은 것 같다고 진단했다고.[2]
빙의 후로는 원 역사 순종이 어린 나이에 겪은 말도 안 될 정도의 각종 스펙타클한 일대기를 보고 경악하는 한편, 태종 이방원을 본받아 조선을 개혁하기로 결심한다. 알맹이가 어른이므로 성실하게 공부하는 태도로 대신들의 칭찬을 받고,[3] 다가올 임오군란에 대해 예견하고 민영환에게 대책 마련을 권하는 등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 신료들에게 나라의 홍복, 성군감이라는 칭송을 받는다. 직접 만난 이토의 외모 언급을 보면 원역사 순종과 달리 빙의의 영향인지 아니면 몸관리를 한 영향인지 과로로 피곤해보이는 성실한 대학생 느낌이 난다는 모양.
임오군란의 결과로 인해 백성의 한, 선비의 의기가 모여 만들어진 명분과 정통성이라는 절세보검을 손에 넣었으나, 함부로 휘두를 생각 없이 한역된 만국공법[4]과 각국의 법전들을 두고 공부에 매진하는 중이다. 다만 그렇다고 본인이 제왕학에 익숙하지 않아서 공부가 머리에 들어오지 않으니, 시간을 벌고 고종의 마음도 풀어줄 겸 내각제라는 방안을 제시한다. 겉으로는 아버지에게 반항 한 번 안 하고 돕는 "효자" 행세를 하고 있으며 세간에도 그렇게 알려져 있지만 고종은 대원군과 반대의 방법으로 자신을 압박한다고 진절머리치면서도 아직 세자를 몰아낼 생각까지는 하고 있지는 않다.[5] 현 시점에선 공민당의 실질적인 당수로 활동 중이다.
이후 고종이 강백산을 정적으로 인정하고 권력을 빼앗기 위해 빌드업을 시작하나, 이미 고균을 다시 자신의 수하로 들인 강백산은 고균의 입을 빌어 토템이 되는 것을 종용한다. 다만 아무리 성리학 질서가 망가진 조선 말이라고 하더라도, 유교의 근본은 효와 충이며, 그 중에서도 효가 더 앞선 가치로 인정되기 때문에[6] 이건 사실상 강백산의 실책이 되나, 고종이 화를 못 참고 어보를 강백산 머리에 던지는 사고를 친 후, 이를 알게 된 대원군이 스스로 백두친왕 군호를 받고 낙향하며 (사실상) 내가 자식 교육을 잘못했다라며 책임을 지는 것으로 인해 강백산의 실책이어야 했을 이 도박수는 오히려 강백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게 된다.[7]

이후 자신이 확실히 이 시대의 효에 대한 무게를 너무 가볍게 봤다며 반성한 뒤 고종의 칭제건원식에 대왕대비의 직인을 받아 참석하여 태세를 역전시키는데, 고종은 조선의 국시는 성리학이라며 자신이 왕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려 하나, 성리학적 질서는 김옥균의 갑신정변의 주자파묘 발언과, 조청전쟁의 선전포고 직전에 성리학을 포기한 조선에서는 국시로서의 가치를 잃어[8] 성리학을 방패 삼으려고 했던 고종은 이미 조선의 국시가 성리학이 아니라는 것을 그제야 자각하고는 얼굴이 시퍼래지게 된다. 이형은 그 자리에서 충효사상을 악용해서 회피기동을 하지만, 여기서 물러났다가는 자신이 바라는 혁명을 이룰 수 없기에 익선관을 벗고 사람들의 앞에 나아가서 연설을 한다.
"국민 여러분. 솔직하게 말하여, 제가 말재주가 썩 좋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것만큼은 약속드리겠습니다.
다시 만납시다.
몇 번이고 만나고, 몇 번이고 이야기를 나눕시다. 처음에는 낯설겠지만, 그거야 인간관계라는 게 원래 그런 법 아니겠습니까.
경전에서 민심은 곧 천심이라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그건 틀린 말입니다. 민심은 그저 사람들의 목소리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먼저 말을 건네면 대답이 돌아오고, 때로는 먼저 말을 건네기도 하며, 희로애락을 나누어야 할 목소리를 하늘의 뜻이라고 규정했기에. 마치 그 자체가 상서로운 뭔가라도 되는 양 우리는 너무도 서로를 어려워하고, 멀리해왔습니다."

그리고 그건 꼭 민심에 한한 이야기가 아니다. 동경은 이해에서 가장 먼 감정이라는 누군가의 말대로, 무언가를 신성시할수록 결국엔 멀어진다.
처음 이 땅에 임금이라는 말이 생길 적 임금이란 그저 촌장 정도의 의미밖에 가지지 못했다.
국(國)이란 작은 읍락을 형상화한 상형문자였고, 가(家)란 말 그대로 가족이었다.
한 나라의 왕이란, 그저 온갖 고난으로부터 가족을 지키고자 집 주변에 벽을 쌓은 늙고 지친 가장을 이르는 말이었다.

"저 또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건 모자입니다. 제가 입은 것은 옷이고, 제가 오늘 하는 말은 여러분과 같은 조선말입니다.
그거면 되었지, 대체 우리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물론,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건 나 또한 알고 있다.
이 세상 모든 이치는 말로 할 때만 간단해진다. 그걸 행동으로 옮기는 순간 무언가 장애물이 생기고, 현실적인 난관이 발견되고, 타협을 핑계 삼아 일그러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라지는 건 있다. 눈에 띄지 않는 사소한 변화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보단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렇게 한걸음, 또 한걸음. 쉬지 않고 나아가면 된다.
시간은 쉼 없이 흘러가는 법이오, 역사란 사람이 쌓아가는 이야기니. 사람이 포기하고 멈추어 서지 않는 이상, 문명은 끊임없이 더 나은 곳을 향하여 나갈 거다.
시대가 드리운 어둠이 깊고 어두울수록, 우리가 나아갈 빛은 그만큼 가볍고 찬란할지니.

"자. 어떻습니까. 조금 전까지의 이척과, 지금의 왕세자가 그리도 달라 보이십니까?"
106화 4월 혁명 中
직후 사람들이 어안이 벙벙해진 상황에서 이복동생인 이강이 태자 전하 만세!를 부르짖고, 예법을 잘 모르는 백성들이 만세를 외치며 환호성을 지른다. 이형은 당황해서 저지하려 했지만 조 대비가 보낸 궁인들에게 저지되고, 결국 대한민국의 선포 후 대한 제2대 태왕 융희제가 된다.[9] 일단 조선에서도 고종을 밀어냈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아서, 이를 경인년(1890)에 일어난 반정이라는 의미로 경인반정으로 부르고 있다.
이는 세자파의 친위쿠데타이자 무능한 국왕에 맞서 왕위 계승권자가 손수 일으킨 민중혁명이다.
조국의 앞날을 위하여, 그리고 의회주의와 헌정질서를 위하여. 인민의 이름으로, 인민과 함께, 인민의 왕이 되기를 자처한 전쟁영웅 왕세자의 오를레앙주의(Orléanisme) 혁명이다.

세자는 혁명을 일으켜야지만 보위에 오를 수 있었던 방계 왕족이 아니었다. 하물며 왕위 계승권조차 가진 적 없는 코르시카의 촌뜨기와는 아예 비교 자체를 불허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혁명이란, 인민의 군주란 도약을 의미했다. 그렇기에 그들의 행적에도 불구하고 그 저의가 순수하다고 평할 순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왕세자에게 혁명이란 추락이다. 그저 치워버리기만 하면, 차라리 못난 아비를 마차와 포도주를 곁들여 치워버리기만 하면 곧장 절대군주가 될 수도 있었던 세자다. 그렇게 보위에 오른 다음 지금까지 쌓아온 공훈과 국민적인 지지를 근거로 황제 독재를 선언했다고 해도 반대하는 목소리는 많지 않았을 거다.
그렇지만, 세자는 기꺼이 그 권력이라는 바벨탑에서 뛰어내렸다. 당당히 군중을 향해 나아가, 그들과 함께 거닐며 인민의 왕이 되기를 택했다.
국가의 주권이란, 이 나라의 국체란 전지전능한 신이나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나온다는 걸 증명하기 위하여.
106화 4월 혁명 中
당시 현장에서 이걸 목격한 프랑스 대사는 오를레앙주의 혁명임을 깨닫고 경악하는데, 오를레앙주의를 내세운 부르봉-오를레앙 가문이나 보나파르트주의를 내세운 보나파르트 가문은 정상적으로는 왕/황제가 될 수 없기에 혁명을 이용해서 자신의 지위를 올린 반면, 세자는 왕의 장자로서 아버지를 죽이고 즉위하면 그만이기 때문에 굳이 혁명이라는 수단으로 자신의 지위를 하락시킬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프랑스가 여전히 극심한 내부 갈등을 앓고 있는 상황에서 어쩌면 있었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곱씹으며 회한에 잠긴 건 덤.[10]

이후 만주방면에 전운이 감돌자 전쟁을 결의하고 친정에 나설 것을 천명한다. 이후 심양전투와 울도해전의 대승 후 블라디보스토크를 포위한 뒤 백두산에서 봉선의식을 치르게 된다.

이후 한국과 해동연맹이 가야 할 길을 고민하며 서재필과 상담하는데, 다름아닌 한국의 위상이 너무나 높아지고 인접국이자 동맹 일본이 폭주할 가능성과, 서토로 전락한 중국이 한국을 질시해 적대할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한국에 대한 기대와 책무가 너무 무거워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재필은 과거 융희제가 바라던 것처럼 이웃국가의 질시를 두려워하지 말고 황화론을 현실로 만들어주자고 조언한다.

3. 기타

빙의 이전의 세계관이 세계관인 만큼 단순 사학자라고 보기 힘든 이력을 지니고 있는 걸로 추정된다. 모르핀 조제 방법을 안다거나, 총기도 어느 정도 다룰 줄 안다는 언행을 보인다. 3차대전 참전용사 출신이라는 비범한 설정이 있기도 하고 과거 전장에서 죽을 뻔해서 모르핀으로 겨우 살아남은 후덜덜한 경험도 있었다고 한다.
그 와중에 디자인 센스는 좋지 않다고 묘사되는데, 이게 아버지인 이형의 입장에서 언급되는 걸 고려하면, 아무래도 위장복을 도입하려고 했던 모양. 문제는 위장 패턴이 실질적으로 군복으로 사용되는건 이로부터 약 50년이 흐른 뒤인 슈츠슈타펠바펜SS가 시초인데다가 19세기 말은 전쟁에서 아직 낭만을 찾던 시기인 만큼 원 역사에서도 디자인 센스 하나는 좋다고 평가받던 이형으로서는 이를 인정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1] 노동법 에피소드에서 언급되기로는 전생에는 국제기구 공무원이었다고 한다. 제3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사실상 국제기구가 해체되자 귀국 후 징집된걸로 추정된다.[2] 더 웃긴 건 저 문장에서 양귀와 세자의 위치를 반대로 바꾸면 완벽히 일치한다는 것이다.[3] 공부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공부를 열심히 하면 어른들이 좋아한다는 이유였다. 한문에 능하지 않다는 점이 흠으로 지적되었지만 10살도 안 된 아이라서 그러려니 했다.[4] 구한말 국제법을 부르던 표현이다. 미국의 외교관인 헨리 휘튼이 1836년 출간한 국제법 서적의 이름이기도 하다. 정확하게는 헨리 휘튼의 'Elements of International Law'이 중국에서 한역되면서 붙은 이름이 만국공법이며, 이게 구한말에 조선으로 들어오며 만국공법이라는 이름이 국제법의 역어가 된 것.[5] 임오군란의 여파로 인해 조정의 모든 대신들과 백성들에게 외면당한 상황에서 세자의 자리를 대체할 만한 아들이 있는 것도 아니라(의친왕은 궁에 안 데려왔다) 지금 대책없이 세자를 몰아냈다가는 아직 살아있는 대원군에게 다시 시달려야 하기 때문이다.[6] 유교의 근본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국가 이전에 가족이 있다라는 사고방식에서 시작되고, 이는 즉 가정 내의 질서인 효가 바로 서야 국가 내의 질서인 충이 바로 선다. 라는 의미로 이어지게 된다. 오륜에서 처음이 가족 내의 가치인 부자유친이고, 두번째가 국가 내의 가치인 군신유의인 것이 이 때문. 즉, 고종의 실책을 두고 퇴위를 종용하는 것보다 아버지의 실책을 자식이 질책하는 것이 더 중한 문제로 거론될 수밖에 없다.[7] 만약 여기서 고종이 강백산을 두고 아들이 불효를 저지른다고 반박하게 된다면, 이는 대원군이 고종을 잘못 교육했기 때문이다가 먼저 깔려버리니 대원군에게 교육을 잘못 받은 고종이 세자를 잘못 교육했다는 게 되어 강백산의 잘못이 곧 고종 자신의 잘못이 되는 것도 모자라 고종 자신이 대원군을 상대로 아버지의 실책을 자식이 질책하는 꼴이 되므로 되려 고종 자신이야말로 가장 큰 불효자가 되어 얼마 안 남은 정당성마저도 날려버리는 꼴이 되어버리기 때문. 그런다고, 강백산이 원세개와 내통해서 자신을 팔아치웠다고 하려고 해도, 이미 이런 사태가 벌어진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해 봤자, 조청전쟁 초반에 몰래 도망치려다 포로가 된 실책을 묻을 겸 정적을 치우기 위한 거짓말로 여겨질 가능성이 크다. 심지어 잘 먹고 잘 자서 살이 찐상태로 포로교환된 것을 보면 신빙성이 더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8] 국시로서의 가치를 잃었을 뿐, 일반적인 국가 운영이나 사회질서에는 아직도 영향력이 있지만 왕권을 정당화하는 가치를 잃은 것[9] 제1대 태왕인 고종은 30분만에 태왕 자리에서 퇴위(당)했다. 말이 제2대지, 실제로는 즉위식에서 고종을 밀어내고 강백산이 즉위한 셈이라 사실상 초대 태왕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10] 당시 영국 대사와 미국 대사는 권리장전이니 미국 혁명이니 드립을 치고 있었지만 당시 프랑스 대사 시점에서 서술된 것과 '4월 혁명'이라는 호칭이 7월 혁명과 유사함을 고려하면 작가는 오를레앙주의의 7월 혁명으로 규정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