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1-18 15:15:51

김옥균(성군 순종대왕 일대기)

1. 개요2. 작중 행적3. 평가4. 기타

1. 개요

성군 순종대왕 일대기의 등장인물. 원 역사의 김옥균에게서 모티브를 따왔다.

2. 작중 행적

홍영식과 함께 일본 유학 중인 모습으로 등장. 고종과 흥선대원군의 악행으로 이씨 왕실에 대한 불만을 숨기지 않는다. 홍영식은 일본을 지나치게 우상화하는 모습에 불안감을 품는다. 다름 아닌 정한론을 주장한 사이고 다카모리, 후쿠자와 유키치 등을 동경하니... 일본에 있어서 소식이 늦다 보니, 제물포 사건의 결과로 내각제가 들어선 것을 모르고 조선을 자신이 개혁하겠다고 벼르고 있었으나…… 바로 다음날 내각제 소식을 듣고 몰려온 민권운동가들에게 휩쓸릴 예정.

조선으로 귀국하자마자 이척이 바로 측근으로 낙점하면서 나의 삼봉이 되어주겠소라는 말에 홀려 세자를 자신이 찾던 조선의 메이지라 여기며 세자의 영웅호걸이 되어 중추원 부의장으로 임명되자마자 국내의 부패 기득권층을 척살하기 시작한다.

최익현이 조선의 개혁안을 대동학이라고 주자학에 기반하여 해석한 것에 반발하여, 갑신년 신년사에서 주자가 죽어야 조선이 산다는 발언으로 조선 전역에 파문을 일으킨다. 하도 논란이 되자 중추원 부의장 자리를 사직하고 칩거하긴 했지만 지나치게 막 나가는 태도 때문에 세자파의 젊은 관료들에게조차 예비 역적 취급을 받으며 기피되고, 유림에서는 김옥균을 죽여야 한다고 난리를 쳤지만 민심은 입만 산 꼰대 유림들보다 겉보기에는 부패 청산을 위해 노력한 젊은 도련님인 김옥균에게 더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고종은 이를 거부한다.

민영환은 세자가 힘들게 만든 판을 분열시킨 김옥균의 싸대기를 갈기면서 따지지만, 김옥균은 자신은 간언한 것이라고 고집한다. 물론 이렇게 도당을 만드는 것 자체가 세자의 의도였긴 했지만. 물론 지난 부패척결의 선봉장으로 나선 덕에 민심이 김옥균에게 우호적이라 정치적으로 재기할 가능성은 아직 남아있다. 결국 세자파의 관료들은 세자의 조언을 받고 총선을 열고 공민당을 창당하면서 김옥균을 사실상 버린다.

현재 공민당이 이기든, 의열단이 이기든 백의종군형 즉 삭탈관직으로 끝낼 예정인데, 소문이 이상하게 돌아서 총선에서 유림이 참수형 당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여, 선거 열풍이 더욱 거세진다. 그리고 총선 결과...
"…어?"
유생들이 모여 만든 제3당 죽림파가 원내 제1당이 된,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오는 바람에 사실상 참형이 결정되어 버렸다. 바로 직전까지 자기가 설마 죽겠냐고 마음 놓고 걱정하던 아내를 핀잔 주던 김옥균은 저 결과를 신문을 통해 받아들고는 굳어버리고 만다.

그나마 죽림파가 3할 몇푼으로 제1당이 되긴 했으나 사형은 과하다고 주장하는 두 당이 전체 의석의 2/3에 달하기 때문에 실제로 사형이 집행되기는 어려우며 마침 고종도 그다지 사형을 집행하고 싶어하지 않은 상황이다. 다행히 죽림파가 김옥균의 처형에 부정적인 세간의 여론을 인식하면서 사형 대신 강화도로 유배라는 식으로 의회가 의견을 일치하여[1] 강화도로 가솔을 데리고 유배라는 이름의 관광(?)을 가게 된다.

다만 거의 전원이 강화도로 가면 청으로 끌려간다라고 예측한 상황이었는데…[2] 원세개가 데리고 온 통역이 원세개의 발언을 이상하게 곡해하며[3] 다시 한번 정신에 불이 붙게 된다.전술 김옥균 발사

이하응은 강백산에게 저놈 청나라에 보내도 괜찮은 거냐 묻지만 강백산은 다른 나라라면 원 역사처럼 갑신정변 벌여도 이상하지 않지만 청나라는 조선보다 정치가 후지기 때문에 그럴 일 없고, 폭발해도 청나라를 향해 폭발할 거라고 개의치 않았다.

이후 청나라로 도착하면서 상투를 자르고 양복을 입는 등 완전히 서양인의 모습으로 바꿔 민태호가 꼴이 그게 뭐냐고 속으로 황당해했다. 사실상의 포로지만 명목상으로는 주청 조선 공사 신분이라고. 이홍장이 자신을 추궁할 때는 내가 이홍장이 경계할 만큼 거물이 된 거냐고 속으로 망상하면서 자신은 개화와 유신을 추종한다 대답하고, 태후궁에 도는 모르핀 문제에 대해서는 군졸들이 쓰는 좌약을 대국의 국모라는 분이 사용해야 한다면 진짜로 어디 아픈 거겠지 한낱 유희거리로 쓰겠냐고 비아냥거려 이홍장의 입을 다물게 하기도 했다.

청나라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일단 이홍장을 지원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엘리트주의자 성격과 일본 유신 취향이 더해진 결과이다. 문제는 이홍장이 쿠데타를 일으켜 유신을 벌이려 한다고 생각해서 북경 여기저기에다 이홍장이 전쟁이 끝나면 쿠데타를 벌이려 한다고 사방팔방에 소문을 내버렸고, 이 소식을 들은 서태후는 내가 모르는 제3자의 개입이거나 아니면 북경 민심이 이홍장을 떠났거나 둘 중 하나겠지만 이를 이용해 이홍장을 견제하면서 청나라가 조선 주식에 꼴아박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1887년 시점 이홍장은 본인이 계획한 것도 없었으므로 당연하게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고 되려 북양군을 마적들 명분으로 만주로 보내 손문 등의 실망을 사게 되었다.

본인은 이홍장을 돕겠다고 소문을 내버렸지만 이것 때문에 골치를 썩은 이홍장은 당연히 연을 끊어버렸고 서태후는 주자를 파묘하라고 했던 김옥균을 일찌감치 외면했으며 만나고 다녔던 지식인들도 끈 떨어진걸 알고 발길을 끊었는데 이와중에 일본에서 조선과 대동학을 참고로 정치개혁이 진행되자 분통을 터뜨린다. 그나마 김옥균과 코드가 맞는 한족 청년들이 자신을 찾아온 덕분에 기력을 회복하고 조선으로 유학을 갈 수 있도록 지원해준다. 그런데 이렇게 조선으로 유학온 청년 중 한 명이 양다리를 걸치다 약혼자에게 참살당한 치정사건이 발생했고 하필이면 이 유학생이 흥중회라는 반청 비밀결사 소속이었다는게 드러나면서 조선과 청나라 간에 외교 분쟁이 발생[4], 그리고 이 외교분쟁이 종국에는 조선과 청나라의 조청전쟁으로까지 번지고 만다.

이후 조청전쟁이 시작되기 직전에 이홍장을 모함하고 흥중회 소속 유학생이 김옥균의 추천서를 받고 조선에 유학했다는 이유로 청나라에 의해 페르소나 논 그라타로 선언되어 조선으로 귀국하는데, 귀국 직후 전쟁이 터지면서 이도저도 못하고 개성에서 피난 생활을 하면서 봉급만 타먹다가 전쟁이 끝난 뒤 옛 정을 생각해준 박영효의 천거로 성균관을 근대식 대학교로 개편한 성균관 대학교의 초대 총장으로 임명된다. 반골 성향이 대학교 총장에 딱 적합하다는 강백산의 의도.[5] 이후 고종이 칭제권원을 핑계로 대리청정을 거두어 강백산의 실권을 빼앗으려 하자 그에 동조하는 듯 하다가 우리는 청나라가 아니라 명나라와 영국을 본받아야 하는데, 영국에서는 태자를 태자라 부르지 않고 왕호를 내리니까 동궁에게 새 왕호를 내려라라고 돌직구를 날리면서 두번째 핵폭탄을 터트린다.

세자에 의해 제지당하기는 하지만 이후 고종이 세자에게 어보를 던진 것을 보고는 급히 소문을 퍼트리려 하고 고종이 아예 전체 검열을 걸자 대놓고 머리에 붕대를 두르고 새빨간 도장을 들고 다니면서 나는 자진할 생각이 없고, 대단히 건강하게 살고자하는 의지로 가득하다며 본인이 죽으면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라는 의미로 떠들고 다니며 고종이 자신을 건드릴 가능성을 원천 차단한다.

경인반정 당시 세자가 조대비의 직인을 받아 나타나자 다친 머리는 멀쩡하냐대놓고 만인 앞에서 소리치면서 고종을 궁지로 몰아넣었고, 이후 이강이 자신도 살고 싶어서 붉은 두건을 두르고 태자 전하 만세!를 외치며 갑자기 모두의 주목을 가져가자, 이를 커버하기 위해 자신도 태자 전하 만세!를 외치며 대중의 분위기를 완전히 강백산쪽으로 기울게 만들었다. 이런 공헌 덕분에 경인반정이 끝나고 1등 공신으로 수훈되었다고.

러시아와 전쟁이 끝난 후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 때 기어코 영어로 식민지 열강들에게 민주주의 교육도 못한 허접이라는 발언을 하고 끌려나가는 것으로 간만에 등장해 또 큰 사고를 치고 만다. 다만 이 행적이 곧 미국 대통령이 될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마음에 들면서 향후 국제 사회에서 한국의 든든한 아군을 만드는 나비효과를 창출해낸다.[6]

이후 미국 대사관으로서 사해지맹이라는 대계를 융희제에게 직접 받는다. 현 국제질서를 부정하는 몽상이라 생각하지만 영국에게는 자치령을 만들어 총회를 장악하게 하고 미국에게는 돈으로 자선을 배풀어 스스로의 위신을 높이게 하며 프랑스의 외인부대 개념을 끌고와 국제사회에 벌어지는 기아, 문맹, 빈곤, 역병들을 백인들의 돈과 힘으로 해결하는 현대의 UN의 개념을 듣게 되자 고개를 조아리며 목숨을 걸고 해내겠다며 적지 않은 나이에 그의 반골의 기운을 불사르게 된다. 또한 융희제로부터 경제 대공황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이에 대한 대책을 연구해보라는 명령을 받고 미국의 사례를 근거로 연구한 끝에 정부 개입을 통한 시장 활성화라는 나름대로의 답을 찾아서 귀국한다. 문제는, 귀국 후 어윤중과 대화하며 대공황에 대비한 정부의 여유 자금 등에 대해 알아보다가 하필이면 경신대기근을 언급하는 바람에 어윤중은 '김옥균이 또 흉계를 부리고 있다'라며 보고하게 만든다.

결국 이상한 소리를 한 바람에 세자시절 대신들과 융희제 앞에 끌려나와 계획의 설명을 시작하는데 환곡으로 모아둔 자금을 이용해 대공황에 각종 토목건설 등을 진행하여 백성들을 구휼하자는 정부개입 방법을 낸다.[7] 이어서 한국과 일본만으로는 체급이 떨어지니 아예 전세계의 돈을 모은 환곡 즉 IMF의 개념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아주동맹들을 참여시키는 계기를 시작하게 된다.

3. 평가

일단 이 김옥균이 자체가 워낙 제 잘난 맛에 사는 놈이라, 멀리서 추앙하는 사람은 많아도 곁에서 한 번이라도 옥균이랑 일해본 놈들은 다신 저 밑에서 일하기 싫다고 학을 뗀다. 무조건 내가 옳고 남은 틀렸다는 놈인 데다가 한번 폭발하면 걷잡을 수 없고 발화점까지 낮은데 역린도 뻔하다. 그렇다고 안 긁고 아껴두면 얌전히 있을 가능성보단 내가 생각지도 못한 시점과 사건에서 기폭할 위험이 더 크고.
한마디로 뭐로 긁으면 폭발할진 뻔한데 우리 편이긴 해도 걔가 나가리 된다고 같이 피해를 볼 사람은 적고, 그러면서도 반대파에게 희생된 순교자로서의 가치는 무한대에 가까운. 글자 그대로 정치적 전술핵이다. 단지, 그 전술핵이 생각지도 못했던 주자를 정밀 타격해서 일을 여기까지 키울 거라고는 상정하지 못했을 뿐.
44화 수렴진화 中, 강백산의 평

강백산이 '삼봉'이 되어달라고 요청했을 때부터 독자들은 김옥균을 버림패로 쓸려고 할 거라 예상했고, 실제로 강백산은 이하응과 뒤에서 손잡고 양당제 총선을 열기 위한 전술핵으로 사용하고 버리려고 했다는 것이 밝혀진다. 다만 주자를 정밀타격한 탓에 예상보다 후폭풍이 심했다고.

후에 공민당이 되는 급진개화파 사이에서도 대동학이 대중에게 먹힐 방법론으로 쓸만하다는 평가를 받는걸 보고, 과거와의 단절과 완전한 서구화를 추진하는 자신이 소수파였다는 사실에 충격을 먹는, 자신의 생각이 올바르며 보편적 다수도 동감할거라 믿는 자기과신적인 모습을 보인다.[8]

청나라에 가서도 이홍장을 지원할 생각이라면서 합의도 없이 이홍장의 뜻을 사칭하고 만주족-한족 문제야 조선사람이니 이해 못하는건 어쩔수 없다 쳐도 조선에서도 역적몰이되서 쫓겨난 주제에 여전히 역적이 되더라도 서구화 해야한다는 독단적 사고에 동조할거라 믿는 등 그 성격은 변하지 않은듯.

김옥균의 인격적인 문제점이 많이 드러난다. 선민사상에 인종차별주의자이며, 개화와 유신을 추종한다면서 표를 조작해서 자신을 구해줄 거라고 믿는 등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모습을 보인다.[9] 무엇보다 망상병에 가까운 증상이 있어 현실 감각이 떨어져 사방팔방에 불 지르고 다니는 모습을 주로 보여준다. 이런 김옥균의 트롤링 기질 때문에 독자들도 찐광기라 부르며 혀를 내두른다.

이후 조청전쟁이 끝나자, 조청전쟁의 배상금인 은 8000만냥을 고작이라 부르며 식민영토를 더 뜯어내야 한다고 분통을 터트리는데, 보다 못한 박영효가 일본 2년치 세수라고 하자 조용해지는 식으로, 아직도 일뽕을 못 버린 상황이다.

고종이 세자를 배제하려는 모습을 보이자 조금 돌려서 말하긴 했지만 아예 상왕으로 물러나시고 세자에게 양위하시죠라는 의미의 말을 대놓고하는 바람에 민영익에게 누군가는 해야하지만 이미 주자를 파묘한다는 말에 청에 유배갔다가 거기서마저 사고를 치고 돌아왔으면 최소 반년은 조용히 할 줄 알았는데 곧바로 사고를 쳤으니 이게 인간송곳이지 사람이 맞냐며 경악하게 만든다.

4. 기타

공민당과 같은 성향이지만 공식적으로 공민당원은 아니다.

주변에 모아둔 인재들이 원 역사 친일파, 친러파, 매국노 등등이 대부분이라서 사람 보는 눈이 없다고 까이고 있다.


[1] 그 담담한 김홍집조차 강화도로 보내던지, 아니면 울릉도로 보내라고 요구할 정도였다.[2] 김옥균 본인도 청나라로 끌려가 잊힌 뒤에 돌아와서 출세한 동기들에게 꼽사리 끼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봤다. 즉, 김옥균도 이번 유배가 실질적으론 국외추방령임을 아는 것이다.[3] 완전한 곡해도 아니고, 원세개의 발언에서 문제될 부분을 적당히 그럴듯하게 돌려 말한 정도였다. 다만 그 다듬은 내용이 완벽하게 김옥균의 의욕 스위치를 직격하는 내용이었다는 게 문제일 뿐.[4] 사건을 담당한 박영효는 김옥균도 일본 유학시절 신나게 바람을 피워댔다고 회상하며 사람을 보내줘도 꼭 자기 같은 놈들을 보냈냐며 짜증을 낸다.[5] 여담으로 이 때 박영효가 전해준 강백산의 조언을 듣고 '대조선국 제일의 괴팍하고 괴이한 이에게 광기가 돌아왔다'는 작가의 서술이 일품.[6] 그도 그럴게 유럽의 식민지배를 부정한게 아니라 식민지배를 하면서 민주주의 교육도 안하냐는 지적이었고 막상 이 주장에 화를 냈다면 김옥균의 주장에 동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7] 물론 이어서 토인들에게 돈을 주어 빚쟁이로 만들자는 극단적인 이야기를 하자마자 어윤중에게 끌려나간다.[8] 원역사 갑신정변 당시 백성들이 당연히 자신을 따를거라 믿고 일본군을 동원한 걸 생각하면 어느정도 고증이다.[9] 김옥균 본인은 엘리트주의적 시각을 보이며 선거결과를 부정했지만 표 조작 없는 선거결과가 서구국가들에게 좋은 인상을 받게했고 조선 내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죽림파도 시대의 대세가 서구를 참고한 개혁임을 인정하고 수장인 유인석이 영국유학을 간다는 결과로 이어졌기에 가장 좋은 결과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