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47a0> 출생 | 1917년 12월 27일 |
제주도 제주군 상암동 | |
사망 | 1991년 7월 5일 (향년 73세) |
충청남도 연기군 | |
이명 | 스츠미야마(晋山金鍾) |
직업 | 독립운동가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clearfix]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소설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2. 생애
강금종은 1917년 12월 27일 제주도 제주군 삼양동에서 강모수(姜毛遂)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3살 때 아버지를 잃고 가난 속에 시달리다가 화북사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어머니 한정순(韓貞順)을 따라 전라남도 강진(康津)군 작천면 삼열리로 건너가 살면서 소년기를 어렵게 보냈다. 12살 때 모친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저사구(猪飼區)의 심상소학교 3학년에 다니다가 반년 만에 귀향, 삼양보통학교 4학년에 들어갔으나 가정이 어려워 5학년에서 자퇴하여 가사를 도왔다.1936년 4월 일본으로 홀로 유학을 떠나 오사카에서 점원, 신문 배달, 공원(工員) 등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기독교청년회의 영어학교에서 수학했으며, 일본대학의 오사카전문학교 법과 야간부 별과 등에서 공부하면서 일본대학 내 조선인 학우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1940년 1월 경판(京阪)상업학교 야간부 3학년에 입학하고 이듬해 졸업했다. 그는 이 무렵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졌고 일본에서 지내면서 한국인에 대한 차별대우를 뼈져리게 느끼면서 조선의 독립을 갈망했다.
그러던 중 제주 출신의 청년 김봉각(金奉珏)을 알게 된 강금종은 김봉각의 소개로 김병목(金丙穆), 한만숙, 고봉조 등과 회합하면서 조국의 독립을 성취하고자 조직을 결성하기로 결의했다. 1940년 5월 초순, 대판부 소재 김봉각의 집에 모인 이들은 독립운동에 관한 근본방침을 의논하고 먼저 조선인 대중을 상대로 민족의식을 계몽하기로 하고, 이를 위한 실천단체로서 '홍아연구회'라는 독서조직을 결성했다가 5월 26일에 계림동지회(鷄林同志會)로 개칭했다.
강금종과 동지들은 정치·사상·문예·종교 등 각 방면의 전문연구를 통하여 당시의 국제정세를 면밀히 분석하고 독립운동의 방향을 모색하는 한편 연구발표회를 통하여 독립운동의 지도자가 되기 위한 능력을 함양시켰다. 또한 집회 활동 때는 우리 말을 쓰되 일체의 문서는 기록하지 않고 비밀을 지킬 것을 신조로 삼았으며, 각기 임무를 분담하여 김봉각은 조직과 자금책을, 강금종은 교육책을, 김병목은 연락책을 맡았다. 한국 독립의 책략은 마르크시즘과 삼민(三民)주의를 중심 과제로 삼되, 정치 이론은 김봉각, 사상 이론은 강금종, 문예 종교는 김병목, 세계 동향은 고봉조가 담당하여 연구하기로 했다. 또한 동지의 영입은 김봉각, 강금종, 김병목, 고봉조, 한만숙, 부임전 등 6명의 전원 합의에 의해서 결정하기로 했고, 회합은 매월 첫 일요일로 하되 장소 기타에 관한 것은 김봉각의 지시에 따를 것 등을 행동 신조로 삼았다.
그러나 1941년 2월 25일 계림동지회가 일경에 발각되면서, 강금종은 다른 동지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42년 10월 12일 대판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언도 받아 1944년 4월 2일 출옥 때까지 옥고를 치렀다. 그는 감옥 안에서 불교 관계의 서적과 일본 작가 나츠메(夏目漱石), 쿠니키다(國木田獨步), 시마자키, 오자키(尾崎紅葉), 도쿠도미(德富蘆花) 등 주로 명치(明治), 대정(大正) 시기의 작품을 많이 읽었으며, 특히 펄 벅을 좋아해 대지를 즐겨 읽었다.
1944년 4월 2일에 출옥한 강금종은 누나가 살고 있는 사할린으로 건너갔고, 누나가 소개해준 임남철(林南喆)과 결혼했다. 그러던 중 일본이 곧 패전하며 사할린에 소련군이 진주한다는 소문을 들은 그는 1945년 3월에 조선으로 귀국했고, 몇달 후 8.15 광복을 맞이하자 교원 기자 생활을 했으며, 아내가 거주하는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읍 침산동에 자리잡았다. 이후 그는 조치원에서 작가 생활에 몰두하기 시작했고, 1948년 창작집 <어린 천사>를 출판했으며, 1955년 대전방송국 문예 작품 공모에서 <아내의 입장> 원고를 보내 당선되었다. 또 충남문화사에서 <난류(暖流)>를 출판했으며, 1959년 충북신문 신춘 문예에 동화 <아저씨의 선물> 원고를 보내 당선되었고, 1963년 46세 때 <자유문학>에 '상흔(傷痕)'을 게재하면서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등단 후인 1966년 소설 <미움의 세월>을 활문사에서 출판했고, 1972년 월간 충청사에서 펴낸 <먼 여로(旅路)」를, 또 1969년에 수필집 「흘러간 이웃들」을 내놓았다. 정부는 1982년 강금종에게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그는 1991년 7월 5일 충청남도 연기군 자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74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