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19:07:19

Arcaea/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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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파일:Arcaea 로고.png




1. 개요2. Arcaea
2.1. 해금 조건2.2. Arcaea
3. 히카리
3.1. 해금 조건3.2. Eternal Core3.3. Luminous Sky
4. 타이리츠
4.1. 해금 조건4.2. Eternal Core4.3. Vicious Labyrinth
5. Adverse Prelude
5.1. 해금 조건
6. Black Fate
6.1. 해금 조건
7. Final Verdict
7.1. 해금 조건

1. 개요

두 어린 소녀는 세상에 남겨진 과거의 흔적이 비치는 조각들ㅡArcaeaㅡ로 가득한 세상을 떠돌아 다닙니다.
Arcaea는 소녀들을 불러들이는 과거의 멜로디 조각들이지만, 이 조각들은 항상 두 과거 중 하나만을 경험할 수 밖에 없도록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소녀들은 이 Arcaea에서 어딘가 엇갈려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고, 이윽고 자신들의 선택에 상반되는 세계의 이야기를 찾아나서게 됩니다.

Arcaea의 스토리를 기록한 문서. 2.0 업데이트로 스토리 열람 방식이 개편되었다.

영어 실력이 된다면 원문을 읽는 것도 좋다. 다만 원문도 고급 어휘와 문학적 표현이 많아 읽기 쉽진 않다.

v5.4 업데이트로 한국어 번역이 크게 개선되어 감상이 수월해졌다.

===# 유저 번역문 #===
위 유저 번역문에는 다음과 같은 정보가 포함되어 있으니 주의를 요한다.
  • 존재하는 스토리의 이름, 혹은 번호
  • 스토리의 열람 조건 및 이에 따른 히든 악곡의 정보

2. Arcaea

2.1. 해금 조건

스토리 # 진행 순서 해금 조건
0-1 Arcaea-1 파일:arcaea_char_unknown_icon.png 파일:Arcaea/inkar-usi.jpg inkar-usi 클리어
0-2 Arcaea-2 파일:Arcaea/Grimheart.jpg Grimheart 클리어
0-3 Arcaea-3 파일:Arcaea/Shades of Light in a Transcendent Realm.jpg Shades of Light in a Transcendent Realm 클리어

2.2. Arcaea

====# 0-1 #====
—그리고 그들은 잠에 들었다.

...

수없이 많은 이야기가 끝을 맺고, 수없이 많은 이야기가 살아남아 되풀이된다.
하지만, 글로 쓰여지지 않은 이야기들. 아무도 말하지 않고, 아무도 듣지 못하지만, 줄곧 전해지는 이야기들...

그런 이야기들은, 기억을 통해 전해진다.
기억...

기억에는 분별이 없다. 한 사람의 기억이든 수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기억이든 더럽혀지지 않은 채 형태를 이룬다.
순수하고, 비극적이고, 경이로운 이야기들을 기억은 그대로 간직한다. 기록은 잊을지라도 기억은 잊지 않는다.

그렇게 기억으로만 전해진 이야기들,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들은 결국 바스라져 사라져간다.

그렇게 잊혀진 것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몰락과 슬픔과 잠깐의 달콤함, 그 모든 걸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아주 중요한 질문이다.

하지만 그 질문에 어떻게 답할지 고민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다.

기억의 보관소는 멈추지 않고 커져간다.
어느 날, 어느 장소에서...

기억의 보관소에서 몇 줄기의 실이 풀려나왔다.

두 소녀의 인생에 걸친 운명의 실.

무채색으로 빛나는, 더럽혀지지 않은 이상.

빛과 대립의 실...

====# 0-2 #====
영업이 시작되려면 아직 몇 시간은 남은 카페에, 한 소녀가 굽은 등을 하고 앉아있다.
잔에서 올라오는 김에 유리창이 뿌옇게 서린다. 아침의 차가운 공기가...

포착되었다.

한 남자가 검을 뽑는다. 그 눈에는 불타는 마을이 비춰지고 있다. 불을 붙인 장본인인 산적들이 등 뒤에서 웃으며 남자를 쳐다본다. 죽을 것임을 알면서도, 남자는 뒤로 돌아 검을 치켜올려...

꿰메였다.

엘레멘툼을 공부하는 학생이 빛과 불을 엮어 웃긴 장면을 엮어낸다.
고양이와 개의 귀를 한 친구들이 떠들썩하게 웃는다. 그 장면은 또 다른 친구가 실수로...

결정화되었다.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기억들이 결정화되었다. 수백, 수천개의...
수천개의 기억 조각들이 끝나지 않는 낮의 하늘을 수놓는다.

공중을 가로지르는 빛의 바람. 조각의 강.

이 오래된 기억의 조각들이 어떤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지는 알 수가 없다. 어쩌면 법칙 따위 없이 무작위하게 날아다니는 걸지도 모른다. 어떤 조각들은 다른 조각들과는 달리 한 곳에 줄곧 머물러 있거나, 무리에서 벗어나 혼자 움직인다. 어느 쪽이든, 이 세계를 정의하는 것은 "유리"다.

하늘에 자리잡은 것은 오로지 구름. 그 위로부터 비치는 빛이 모든 것에 내려앉는다.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다.
눈이 부시다. 억지로 만들어 지나치게 밝은 미소처럼.

그 밑으로는 대지가 펼쳐져 있다. 절반은 텅 빈 평원이며, 나머지 절반은 끝없는 구조물과 산맥이 차지하고 있다.

무채색의 구조물, 무채색의 땅, 이것들은 어째서 존재하는가?
“장소”는 기억과 떼어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닌가?

눈물을 흘린 장소, 손을 잡았던 장소...

그대도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 탑과 벽, 이 건물과 성들은 기억을 기념하기 위해서만 세워진 것들이 아니다.

이것들에 그런 시적인 낭만은 없다.
분명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긴 하나, 그건 전혀 심오한 것이 아니다.

존재 이유 그 자체...

그대가 생각하고 느끼기 위해 필요한, 너무나도 단순한 무언가...

====# 0-3 #====
또 하나의 이야기, 두 소녀의 이야기, 살아가기 위한 방법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졌다.

인생을 이끌어주는 이정표 따윈 없다. 삶이 있을 뿐이다.

삶이란 눈부시게 아름다우며, 험하고 가혹하다...

그것만큼은, 두 소녀가 동감했다.

너무나 아름다운 것을 보고 소리높여 울고 싶었던 적이 있는가?

억울함에 눈물을 흘려본 경험은 분명 있으리라.

눈을 떴을 때, 그대는 노력할 것인가? 아니면 살아가는 것만으로 만족할 것인가?

세상이, 그대를 행복해지도록 내버려둘까?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공중을 떠다니는 기억의 조각들.
행복한 기억과 불행한 기억들이, 희망에 찬 두 소녀들에게 이끌린다.

지금부터 시작될 이야기가 어떻게 풀려나갈 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대를 둘러싼 기억의 풍경들.

미래의 가능성이 아닌, 이미 일어난 사건을 비추는 무한한 세계들의 풍경이다.

일어서서 응시하라.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어라.

그대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머나먼 장소에서부터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온 세상에 메아리쳤다.

그리고 그들은 잠에 들었다.

한 소녀는 무너진 벽에서, 또다른 소녀는 무너진 탑에서, 그들은 고요한 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깨어날 시간이다.

드물게 드리우는 그림자가 백색의 소녀를 감쌌다.

역설적이게도 밝은 빛이 흑색의 소녀를 비추었다.

소녀들의 눈이 서서히 뜨였다.
...

빛과 대립의 이야기...

그대는 알고 있나?

이 기억은 감정이 뿌린 씨앗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소중한 기억과 미움받는 기억 위에 세워졌다는 것을.

시간과 같이 계속해 행진한다는 것을.

축복받은 존재와 저주받은 존재의 뒤틀린 운명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은 잊혀지리라.

3. 히카리

3.1. 해금 조건

스토리 # 진행 순서 해금 조건
1-1 Eternal-1 파일:arcaea_hikari_icon.png 파일:arcaea_lumia_base.jpg 히카리Lumia 클리어
1-2 Eternal-2 파일:arcaea_memoryfactory_base_256.jpg 히카리memoryfactory.lzh 클리어
1-3 Eternal-3 파일:Arcaea/PRAGMATISM.png 히카리PRAGMATISM 클리어
1-4 Luminous-1 파일:Maze_No.9.png 히카리Maze No. 9 클리어
1-5 Luminous-2 파일:Arcaea/Halcyon.png 히카리Halcyon 클리어
1-ZR Luminous-3 파일:zero_hikari_icon.png 파일:Arcaea/Ether Strike.jpg 히카리ZeroEther Strike 클리어
1-7 파일:arcaea_jacket_locked_fractureray.jpg Luminous SkyAnomaly곡 해금
1-8 Luminous-4 파일:arcaea_hikari_icon.png 히카리Luminous SkyAnomaly곡 클리어
1-9 Luminous-5 파일:fracture_hikari_icon.png 히카리FractureLuminous SkyAnomaly곡 클리어
V-1 Luminous-6 파일:Arcaea/Grievous Lady/Locked.jpg 히카리FractureVicious LabyrinthAnomaly곡 클리어

3.2. Eternal Core

====# 1-1 #====
파일:Arcaea/Story/1-1.jpg
소녀가 깨어나자마자 그 눈 앞에 보인 것은 유리로 된 나비의 무리였다.
‘너무 예쁘게 날아다닌다. 줄에 달려 떠있는 걸까?’라고 소녀는 생각했다.

무릎 꿇고 앉아 드레스의 매무새를 가다듬고 유리 나비들을 바라보았다.
알고 보니 이것들은 나비가 아니라 유리 조각이었으며, 놀랍게도 스스로 떠다니고 있었다.
“아름다워라!” 소녀는 느낀 대로 외쳤다.

유리 조각은 지금 소녀가 보고 있는 이 새하얀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바다, 도시, 화염, 불빛이 차례대로 보였다. 소녀는 손을 뻗어 조각들을 흐트러뜨리며 즐겁게 웃었다.

소녀는 이 유리 조각들에 “아르케아”라는 이름이 있다는 것을 아직 몰랐다.
사실, 이름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조각들은 그 자체로 너무나 아름다웠으니까.
조각들을 만지고, 휘두르고, 바라보며 즐겼다. 그거면 충분했다.

누가, 무엇을, 어디서, 언제, 왜, 어떻게.
그녀는 이 중 그 무엇도 묻지 않았다. 아르케아의 빛을 쐬고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스러웠다.
새로운 세계와 소녀는, 그렇게 만났다.

====# 1-2 #====
하지만 이윽고 의문은 찾아왔다.

소녀는 유리 조각의 소용돌이 가운데에 서서 자신에게 물었다.
“이 조각들의 정체는 대체 뭘까?”
어디론가 통하는 관문일까? 창문일까? 아니면 기억일까?

기억. 마지막으로 떠오른 그 단어가 뇌리를 스쳐 소녀는 그게 답이라고 느꼈다.
“기억이구나.”라고 조용히 속삭였고, 그렇게 의문은 끝났다.

어째선지 이 장소는 기억들로 가득했다. 어떤 사람의 기억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소녀는 더 이상 의문을 품지 않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유리 조각들은 소녀를 따라다녔다.
손에 잡히진 않았지만, 조각들은 그녀의 곁을 벗어나지 않았다.

소녀는 조각을 수집해보기로 했다.
한 조각, 또 한 조각씩.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 1-3 #====
소녀에겐 시계가 없었으므로, 자기가 며칠, 몇 시간을 걸었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단 하나, 알게 된 것이 있었다.

기억은 아름답다는 것, 그것만은 확실하였다. 기억이란 정확하지 않고 시간에 따라 변질되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기억은 과거를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생생한 방법이기도 하다. 달콤한 기억이든 씁쓸한 기억이든, 소녀는 기억에게서 큰 매력을 느꼈다.

소녀는 이 세계와는 다른 장소와 사람들을 비추는 기억들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을 즐기기로 했다.
이 낯설고 삭막한 세상에서 아르케아는 반짝거리며 빛날 뿐만 아니라, 즐거운 기억을 보여준다.
소녀가 아르케아를 좋아하게 되기란 시간문제였다.

콧노래를 부르며 손을 하늘 높이 뻗은 채, 소녀가 온 세계의 기억을 데리고 부서진 길을 걸어갔다.
추하고, 아름다운 세계의 기억들을 데리고서...

“즐거워라...”
소녀가 숨을 내뱉고 미소를 지었다. 평온하다. 어쩌면 지나치게 평온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근심 따위는 없었다.
이 단순하고 행복한 세계는 계속해서 단순하고 행복하게 있기만 하면 된다.
다만 그뿐이다.

3.3. Luminous Sky

====# 1-4 #====
행복한 풍경. 오랜 시간 동안 소녀는 이 세계를 여행하며 다양한 것들을 찾고 감상했다.

오랜 시간 동안 그녀가 이끌고 다니던 유리 조각의 무리는 끝도 없이 펼쳐진 하늘이 되어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저 휘황찬란한 하늘은 언제나 반짝거리며 그녀의 곁을 지켰다. 소녀의 주변엔 즐거움과 행복만이 가득해, 세계가 마치 천국과도 같았다.

소녀는 한때 저택으로 이어졌을 나선 계단을 깡충거리며 내려갔다. 저택의 벽은 모두 무너져 기억의 조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소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놀이터였다. 그녀가 뛰어올라 기억의 조각들을 흩뜨리자 아르케아는 공중으로 떠올라 하늘과 하나가 되었다.

소녀는 그것들이 발하는 빛을 온몸으로 쐬며 즐겼다. 황홀했다. 기운찬 웃음이 나왔다.
꽃, 입맞춤, 사랑, 탄생의 기억들. 강처럼 흐르는 유리의 조각들이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광경을 소녀의 눈에 비춘 후 다른 조각들과 하나가 되었다. 수없이 본 광경이지만 질리지 않았다.

소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유리 조각들이 하늘에 스며들어 가자, 그 빛깔은 더욱 생생해졌다. 만족하며 미소를 짓고 길을 나섰다. 언제나 그랬듯, 행동의 결과 따위는 마음에 두지 않은 채로.

====# 1-5 #====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다. 소녀는 그 말을 몰랐거나, 알아도 신경쓰지 않았다.

소녀는 한때 공연장이던 곳에 도착했다. 이 장소는 어떤 거대한 힘의 작용인지 완벽하게 두 쪽으로 나뉘어져있어 예전에 지녔을 장엄함은 온데간데 없었다.

이 예술의 무덤에도 기억의 조각이 떠다니고 있었다.
춤의 기억, 공연의 기억, 희망의 기억, 승리의 기억.

소녀의 입이 움찔거렸다. 지루해진걸까, 아니면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그녀가 손을 들자 아르케아가 모여들어 부드럽게 손바닥 위와 손가락 사이로 흘렀다. 무심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은퇴하는 악단의 마지막 외침을 들은 게 몇 번째지? 형제가 기쁨에 얼싸안는 모습을 본 건? 사랑을 너무나 많이 봐버린 소녀는, 잊혀진 옛 세계에선 사랑은 당연했던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기억을 놓아주면서도 소녀는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조각들이 공중으로 솟아올라 소녀가 만든 하늘에 합류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처음 조각을 모으기 시작할 때보다 훨씬 밝아졌다. 날이면 날마다, 점점 밝아지는 듯 했다...

여태까지 며칠이 지난거지? 소녀는 그 생각에 표정을 찡그렸다가 고개를 휘저었다.

조각을 더 모으면 된다. 그러면 이 공허함이 채워질 것이다.
소녀는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고 다시 여행을 떠났다.
뒤를 따라오는 아르케아를 떨쳐낼 수 없다는 사실에 짜증이 나는 자기 자신을 애써 무시한 채로.

====# 1-ZR #====
파일:Arcaea/Story/1-ZR.jpg
“천국” 또한 일종의 지옥인 것일까.

게으른 평화와 무질서한 쾌락의 대가는 열정의 죽음이다. 무한히 행복함만을 경험한다면, 이윽고 행복과 평범함 사이의 경계가 흐려져 무엇이 행복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되고, 행복해질 목적조차 잃게 된다. 이제 그 무엇도 목적이나 의미가 없었다. 소녀에게는 애초부터 없었던 것들이다.

하늘이 눈이 멀 정도로 밝았다.

소녀는 자기가 걷는지 멈춰있는지조차 몰랐다. 안다고 한들 아무 의미 없었다. 그녀의 모든 신경은 자신이 만든 하늘에 쏠려있었다. 그러나 저 하늘을 이루는 각자의 기억은 구분해낼 수 없었다. 흐릿하게 일렁이는 아지랑이 사이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소녀는 이성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정신이 마모되어가는 소녀는 주변이 점점 종말로 침식되어가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숨막힐 정도로 행복으로 가득찬 새장을 만들어 스스로를 가둔 것이다. 소녀에게는 이에 절망할 자아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하늘이 밝아질수록 소녀의 정신은 더욱 세차게 무너져내렸다. 앞으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소녀는 기도하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광휘와 행복, 그리고 아름다움이 펼쳐진 하늘. 그곳에서 찬란히 빛나는 기억이 내려와 그녀를 덮쳤다.

소녀의 정신이 새하얀 백지가 되었다.

아무 의미 없이, 빛이 씻겨져 사라졌다.

아무 의미 없이, 시간이 지났다.

텅 빈 하늘을 올려다보는 소녀. 영혼을 잃어버린 채, 그녀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다.

====# 1-7 #====
소녀는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치켜들고 있었다. 이윽고 소녀의 창조물은 그녀를 망각의 빛으로 집어삼킬 것이다.
머리 위에서 저것이 보고 있기에 고통스러운 부드러운 빛을 발하며 박동했다. 마음을 잃은 소녀는 창조물이 자신을 삼키도록 두었다.

그 순간, 드넓은 공허에 등장한 무언가가 소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주변과 확실히 구별되는 이질적인 형태가 시선을 순식간에 잡아챘다. 단 한 개의, 아주 특별한 유리 조각. 그 옅은 붉은색은 다른 조각들과 확연하게 구분되었다. 현실인지, 소녀의 정신이 보여주는 환상인지 확실치 않지만, 그 강렬한 빛에 주변의 색이 바래는 듯했다.

소녀가 생각했다. 세상의 색이 점점 진해졌다.

소녀가 생각했다. 그리고 아주 오래동안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소녀의 하늘이 일렁이며 뒤틀리더니 곧 표면에 금이 생겼다.
이 세상을 덮은 하늘이 단 하나의 새롭게 생겨난 기억을 중심으로 일그러지며 소용돌이쳤다.
존재해서는 안되는 기억, 저 기억이 창조물로부터 벗어나자, 하늘이 무너졌다.
격렬하면서도 고요하게, 하늘이 무너져내리며 반짝이는 빛으로 공간을 채웠다.
실로 장관이었으나, 소녀의 시선은 붉은 조각에만 꽂혀있었다.
조각은 행복한 기억의 비를 뚫고 소녀의 손으로 사뿐히 내려왔다.

이것 또한 행복한 기억이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소녀 자신의 기억이라는 것이다.

“내가 언제 이런...”

오랜 시간 말을 하지 않은 탓에 목소리가 갈라져있었다.

그녀의 손에 내려앉은 것은 영(0)으로부터 태어났던 기억의 조각. 그것에 비치는 것은 소녀가 일어났을 때의 기억, 유리 조각들 사이에서 춤을 추던 기억, 유리의 세계를 여행하던 기억, 행복 그 자체의 기억이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른다.

소녀는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행복을 다시 찾아냈다.

====# 1-8 #====
파일:Arcaea/Story/1-8.jpg
유리의 조각들이 비처럼 쏟아지며 한때 존재했던 세계의 모습을 비추었다. 그 중심에 서있는 소녀는 새로운 기억, 지금 존재하는 세계의 기억을 보고 있다.

눈물이 흘러 떨어졌다. 하지만 소녀는 눈물을 흘리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녀의 정신은 아직 회복 중이었고, 자신이 여태껏 해온 일이 허사가 되었다는 사실에 괴로워했으며, 열정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조각은 아무것도 모르고 행복했던 소녀가 자신이 파놓은 함정으로 걸어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자아를 잃으리라는 결말을 알면서도, 소녀는 또다시 행복해지기 위해 여행을 나설까?

조각 속에 비치고 있는 붉은 옷은 지금 소녀가 입고 있는 것과 같았다. 그녀는 조각을 꽉 쥐어 붉은 선혈로 조각을 적셨다.
과거와 현재의 경계가 흐려지고, 반짝이는 표면에는 온기가 흐른다. 소녀는 이전보다 더욱 격렬한 감정을 느꼈다.
그 감정은 너무나도 강한 후회였다.
조각 속 소녀는 자신감 있게, 그러나 아무 의미 없이 여정을 계속했다. 아르케아를 모아 아름다움을 즐기며 목적 따윈 생각하지 않았다. 스스로 만든 눈부신 감옥에 갇혀 괴로울 정도로 지루한 쾌락의 삶을 살았다. 그 행위에 아무런 의미는 없었다. 그 때문에 소녀는 자아를 잃을 뻔 했다.

왜 그랬는지, 소녀는 대답할 수 없었다. 행복해지기 위함은 아니었다. 소녀는 무릎을 꿇고 기억을 가슴에 꼭 안은채 목이 메이도록 울었다. 자신이 저지른 과실의 무게를 이제야 깨달았다.
너무나 많은 사랑과 생명으로 자신을 감싼 탓에 그것들을 혐오하게 되었다. 그 사실이 슬펐다.

소녀는 비탄에 잠겨 울었다. 울며 열심히 생각했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에 대해, 그리고 이 세계의 의미에 대해.

====# 1-9 #====
침묵이 세상을 메웠다.

이따금씩 옛 세계의 조각이 떨어져 이 침묵을 깼다. 다행히도 괴로움은 멎어들었다. 소녀는 더이상 울지 않았다.
그저 반짝이는 유리 조각들 사이에 앉아 세상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눈물이 말라 뺨에 자국을 만들었고, 손에 흐르던 피도 말라 있었다.
두려움, 걱정, 후회는 끝났다. 이제 앞으로 나아갈 때였다.
그녀는 무지한 탓에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다. “행복한 기억은 많을수록 좋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하늘을 좋은 기억으로 뒤덮었다. 이 조각들이 한 곳에 모였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소녀는 이제서야 창조물이 자신을 집어삼키려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녀가 계속해서 나아가려면, 목적이 필요했다.
예전에 잊어버린 질문의 답을 찾아야 했다. 이 세계엔 무슨 의미가 있으며, 자신은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왜 행복한 기억들은 자신 주위로 모이면서, 괴로운 기억들은 도망칠까? 나는 누구일까?

소녀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비틀거리는 다리로 일어섰다. 소녀가 움직이자 주변의 아르케아도 함께 움직였다.
소녀는 그 유리 조각들을 바라보았다. 손을 들어올리자 아르케아가 손을 따라왔다. 무언가 다르다. 아르케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무언가 변화가 찾아왔다는 것을 느꼈다.

이제 그녀가 원하지 않으면 아르케아는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이제 새장에 갇힐 일은 없을 것이다. 소녀는 피에 젖은 손으로 마른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자아를 되돌려준 기억의 조각들이 뒤를 따라오도록 했다.
과거의 모습은 기억으로 묻어버리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이 기묘한 세상과 마주하리라.
그리고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이 세상의 의미를 찾아내리라.

소녀는 그렇게 맹세했다. 그렇게 확신했다.

4. 타이리츠

4.1. 해금 조건

스토리 # 진행 순서 해금 조건
2-1 Eternal-1 파일:arcaea_대립쟝.png 파일:cryofviyella.jpg 타이리츠cry of viyella 클리어
2-2 Eternal-2 파일:Arcaea/Essence of Twilight.jpg 타이리츠Essence of Twilight 클리어
2-3 Eternal-3 파일:Sheriruth_art.png 타이리츠Sheriruth 클리어
2-4 Vicious-1 파일:Arcaea/Iconoclast.jpg 타이리츠Iconoclast 클리어
2-5 Vicious-2 파일:Arcaea/conflict.jpg 타이리츠conflict 클리어
2-D Vicious-3 파일:Arcaea_char_6_icon.png 파일:Arcaea/Axium Crisis.jpg 타이리츠Axium으로 Axium Crisis 클리어
2-7 파일:arcaea_대립쟝.png 파일:Arcaea/Grievous Lady/Locked.jpg Vicious LabyrinthAnomaly곡 해금
2-8 Vicious-4 타이리츠Vicious LabyrinthAnomaly곡 클리어
2-9 Vicious-5 파일:Arcaea_char_7_icon.png 타이리츠Grievous LadyVicious LabyrinthAnomaly곡 클리어
V-1 Vicious-6 파일:fracture_hikari_icon.png 히카리FractureVicious LabyrinthAnomaly곡 클리어

4.2. Eternal Core

====# 2-1 #====
파일:Arcaea/Story/2-1.jpg
소녀가 무너진 탑에서 깨어나자마자 눈앞에 보인 것은 떠다니는 유리 조각들어었다.
조각들은 그녀를 탑 밖으로, 새하얀 세계로 인도하였다.

하얀색, 또다시 하얀색, 그리고 유리 조각으로 가득한 세계가 펼쳐졌다. 조각들은 소녀에게 이끌리는 모양이었다.
호기심이 동한 그녀는 조각들을 세심히 관찰하였다.

조각은 시시각각 다른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마치 달리는 기차의 창문으로 보는 바깥 풍경과 같았다.
한순간은 비, 또 다른 순간은 햇살, 그리고 죽음⋯ 소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물러났다.

조각들은 소녀를 따라왔으나, 손을 뻗어 조각을 깨부수려 하면 도망치듯 물러났다.
소녀가 찡그린 표정 그대로 창백한 하늘을 바라보자, 이윽고 자신도 모르게 그 표정이 풀어졌다.
입을 벌렸으나. 놀란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유리다. 머리 위로 격렬히 움직이며 반짝이는 저것은 유리의 폭풍이다.
소녀는 하늘을 바라본 것을 후회했다. 폭풍이 그녀를 맞이하려는 듯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 2-2 #====
소녀가 지금 느끼는 감정을 묘사하기란 쉽지 않다.
유리 조각들은 깨지지도, 살을 베지도, 얼굴을 비추지도 않고 그저 강렬한 바람에 실린 듯 재빠르게 휘몰아치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세를 바로잡고 서서 소용돌이를 자세히 관찰했다.

이것들은... 기억...? 추악한 세계의 기억...

“이게 뭐야...?!“ 소녀가 손을 뻗었다. “이건⋯!”

고통, 배신, 질투의 기억.

손을 뻗자 한 조각이 멈춰서고, 다른 조각들도 따라서 공중에 뜬 채 그대로 멈추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부...”

어둡다. 어두운 기억뿐이다. 이 조각들이 비추는 장소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조그마한 불빛이 잠시 나타났다 사라질 뿐인, 빛이 없는 풍경이었다.
소녀는 입술을 깨물고 허탈한 듯 쓴웃음을 지었다.

“이게 무슨 장난이지? 비극으로만 가득 찬 세상이라니...”

그 말을 속삭인 후엔, 그 얼굴에선 쓴웃음마저 사라졌다.

====# 2-3 #====
소녀에겐 시계가 없었으므로, 기억을 찾아 헤매기 시작한 후 정확히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지 못했다.
매우 긴 시간이 지난 것만은 확실했다.

그녀가 찾는 것은 행복한 기억이었다. 그 존재만이라도 확인하고 싶었다.
결국 몇 개를 발견하기는 했으나, 자신을 사냥개처럼 쫓아오는 것은 비참한 기억들뿐이었다.
소녀는 그 기억들이 비추는 세계를 혐오하였다.

소녀는 마치 우주와 같은 풍경, 유리 조각의 소용돌이 그 중심에 서서 두 가지 가능성을 고려했다.
하나, 이 조각들이 보여주는 세계, 또는 세계들이 그 자체로 끔찍한 곳이다.
둘, 비참한 기억만이 자신을 따라오고 있으므로, 그 말인즉...
어느 쪽이 정답이든, 그녀는 기억의 조각들을 없애버리기로 했다.

소녀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변했다.
그녀는 어두운 기억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 보이고선, 즐거워하며 그 조각들을 모았다.

“이 쓰레기 같은 기억들을 지울 수 있다면, 이 기억들이 비추는 장소들마저도 없애버릴 수 있다면...”

혼돈, 그리고 조금의 빛으로 이루어진 이 세계들을 없앨 수 있다면,
그녀는 기뻐하며 그리 할 것이다.

4.3. Vicious Labyrinth

====# 2-4 #====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시점, 소녀는 자신감으로 차 있었다.

유리와 거울의 세계를 여행하며 수많은 기억의 조각들을 모았다.
목도리처럼 목 주변에 두른 유리 조각의 덩어리가 끝없이 길게 늘어져 살랑거렸다.
소녀는 폐허가 된 탑 위에 서서 미소를 지은 채 먼 곳을 내다보았다.
등 뒤로 늘어진 끔찍한 기억의 조각들이 늘어져 위협하듯 움찔댔다.

소녀는 쭉 신경 쓰였지만 직접 가보려고 하지는 않았던 장소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궁처럼 보이는 건물이 하늘과 이어진 듯한 기형적인 형태의 구조물이었다.
당연하지만, 저 미궁 또한 이 세계의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유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또 당연하지만, 그녀는 미궁으로부터 쏟아져나오는 추악함이 자신이 있는 곳까지 닿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직 자세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소녀는 자기를 따라오는 유리 조각들을 모두 없애버릴 심산이었다. 조각들을 모으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것이었다. 지금은 적어도 이 추악한 기억들을 모두 한곳에 모아두었다는 데에서 안도했다. 이것들을 없애버릴 때가 왔을 때 일이 훨씬 쉬워질 테니까. 미궁은 그녀가 보아온 어느 것보다 특출나게 추했다. 소녀는 반드시 이 미궁의 조각들도 손에 넣으리라 결심했다.

미궁 주변의 땅은 아름다운 기억들이 바다처럼 파도치며 반짝이는 곳이었다. 조금 전진하자, 그 바다가 갈라지고 조각 몇 개가 목도리로 섞여 들어왔다. 소녀가 아름다운 기억들의 조각을 치우며 길을 따라 걷는 동안 망설임이 마음속에서 피어났다. 그녀의 뒤를 따라오는 것은 절망, 주변을 감싸고 있는 것은 희망. 입술을 깨물었다. 결심이 흔들리고 있었다.

====# 2-5 #====
모든 게 다 좋았던 시절도 있었으리라.

소녀에겐 본인의 기억이 없었다. 이 유리의 세계에서 깨어난 후 다른 세계에 사는 다른 사람의 기억들을 본 것이 전부다.
결국, 소녀는 조각에 비추어지는 기억을 비롯해 이 세계의 어떤 것에도 가치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 생각이 흔들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추악함과 비극, 눈물과 고통, 그 사이의 작은 미소, 그리고 죽음의 기억들...
모든 게 무가치하다.

소녀가 처음 이 순수한 행복의 바다에 발을 들였을 땐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악으로 물든 생활을 너무 오래 지속한 나머지 단순한 선의 존재조차 잊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완전히 압도되어있었다. 저 울퉁불퉁한 미궁의 입구를 향해 전진하며 희망의 빛에 시선이 사로잡힐 때마다, 멈추어 서서 자신이 아는 모든 것에 의문을 던졌다.
알고 싶지 않았던 답이, 이 빛과 혼돈에 파묻혀 있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소녀의 생각이 답에 도달하기도 전에, 소녀는 기형적인 미궁의 입구에 도착했다. 그녀는 아름다운 기억 조각의 무리를 향해 충동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중 꽃으로 만연한 초원을 비추는 기억들이 소녀를 에워싸며 따라왔다. 어째서 그랬는지, 이 조각들이 자신을 구원해줄 것인지, 그 답은 소녀 자신조차도 몰랐다.

====# 2-D #====
파일:Arcaea/Story/2-D.jpg
소녀에겐 자신도 모르는 이름이 있었다.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면 이 칠흑 같은 미궁까지 올 일은 없었을 것이며, 지금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의혹은 어쩌면 더욱 커졌으리라. 하지만 그 이름을 몰랐기에, 소녀는 어금니를 깨물며 결심을 되새겼다. 자신을 둘러싼 빛도, 주변을 맴도는 꽃으로 가득한 초원의 풍경의 소용돌이도, 그녀를 망설이게 할 순 없었다.
소녀는 미궁으로 들어가 보이는 모든 것을 산산이 파괴하기 시작했다.

비극으로 울부짖는 벽, 공포로 가득 찬 천장, 그리고 두려움에 젖은 모서리.
소녀는 모든 것을 뜯어냈다. 이곳은 악으로 세워진 성채. 괴기한, 너무나도 괴기한 장소였다.

소녀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미궁의 벽을 오르고, 복도를 가로질렀다. 애초에 소녀가 지금의 결단을 내리게 한 것이 바로 이 미궁과 같은 역겨운 구조물이었다. 자신이 옳았다. 유리 조각과 거울은 사라져야만 한다.
한창 소녀가 미궁을 무너뜨리는 와중, 그 미소가 뒤틀렸다. 무언가 잘못된 느낌이 들었다. 이 미궁의 중심에, 그녀가 여태껏 보아왔던 그 어떤 기억보다 훨씬 끔찍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이 소녀를 부르고 있었다.
몸을 채우던 광기와 같은 열정이 바닥을 드러내어 행동이 느려지기 시작한 소녀의 앞에 한 기억의 조각이 나타났다.
세상의 끝을 비추는 조각이었다.

소녀는 조각 안의 세계를 응시하며, 아래에 널려있는 아름다운 세계의 기억과 아직 자신의 주위를 맴도는 꽃밭 풍경의 조각들을 떠올렸다. 천장이 뜯겨나간 미궁의 벽들이 주변에 쓰러져 있었다. 검은 유리 조각들이 비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저 멀리서 아름다운 기억들이 반짝였다.
소녀는 손가락 사이로 종말의 세계를 훔쳐보았다. 침을 삼키고 결의를 다지며, 소녀는 손을 얼굴에서 떼어내 뻗어 그 조각을 가져왔다. 미궁의 폐허를 바라보며 소녀는 강렬한 희열을 느꼈다. 앞으로 볼 기억들이 얼마나 끔찍하든 이에 비견할 수는 없으리라. 나는 강해졌다. 모두 부숴버릴 것이다. 그렇게 확신했다.
그리고 소녀는, 꾸밈없는 미소를 머금은 채, 지친 웃음을 뱉으며 하늘에서 탑과 함께 강림했다. 온몸에서 힘이 흘러넘치는 소녀는 마치 영웅과 같은 결의를 지니 채, 미궁의 폐허로 만들어진 탑을 뒤로 하고, 앞으로 행진하였다.

====# 2-7 #====
소녀의 심장에 갑작스러운 통증이 찾아왔다.

뒷걸음치며 입을 가렸다. 당혹감에 눈이 크게 뜨였다. 거대하고 추악한 미궁의 탑에서,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그리고 그녀가 완전히 쓰러지기도 전에, 탑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슬픈 나날의 기억들이 소녀의 주변으로 모여 망토처럼 그녀를 감쌌다. 가랑비처럼 느리게 내리던 유리 조각의 비는 거세져서 폭우가 되었다. 소녀와 함께 탑이 쓰러지고 있었다. 이렇게나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 있음에도 소녀가 느낀 것은 공포가 아니라 혼란뿐이었다.

행복한 세계의 기억이 바다처럼 넘실거리는 땅으로 소녀는 엎어졌다. 탑이 무너지며 그 바다에 커다란 파도를 가져왔다. 유리 조각들이 서로 부딪치며 아름답지만 동시에 추한 광경을 자아냈다. 그 폭풍 한 가운데에, 소녀는 몸을 일으켜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갑작스러운 고통. 혼란스러웠다. 모든 게 아팠다. 심장이 터질 듯했다.
여태껏 모아온 기억들로 이루어진 망토는 기괴한 구체가 되어 소녀를 둘러쌌다.
새하얀 세계가 사라지고 끔찍한 기억들만이 소녀의 시야를 채웠다. 소녀는 거친 숨을 내쉬며, 벌벌 떠는 몸을 가까스로 세워 유리 조각, 아르케아를 응시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이 부서져 내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자신의 이성이 무너져내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전에 보았던 종말의 세계가 서서히 그녀의 시야를 채우기 시작했다.

====# 2-8 #====
파일:Arcaea/Story/2-8.jpg
소녀는 이 새하얀 폐허의 세계에서 깨어난 뒤로부터 다양한 감정을 느꼈다. 보통은 분노였으나, 그녀에겐 그 분노를 기묘한 형태의 희망으로 바꾸는 힘이 있었다.
별다른 계획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저 이 걸음의 끝에 무언가 좋은 게 있겠거니, 하는 막연한 믿음 하나로 그녀는 여기까지 왔다.
그런 희망이 있었다. 이 혼돈이 결국 빛으로 이어질 것이라 믿었다. 자신이 겪는 이 모든 고통과 공포가 언젠가는 완전히 사라지리라 믿었다.

그렇기에, 감정에 휘둘리기 쉬웠던 소녀는 이 세계에 아무 의미가 없다는 사실과 마주했을 때, 고통에 몸부림쳤다.

가장 끔찍한 운명이란 희망이 눈앞에서 부서지는 광경을 보는 것이다.
소녀는 무릎을 꿇고 앉아 자신을 둘러싼 죽음의 조각들과 함께 세상의 끝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슬픔을 느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그 슬픔은 빠르게 절망으로 바뀌었다.
아르케아의 세계엔 의미가 없다. 이곳은 이미 사라진 세상의 모조품일 뿐이었다.
아르케아의 세계엔 본질이 없다. 그 본질을 비추는 거울만이 있을 뿐이었다.
가끔 볼 수 있었던 행복하고 아름다운 기억조차 결국은 과거의 것이었다. 낮이 지나고 밤이 오듯, 아름다웠던 세계는 지금 소녀의 주변을 천천히 회전하는 종말의 풍경이 되었다.
소녀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깨어난 뒤로부터, 여태까지 너무나 많은 것을 느꼈다.
즐거웠다. 즐거움이 소녀를 떠났다.

두려웠다. 두려움이 소녀를 떠났다.

분노도, 희망도,

슬픔과 절망조차도 소녀를 떠났다.

소녀의 눈이 검게 물들었다. 자신이 유리 조각과 공명하는 것을 느꼈다.
그녀를 둘러싼 기억의 조각들에 금이 가며 깨지기 시작한다.
그 껍데기를 깨고 일어나, 찬란한 빛을 쐬었다. 그럼에도, 소녀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 2-9 #====
그 저주받을 미궁의 기억들, 그녀가 가져온 기억들, 그리고 바닥에 널브러진 아름다운 기억들이 마치 기름으로 얼룩진 바닷물처럼 뒤섞였다. 많은 기억들이 회색 덩어리로 뭉쳤고, 어떤 조각들은 바닥에서 가시처럼 솟아올랐다.
소녀는 그저 가만히 서서 조각들을 바라보며 그것들을 세기 시작했다.
기억의 가시가 눈을 찌를 뻔했을 때도, 그녀는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조각을 셌다.

이윽고 소녀는 손가락을 들어, 몇몇 조각을 자신의 위치로 불렀다. 그녀가 생각으로 명령하자 조각들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나비의 모양을 취했다. 그 나비를 하늘로 보내 이 새하얀 세계를 관찰하도록 하였다. 그것이 다시 내려와 소녀에게 무엇을 보았는지 설명하자 소녀는 생각만으로 나비의 날개를 천천히 뜯어내, 공허로 떨어지도록 내버려 두었다.
소녀는 그 오염된 바다에서 걸어 나오며, 지나간 시대의 기억으로 이루어진 저 기둥들을 산산이 부수어버렸다.
시간이 지나 소녀는 변했다.

소녀는 더 이상 기억을 모으려 하지 않았다. 아무 목적 없이 그저 걸었다. 이따금 이 세계, 그리고 소녀 자신에 대한 정보를 발견하기도 했지만, 열정을 잃어버린 소녀에겐 의미가 없었다.

소녀는 언젠가 폐허에서 찾은 우산을 빙글빙글 돌리며, 무너져내린 건물 옆을 지나고 있었다. 추악한 나날의 기억을 비추는 유리 조각이 뭉쳐 만들어진 생물체가 하늘에서 조용히 내려와 소녀의 앞에 섰다. 그 까마귀 같은 생물은 닳아빠진 칼날처럼 울퉁불퉁하며 반짝거리는 유리의 몸을 지니고 있었다. 이 생물은 소녀에게 있어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탑이 무너졌던 그날부터 소녀는 아르케아를 다루는 데에 점점 익숙해져 이런 생물까지 창조할 수 있었다. 까마귀는 이 새하얀 세계에서 소녀가 아직 가보지 못한 장소들을 이야기했다. 소녀가 눈길을 주자 까마귀는 터져나가듯 갈기갈기 찢어졌다.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 걸어갔다.
소녀는 까마귀들이 가져오는 소식에 진절머리가 났다.
이 세계엔 소녀 외에 아무도 없다는 것. 까마귀들이 가져오는 소식이란 그게 전부였다.
소녀는 그것쯤 이미 알고 있었다. 아직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람을 만나지 못했으니까.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만나야만 했다. 그러나 이는 운명을 함께 나누기 위함이 아니었다.

가슴 속에 가득 찬 불만. 그것을 살아있는 것에 쏟고 싶다는 욕망을 위해서였다.
소녀는 사람을 해치고 싶었다.

==# V-1 #==
파일:Arcaea/Story/V-1.png
이 세계에서 폐허는 흔한 광경이었다. 그럼에도 빛을 두른 소녀는 발을 내딛는 데에 조심스러웠다.

소녀는 이 폐허들이 한때 어떤 건물이었는지, 어째서 여기에 있는건지 궁금해졌다.
자신이 떠도는 이 세계에 과거가 있었을까?
아니면 우연히 처음부터 이렇게 생긴 세계였을까?

소녀는 생각해야만 한다는 강박감이 들었다. 행복한 무지에 잠식되지 않도록.
이 세상을 더 자세히 알면, 의미를 찾는 자신의 여정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여긴 다른 세계의 장소를 비추고 있을 뿐 아닐까?

소녀는 아르케아에서 이 폐허와 비슷한 건물을 보았다.
그렇다면, 폐허뿐만 아니라 높이 솟은 탑과 건물도 어딘가에 있는게 아닐까?
아직 찾지 마주치지 못했을 뿐일지도 모른다.

이 폐허는 한때 커다랗고 장엄한 건물이었을 거야.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아름다운 장소였겠지. 소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이 모습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광경이었다.

소녀는 혼자였다. 혼자서 긴 의자와 부러진 촛대 사이를 헤쳐나갔다.

소녀는 혼자였다. 눈을 깜빡였다. 혼자가 아니었다. 사람이 있었다.

소녀의 왼편으로 무너진 벽 앞에 사람이 서있다.

과거의 소녀였다면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은 채 이 사람에게 화사한 미소를 지어보였을 것이다.
지금의 그녀는 당혹해하며 저 그림자를 둘러싼 여자아이를 관찰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 속에서 피어오르는 행복감은 억누를 수가 없었다.

기억이 아닌, 지금 이 세계에 존재하는 진짜 사람.
혼자서 걸어온 무한한 시간 끝에, 마침내 다른 사람을 만났다.
살아있는, 타인이다!

여자 아이는 소녀를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우산을 들고 가만히 서서 잠을 청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칠흑같은 그 모습이 밝게 빛나는 주변의 광경과 강한 대조를 이루었다.
너무 비현질적인 광경이라 소녀는 한순간 이게 꿈인줄로만 알았다.

소녀가 말을 걸려 입을 벌리려던 순간, 여자아이가 깨어나 눈을 떴다.

슬프고 사악하며 잊혀진 조각을 이끄는 자가 눈을 떠 다시 태어나 새하얀 색을 두른 소녀를 바라보았다.

빛의 소녀가 너무나 반가워했던, 어둠의 소녀가 일순간 숨을 멈추었다.
눈을 찡그리고선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벌렸다.
하지만 금방 그만두고선, 숨을 들이키고 눈을 크게 뜨며 우산 손잡이를 강하게 쥐었다.

그 마음 속에서 뒤틀린 행복감이 솟구쳤다. 이는 빛의 소녀의 그것과는 달리, 더욱 적극적인 감정이었다.
곧 그 감정은 혼돈의 소녀의 얼굴에 꾸밈없는 미소의 형태로 나타났다.

5. Adverse Prelude

5.1. 해금 조건

스토리 # 진행 순서 해금 조건
V-2 Adverse-1 파일:arcaea_대립쟝.png 파일:Arcaea/Particle Arts.jpg 타이리츠Particle Arts 클리어[스위치판]
V-3 Adverse-2 파일:arcaea_hikari_icon.png 파일:Arcaea/Vindication.jpg 히카리Vindication 클리어
V-4 Adverse-3 파일:Arcaea/Heavensdoor.jpg 히카리Heavensdoor 클리어
V-5 Adverse-4 파일:arcaea_대립쟝.png 파일:Arcaea/Ringed Genesis.png 타이리츠Ringed Genesis 클리어

====# V-2 #====
벽도 천장도 없이 뼈대가 앙상한 의자와 하얀 촛불만이 남은 교회에서, 검은 옷을 입은 소녀는 또다른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길고 길었던 그 갈증을 해소해줄, 살과 피로 이루어진 진짜 사람이 드디어 앞에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즐겁지 않았다. 얼굴에 드러난 그 미소는, 감출 수 없는 거짓이었다. 그 미소는 마치 하얀 옷을 입은 소녀에게 “만나서 반가워”라 말하는 듯 했으나, 그 어떤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이름이 뭐니?” 검은 옷의 소녀가 메마른 목소리로 물었다. 예전이었다면, 자기가 아주 오랜 시간동안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을 것이다.

“내... 이름? 나도 잘 모르겠어.” 빛나는 소녀가 말했다. “넌 아니? 그, 자기 이름…”

그녀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건...”

이 한마디를 끝으로 말을 흐리며 화려하게 장식된 교회의 벽을 바라볼 뿐이었다.

하얀 옷의 소녀는 혼란스런 표정을 지었다.
기묘한 해후였다. 검은 옷의 소녀가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무기력함이 하얀 옷의 소녀에게 옮겨가고 있었다.
갑작스레 불어온 차가운 바람 앞의 불처럼, 그녀의 희망이 점점 꺼져가고 있었다. 불편함, 불안함, 걱정이 그 마음을 채웠다. 둘 사이에 무언가 잘못된 공기가 흘렀다. 마치 세계 자체가 이 만남은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고, 빛의 소녀에게 말하는 듯 했다. 금이 간 땅 위로 흐트러진 유리 조각들이 마치 이 기묘한 분위기를 대변하는 듯 반짝거렸다.

평소라면 이 유리 조각들은 망설임 없이 두 소녀에게 다가갔을 것이다. “행복한 기억”은 하얀 옷의 소녀에게, “불행한 기억”은 검은 옷의 소녀에게. 하지만 지금은, 그 어떤 유리 조각도 움직이지 않았다. 수많은 조각들이 소녀들의 주변을 에워싼 채 한 쪽 면으로 텅 빈 교회의 풍경을 비추었다. 하얀 소녀가 조각을 불러보았으나, 그들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끔찍한 기억과 행복한 기억이 함께 늘어서 반짝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불안함이 그녀의 마음을 엄습했다. 아직 자신을 따라오는 조각은 자신이 손으로 잡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조각, 자신을 자유롭게 해준 그 조각 뿐이었다.
하얀 소녀는 그림자같은 소녀를 쳐다보았다.

“우리 서로 비슷한 상황이라면...”
그녀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같이 다니지 않을래? 그럼 서, 서로 도울 수도 있고... 어쩌면...”

그러다 말을 멈추었다. 상대가 텅 빈 캔버스같은 하늘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말을 듣는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검은 옷의 소녀는 모든 말을 듣고 있었다.

“어쩌면.” 검은 소녀가 말했다. 희미하게... 비극 속에서 다시 태어난 뒤로, 그녀의 영혼은 칙칙한 심연과도 같았다.
그러나, 하얀 소녀의 제안을 듣자 그 심연 안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아주 약하고 희미했지만, 다시 각성한 이후로 그녀의 마음을 계속해서 잠식하던 불만의 장막을 꿰뚫기에 충분했다.
소녀의 마음속에 있던 과거의 조각, 이 세계에 처음 깨어났을 때의 ‘타이리츠’가,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절망감에 대적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두번째 기회를 잡고 싶었다.

하지만 ‘어쩌면’같이 애매한 대답은, 하얀 소녀에게 있어서는 부족했다. 아직 긴장된 분위기는 풀리지 않았다.
최근 다시 정신을 차린 소녀, 히카리는 아르케아의 세계가 마냥 예쁘기만 한 장소가 아니며, 안전하지도 않은 장소임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두 소녀는, 상황이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갖고, 말을 나눌 것이다.

====# V-3 #====
두 사람의 대화는 이어졌다.

“서로를 부를 이름이 있었으면 좋을텐데.”

타이리츠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눈은 또다시 생명의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히카리는 이를 눈치채고 조금 불안해졌다.

“그러게, 기억으로 가득 찬 세계인데 정작 내 기억은 없다니... 자기 이름도 모르고, 싫지.”

그렇게 말하며 둘은 긴 의자에 같이 앉았다. 가까이 붙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앉은 의자는 대열의 가장 앞에 있는 것이었다. 앞으로 계단을 몇 개 올라가면 넓고 평평한 단상이었다. 하얀 소녀는 구부정한 자세를 하고선 걱정으로 물든 표정을 지은채 새롭게 만난 친구를 바라보았다. 검은 소녀는 앞에 펼쳐진 텅 빈 무대, 하늘, 그리고 먼 풍경을 아루는 장대하지만 무너진 건축물들을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들에 흥미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풍경을 구경하던 타이리츠는 갑작스레 말을 꺼냈다.
“이 유리 조각들. 이름이 뭔지 알고 있어?”

“응? 어... 왠지는 모르는데, ‘아르케아’라는 이름인건 알고 있어.”
“나도야.” 히카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타이리츠가 말했다. “너랑 나, 다른 점이 뭐지?”

히카리는 대답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외모 말고는...”

“그럼 알아보자. 유리 조각에서 어떤 기억이 보여?”

“거의 항상 행복한 기억만 보여.”

“나랑은 정반대네...” 타이리츠가 한숨을 쉬고선, 발치로 시선을 떨구고 괴로운듯 말했다.
“이 세상에 우리 둘밖에 없다고 치자. 그럼, 우리가 정반대인 것에 뭔가 의미가 있는 걸지도 몰라.”

“너한테는 아르케아가 행복한 기억을 안 보여줘?”
히카리가 타이리츠 쪽으로 몸을 조금 기울이며 물었다.
“유감이야...”
“뭐, 어떡하겠어.”
검은 소녀가 말했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다가, 타이리츠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네 말대로면... 행복한 기억만 쭉 봐온 너조차, 행복해진 것 같진 않은데. 맞아?”

히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깨어나고 나서 고생만 해왔다는 식으로 말하고 싶진 않지만… 하늘을 뒤덮을 만큼 조각을 잔뜩 모은 적이 있었어.
그렇게 내가 만든 하늘이 나를 거의 죽일 뻔 했지… 빛이 조금씩 내 마음을 갉아먹는 느낌이었어. 내가 한 행동의 결과였지만 말이야.”

두 소녀는 진솔하게 말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히카리가 순진함과 위험으로 가득 찬 빛의 여정을 이야기하고 난 후엔, 타이리츠는 차가운 억양으로 어둠의 푹풍에 맞선 투쟁을 이야기했다. 둘 사이에 차이점은 많았으나, 단 하나, 확실한 공통점이 있었다. 이 무감각한 섹{에서 감각을 찾고 있었다는 것. 그들을 둘러싼 세계는 아름다운 만큼이나 냉혹했다.
히카리는 구원을 찾았으나, 이 기묘하고 무감각한 세계에게 자아를 잃을 뻔 했었다. 타이리츠는 영원한 상처를 입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마치 파도처럼 폭력과 분노를 향한 충동이 쉴 새를 모르고 솟아올랐다. 히카리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이 충동을 가슴 속에 묻어두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이 살아있는 인간은, 마음 속에 가득찬 이 답답함을 쏟아내기에 최적의 상대였다. 이따금씩 검은 소녀가 불안하게 덜덜 떨릴 정도로 손에 든 우산을 꽉 쥔다는 것을, 하얀 소녀는 놓치지 않았다.

그들이 걸어온 길은 쉽지 않았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었어.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내가 원하는 건 그게 다였어. 그런데, 그 검은 알을 깨고 나오고 나서부턴, 그렇게 순진한 목표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되었어. 무고한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었어.
내 마음 속 공허를 채우는 건 끔찍한 충동들 뿐이야. 역겹도록 뒤틀려버린...”

타이리츠가 마음을 쏟아냈다.

“지금조차, 너를 해치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해.”

“괜찮아...”
히카리가 말했다.
“네가 격은 일을 생각하면 나라도 그랬을지도 몰라. 하지만, 네 마음은 그렇게까지 뒤틀리지 않았어.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해.”

타이리츠가 히카리의 눈을 바라보았다. 마치 어째서 그리 생각하느냐 묻는듯이.

“지금도 그 충동을 잘 참고 있짆아. 그런 일을 겪었는데도… 그러니까 넌 아직 착하고 강한 사람이야.”
히카리가 미소를 짓고 의자에서 일어선다.
“나보다 훨씬.”
밝은 하늘을 향해 시선을 보내고선, 그렇게 한마디를 건넸다.

“나는 구원을 받았을 뿐이지만,”
히카리가 말을 이어갔다, 다시 한번 타이리츠의 눈을 바라보고서.
“넌 스스로 자기 자신을 구원했잖아.”
검은 소녀의 마음 속에서 약하게 일렁이던 반짝임이 희미한 빛으로 바뀌어, 고통이 그녀의 몸을 타고 흘렀다. 아니야. 그렇게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야. 타이리츠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은 실패했고, 예전의 자신은 그 미궁이 무너졌을때 함께 죽었다. 그 이후로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겨우 느낄 수 있었던 감정이라곤 증오뿐이었다. 히카리와 만났을 때조차, 칼을 잡아 그 몸을 가르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아니다. 타이리츠는 자신을 구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면, 그녀는 단순히 해칠 사람을 찾고 있었던게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실, 그녀는 기적이 내려와 마지막으로 붙잡을 희망의 실 한가닥을 건네주길 바라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히카리는 너무 여리고 우유부단하여 직접 타이리츠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진 못했지만, 그녀의 존재, 그녀의 적대심 없는 그 모습이, 타이리츠가 찾던 마지막 희망일지도 모른다.
타이리츠의 마음을 찌르는 것은 그 깨달음이었다.

그녀의 자세가 흐트졌진다. 히카리가 이를 눈치채고 도와주려 다가오지만, 아직 자신의 마음이 정리되지 않아, 손을 건네려다가 그만두고 말았다. 히카리는 반쯤 손을 들고 타이리츠의 앞에 서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검은 소녀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히카리는 손을 완전히 떨구고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들의 움직임에 맞춰 주변의 유리 조각들이 흔들렸다. 그 중 하나가 뭔가 다른 빛을 내기 시작한다. 그것이 비추는 것은, 익숙했지만, 불가능한 광경이었다.

아무도 보지 못했을 기억.

매우 기묘하고 괴상한, ‘변칙적’인 기억이, 한순간 반짝였다 사라졌다.

====# V-4 #====
타이리츠는 가슴을 움켜쥔 채 힘겨운 숨을 몰아쉬었다. 하얀 소녀 덕에, 그녀에게 다시 생기가 돌아왔다.
히카리가 건넨 너무나도 소중한, 안심과 격려의 한마디. 아직 세상은 끝나지 않았다. 이 새하얀 지옥에서 벗어날 마지막 길이, 단 하나 존재했다.

타이리츠가 숨을 내뱉으며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뭔가 해보자. 이 빌어먹을 세계를 파헤쳐보자.”

“그렇게 욕할 정도로 나쁘지는 않은데...”
히카리 또한 아주 약한 미소를 지으며, 그만큼이나 약하게 항의한다. 아직 타이리츠에 대해 모든게 확실하진 않지만, 히카리는 단 하나 확신할 수 있는게 있었다. 검은 소녀는 외견과 다르게, 나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다.
그 사실만으로 손을 잡을 이유는 충분했다. ‘착한’ 사람... 히카리는 아직 자신이 그 호칭에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히카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타이리츠의 기분이 바뀐 듯 했다.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그 말은 질문의 형태를 했으나, 억양 탓으로 비난에 가깝게 들렸다. 히카리를 꿰뚫듯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텅 비어있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행복해지려고 했던 너를 먹어치우려고 했던 곳이잖아.”

타이리츠가 호흡을 진정시키며 자세를 똑바로 가다듬으며, 가슴을 움켜쥐고 있던 손으로 우산을 다시 들었다.
그리고 히카리와 눈을 맞추었다.

“너무하다고 생각 안해?”

강하게 의견을 피력하는 타이리츠의 기세에 잠시 짓눌린 히카리였지만, 더이상 그녀는 예전의 근심 없는 순수한 소녀가 아니었다. 조금의 자신감을 끌어모아, 히카리는 허리를 펴고 설명을 시작했다.

“이렇게 살아있잖아. 적어도 그정도는 허락해주니까, 이 세계가 그렇게까지 나쁘다곤 생각 안해.”

“뭐어...?”
타이리츠의 눈빛이 더 강렬해졌다.
“살려두고선 고통과 슬픔으로 우릴 고문하고 있을 뿐인데도? 그런 세상이 어떻게 나쁘지 않은 거지?”

“그, 그렇지만, 그래도...”

“그래도 뭐?” 타이리츠가 밀어붙였다.
“그래도 그건 결단이 너무 빨라! 넌 정확히 뭘 하고 싶은건데?”

“전부 부숴버릴거야. 세계도, 유리 조각도, 전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부숴버릴거야. 받은 만큼 돌려줘야 공평하지 않겠어?”
타이리츠가 덤덤하게 설명했다.
“너도 동감하지? 너한테도 이 세계는 넓은 감옥,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잖아.”

“부수겠다고...? 부, 부술수 있다 해도... 그건 종말이야. 우리가 아는 한 존재하고 있는 세계는 여기밖에 없어.
이 세계를 부수면, 우리도 함께 죽는 거 아니야? 여기서 살 바에야… 그냥 죽겠다는 거야? 말도 안돼!”

“그래, 죽겠어.” 덤덤하게 타이리츠가 대답했다.

그런 대답이 날아올거라 생각 못한 히카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타이리츠의 말은 너무나 무섭고, 너무나 슬펐다.

그 침묵을 뚫고, 타이리츠는 계속해서 히카리를 밀어붙였다.

“달리 생각 있어? 계획 있냐고.”
“아니... 없어. 너랑 같이...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해보고 싶었어.”
명백히 절망감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하얀 소녀가 대답했다.

그리고, 아까 막 희망과 감정을 되찾은 소녀, 타이리츠는 말을 멈추었다. 하얀 소녀에게 화를 내기란 쉬운 일이었다. 그게 합리적이지 못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마음 속에서 다시금 피어난 희망 덕에, 여태까지 자신이 얼마나 차가웠는지 깨달았다. 하지만 새로운 희망을 마주하고서 취하는 행동이 비난이라니. 자신이 이렇게 옹졸한 사람이었던가? 타이리츠의 이 결심은 과거에도 그녀에게 안식이나 만족감, 그리고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목표로 향하는 길을 우울함으로 가득찬 어두운 가시밭길일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타이리츠는 자신의 마음 속에서 타오르던 불길, 타오르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했던 불길을 사그라뜨렸다. 하얀 소녀와 손을 잡으려면... 그녀의 생각에 동의해야만 했다.

“미, 미안해.”
타이리츠가 사과했다. 아까의 강렬한 눈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잠시 숙였다.
“나도… 그래, 너와 함께, 뭔가 새로운… 계획을 생각해보고 싶어.”

타이리츠 앞에서 사그라들었던 히카리의 자신감이 조금 활기를 되찾았다.
“괜찮아. 내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오래 이 세계에 갇혀있었던 거지?”
타이리츠의 마음속에서 타오르던 그 불이면 충분했다.

섬광처럼 잠시 불타올랐을 뿐이던 불이, 주변에서 잠자고 있던 유리 조각 하나 일으켜세워 흔들었다.

그것이 조용히, 두 소녀가 있는 곳까지 날아왔다.

“희망을 잃지 마. 분명 더 나은 내일이 올거야.” 하얀 옷의 소녀가 말했다.

빛바랜 색으로 일렁이는 유리 조각이 날아와 소녀들의 사이에 멈추어섰다. 둘 다 유리 조각을 바라보았으나, 그것이 비추는 기억은 검은 옷의 소녀에게밖에 보이지 않았다.

====# V-5 #====
파일:Arcaea/Story/V-5.png
종말.

그림자로 몸을 감싼 소녀가 깨진 유리창을 통해 다른 시간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 미소가 찾아왔다.

바보같으니.
아니, 하얀 옷을 입은 아이 말고.
나.

이 유리 조각이 비추는 것은 기억이 아니었다.

기억일 수가 없었다.

이것은 미래다. 바보같은 몽상가, 자신이 예상했어야 했을 미래.

유리 조각에 비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자신이었다. 날카로운 유리 기둥에 몸이 꿰뚫려, 상처로부터 새어나오는 창백한 불꽃에 옷과 몸이 불타는 모습.

그녀의 등 뒤로 텅 비고 황량한 아르케아의 대지가 펼쳐져있다. 그리고 그녀의 앞엔, 하얀 옷을 입은 소녀가, 눈부시게 불타는 빛을 어깨에 두르고 손으로 기둥을 쥐고 있었다.
아주 익숙한 모습이었으나, 등을 돌린 탓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지금 자신의 앞에 서있는 이 소녀와 같은 인물이다.
방금 만난 사람.
이건 기억이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일의 예언이다.

타이리츠는 이를 깨닫고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그리고, 여태껏 무시해온 진실을 마주했다.

그녀의 결의 따윈 아무 상관 없었다.
이 세계에서 좋은 것 따위 찾을 수 없다.

마지막 희망조차 검게 물들어, 절망의 바다에 빠진 채, 잊혀졌다.

달리 어떻게 됐을거라 생각했나?
희망은 대체 왜 가졌나?
어리석음이었다. 짜증이 날 정도의 어리석음.

짜증나는 노력.
짜증나는 기억.
짜증나는 존재.

짜증났다, 싫었다. 질렸다. 이제 질렸다. 자신이 질렸다.
이 끝나지 않는 조롱과 같은 연극에 질렸다.

기적 따윈 없다.

스스로도 말하지 않았나. 이 세계는 지옥이라고.
잘 알고 있었다. 조각나버린 다른 세계의 기억에서도 보았다.
천사조차 타락해 악마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빛의 소녀는 그 천사와 같았다.
최후의 순간에, 타이리츠의 가슴을 좀먹던 조그마한 구멍이 점점 넓어졌다.
구멍은 순식간에 모든 것을 먹어치우고선, 차갑고 끝없는 공허만을 남겼다.

그 속에서 어둠이 기어나와 그녀의 생각조차 뒤덮으려 할 때, 히카리를 보았다.

유리 조각을 보는, 그 당황한 눈빛, 히카리는 이 조각이 뭔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너무나도 잘 알고 있겠지.
그래서 히카리는 타이리츠의 눈을 마주볼 수 없는 것이다.
분명히 타이리츠의 모습이 보임에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당황했나? 불안해졌나? 뻔뻔하다.
용서할 수 없다.

그 분노가 뒤틀려 증오로 바뀌어, 그녀의 시선에서 쏟아져나온다.

저주받을 배신자. 이 저주받을 세계.
타이리츠는 우산을 꼭 쥐었다.
조각 너머에 아직도 꼼짝도 않고 서있는 히카리를 보았다.

자신의 악의가 들통났다는 사실에, 두려워 움직일 수 없는 것인가?
웃기는 군.

타이리츠는 눈을 감고 이렇게 새로 피어오른 감정을 잘라내었다.

그렇게 감정을 비우고 나자,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거울의 풍경도, 타이리츠의 분노도, 결국 일방적이었다.
히카리는 유리 조각에 무엇이 비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그저 점점 창백해지는 타이리츠의 얼굴을 혼란스러워하며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하키리의 마음에 위기감이 피어올랐다. 이유는 몰랐지만,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대지로부터 그림자가 기어올라와 닿는 빛을 모두 없애고 있었다.

어둠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숨이 가빠졌다. 히카리는 한걸음 물러섰다.
믿을 수가 없었다. 믿고싶지 않았다.

눈부신 빛의 하늘에 잡아먹힐 뻔했던 그 위기를 겪고 나서도, 또다시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포가 그녀를 덮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때에도 히카리는 살아남았다.
이번에는, 살아남기 위해선 타협 따위 할 여유가 없었다.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히카리는 그걸 명심하고선,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녀는 유리 조각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가장 절망해있을 때에 자신에게 안식과 인도를 내려준 그 조각.

히카리가 그 조각을 들고 가슴에 가져다 대자, 타이리츠의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공포, 그리고 다시는 비극을 겪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몸이 잠식된 채, 타이리츠는 자신의 삶을 되찾기 위해서,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3.0 업데이트 전까지 To be continued...라는 말과 함께 "2-F!t<A\bPDbN_"라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자열이 적혀있었다. 이 코드를 Ascii85로 풀면 "5YWmU4s2oLI"가 나온다.

6. Black Fate

6.1. 해금 조건

스토리 # 진행 순서 해금 조건
VS-1 Black-1 파일:arcaea_char_unknown_icon.png 파일:Arcaea/Equilibrium.jpg Equilibrium 클리어
VS-2 Black-2 파일:arcaea_대립쟝.png 파일:Arcaea/Antagonism.jpg 타이리츠Antagonism 클리어
VS-3 Black-3 파일:arcaea_hikari_icon.png 파일:Arcaea/Equilibrium.jpg 히카리Equilibrium 클리어
VS-4 Black-4 파일:Arcaea/#1f1e33.jpg 히카리#1f1e33 클리어
VS-5 Black-5 파일:arcaea_대립쟝.png 파일:Arcaea/Dantalion.jpg 타이리츠Dantalion 클리어
VS-6 Black-6 파일:Arcaea/Lost Desire.jpg 타이리츠Lost Desire 클리어
VS-7 Black-7 파일:arcaea_char_unknown_icon.png 파일:Arcaea/Tempestissimo/Locked.webp Black FateAnomaly곡 해금
{{{#!folding ???
{{{#!wiki style="margin: -6px -1px -16px"
스토리 # 진행 순서 해금 조건
VS-8 Black-8 파일:arcaea_char_unknown_icon.png 파일:Arcaea/Arcahv.jpg Black FateTerminal곡 해금
}}}}}} ||

====# VS-1 #====
히카리.
타이리츠.
그들이 서로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을 알았더라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빛”과 “대립”... 이 기묘한 세계의 소녀들에게 주어진 숭고한 이름.
그들이 그 의미를 알았더라면, 다른 길을 걸었을까?

아니면, 어디서 어떤 선택을 하든, 두 소녀는 결국 반목과 불화로 치달을 운명인걸까?

아직 자신의 이름을 모르는 히카리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이름을 모르는 타이리츠는, 지식으로 저주받은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과 히카리는 어떤 선택을 하든 반목하게 될 운명임을.

무엇도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 무엇도.

백색의 소녀와 흑색의 소녀는 화합할 수 없는 운명이다.

결국 마지막엔...
“앗!”

히카리의 입에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녀는 즉시 손을 올려 유리를 불러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유리 칼날을 막아냈다. 유리와 유리가 부딪혔다. 히카리의 유리는 빛을 발하며 충격을 버텨냈다.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이 유리에 비쳤다.

진심 어린 대화가, 어느새 마음을 부딪히는 싸움이 되어있었다.

타이리츠의 힘에 밀린 히카리는 몸을 굽혀 뒤로 한 걸음 후퇴했다.
전신이 차가웠다. 숨쉬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히카리는 타이리츠의 눈동자를 깊숙이 바라보며 깨달았다. 지금 자신의 심장을 파고드는 공포의 원천은 갑작스러운 타이리츠의 공격도, 자신의 목덜미로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타이리츠의 칼날도 아니었음을.
손에 쥔 땀도, 뱉을 수 없는 숨도, 이 모든 것이 타이리츠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지금 히카리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방금 전까지 친구처럼 이야기하던 그 타이리츠가 아니다. 저것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먹잇감을 노리는 듯 날카로운 눈동자, 움직이지 않는 입, 세게 쥐다 못해 붉게 물드는 손.

저것은 검은 옷을 입은 짐승이었다. 악의로 물든 그림자였다.

====# VS-2 #====
평화적으로 해결하자.

타협점을 찾아보자.

약해지지 마. 흔들리지 마.

그렇게 속으로 되뇌며, 히카리는 앞으로 나섰다.

두 사람 모두 싸움과 갈등의 고통이라면 수없이 많은 기억에서 보고 느꼈다. 하지만 기억을 통해 보는 것과, 직접 경험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급조한 칼날들이 또다시 부딪혔다. 그 모습에 우아함은 없었다. 타이리츠의 공격은 직선적이고 사나웠다.
히카리의 움직임은 절박했으며, 치명적인 일격을 한 끗 차이로 겨우 피하고 있을 뿐이었다. 히카리는 방어에만 전념했다. 이 싸움을 끝낼 수만 있다면, 주저 없이 그리하고 싶었다.

무너진 교회의 특이한 구조 때문에 둘의 움직임은 자유롭지 못했다. 뚫린 천장 아래에 늘어진 조명과 좌석들, 그 사이로 소녀들은 움직이며 합을 주고받았다. 타이리츠가 히카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히카리는 자리를 지켰다.
그녀를 구원했던 유리 조각을 들어 올려, 곧 다가올 올려베기에 대비했다.
하지만 그 수를 읽었다는 듯, 타이리츠는 자신의 검은 양산을 찔러넣어 히카리의 방어를 뚫었다.

“으윽...! 하앗...!”

히카리가 고통에 숨을 내뱉었다. 마치 손에 불이 붙은 것만 같았다. 손가락이 구부러진 듯했다.
그녀의 기묘한 유리 조각이 땅으로 떨어져 굴렀다. 무기를 잃은 히카리는 고통을 삼키며 뒤로 도약하여 후퇴했다.

히카리는 넘어지지 않고 착지했다. 또 한번 도약했다. 드레스가 바람에 펄럭거렸다. 좌석에 착지하자 또다시 공격이 날아왔지만,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었다.

정녕 대화로 해결할 방법은 없는 걸까?
말로 해결할 수 있다 하더라도, 무엇을 말하면 좋을지 히카리는 몰랐다.
뭘 말해야 할지 알고 있더라도, 타이리츠는 히카리에게 말을 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만약 히카리가 해야 할 말을 알고, 그 말을 할 기회가 주어졌다 하더라도, 타이리츠에게서 거리를 만들어 목소리를 낼 준비를 할 시간조차—

또다시 칼날이 갑작스럽게 나타나—

히카리의 뺨을 재빠르게 스쳤다—

그렇게, 칼날이, 그녀의 얼굴을 베었다.

====# VS-3 #====
히카리는 또다시 숨을 쉬기가 힘들어짐을 느꼈다. 왼쪽 뺨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이제는 익숙한 붉은색이, 손을 물들이고 있었다. 또다시... 온몸에 오한이 들었다.

히카리는 뒷걸음치며 두 팔로 몸을 감쌌다. 떨림을 멈추고 싶었다. 입 안에 차오르는 침을 가까스로 삼켰다.

그리고 약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그만해...”

그리고 조금 더 큰 목소리로,

“제발... 그만해...”

또다시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화살처럼 그녀에게 날아들었다. 히카리는 그것을 간발의 차로 피했다.
조각을 본래 목표였던 히카리의 팔이 있던 공간을 빠르게 지나쳐갔다.

“제발 그만해!”

히카리가 마침내 소리쳤다.
“네 목적은 알고 있어.”

히카리가 멈추어 섰다. 그녀로부터 다섯 열 떨어진 좌석에 타이리츠가 착지했다.

“하지만 네 정체는 몰라. 넌 뭐지? 이 세계가 만들어낸 악마인가?” 타이리츠가 물었다.

“뭐!?”

“아니면 또 나를 사냥하러 온, 죽어버린 세계의 흔적인가?”

“아니… 아니야!” 히카리가 외쳤다.

“너도 네가 무엇인지 모르는 건가...” 타이리츠가 말했다.

히카리는 그제야 눈치챘다. 수없이 많은 아르케아 조각들이 마치 말벌 무리처럼 타이리츠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는 것을. 히카리는 그 조각들을 바라보며 경계했다.

“뭐든 간에, 날 찾아냈으니… 결코 좋은 존재는 아닐테지.”

타이리츠가 고통에 물든 목소리로 말했다.
히카리는 타이리츠가 말해준 과거를 떠올리고, 그녀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했다.

“나는... 달라...”

히카리가 작은 목소리로 자신을 변호했다. 유리 조각이 총알처럼 날아와 그녀의 귀 옆을 스쳤다.

히카리는 눈을 감았다. 차올라있던 눈물이 흘러나왔다.

살아남으려면...

여기서 포기할 순 없다.
눈을 내리뜬 히카리는 새로운 유리 조각을 불러 손에 쥐었다. 유리 조각을 만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놀랄 여유조차 없었다.

그 등 뒤로 수많은 유리 조각이 떠올랐다.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히카리는 또다시, 한때 친구가 되길 바랬던 소녀의 눈을 마주 보았다.

====# VS-4 #====
철제 문이 마치 유리처럼 산산조각났다. 흑색의 소녀가 백색의 소녀에게 달려들자 기억의 조각이 마구 회오리쳤다.

히카리는 타이리츠의 공격을 막아내고선 뒤로 밀려났다. 히카리는 결코 공격하지 않았다. 이 싸움에 진심으로 임하기로 결심했지만, 마음속 어딘가에는 아직 평화적으로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타이리츠만큼 유리를 능숙하게 다루지 못할지라도, 그 실력이 아무리 뒤떨어진다 하더라도, 히카리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유리 조각들이 급하게 덧댄 천조각처럼 얽혀 만들어진 방어막이 쉴새 없이 움직이며 타이리츠의 공격을 막아냈다.
히카리의 눈은 유리 조각보다 날카롭게 흑색의 소녀를 추적했다. 그 눈은 힘을 통해 이 싸움을 평화롭게 끝내겠다는 결심으로 빛났다.

하지만, 그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무너진 교회에서 벗어나 아르케아의 뒤틀린 길과 언덕길 사이로 와서야 타이리츠는 마침내 자신의 힘을 자유롭게 휘두를 수 있었다. 그녀는 히카리에게 절대 거리를 내어주지 않으며 유리 조각을 넓게 펼쳐 휘둘렀다. 히카리는 처절하게 공격을 막아냈다. 찰나의 실수는 곧 죽음을 의미했다.

히카리의 심장이 마구 뛰었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투명한 칼로 투명한 단검을 막아냈고, 빛나는 창이 목을 꿰뚫기 전에 재빨리 유리 조각을 부딪쳐 궤도를 비틀었다.

한 합, 두 합, 그렇게 합을 나눌 때마다 확실해졌다. 이것은 더 이상 정제되지 못한 폭력의 소용돌이가 아닌, 강력한 두 적수의 충돌이었다. 히카리의 힘은 타이리츠의 것에 비견될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히카리는 그 차이를 날카로운 기지와 무너지지 않는 의지로 메꾸었다.

타이리츠라는 이름의, 눈앞에 휘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맞서기 위해, 그녀는 침착함을 유지할 것이다. 닳을 지언정 부서지지 않는 바위처럼.

히카리가, 이 싸움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둘은 호각의 싸움을 이어나갔다.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빛줄기가 매끈한 아르케아의 표면에서 뿜어져나왔다.

그 균형이 깨진 것은 타이리츠가 전법을 바꾸었을 때였다. 그녀는 히카리의 방어를 그대로 꿰뚫는 대신, 예고 없이 히카리의 오른편에서 유리 조각 무리를 쏟아냈다.

강렬한 충격이 공기를 타고 흘렀다. 빛나는 유리 파편들이 폭발하듯 정신없이 흐트러졌다. 히카리는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타이리츠의 눈동자가 음산한 빛으로 반짝였다. 그녀는 양산을 들어 그 끝을 오로지 단 하나의 과녁, 히카리의 머리를 향해 겨누었다.

타이리츠는 망설임 없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나갔다.

히카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타이리츠의 미간이 희열에 일그러졌다.
그러나, 타이리츠의 공격은 히카리에게 닿기 전에 멈추었다. 두 소녀의 짓이 아니었다. 둘 사이에 나타난 무언가의 힘이었다.

히카리와 타이리츠 사이에 떠있는 것은, 아까 히카리의 손에서 떨어져 나갔던 기묘한 유리 조각이었다.
양산 끝에 가시를 마치 벽처럼 막아서고 있었다. 히카리는 어안이 벙벙한 듯, 눈을 크게 뜨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엣!?”

“이건...”

타이리츠가 반대쪽 손을 들어 유리 조각의 무리를 불러냈다.

히카리 또한 망설임 없이 기묘한 유리 조각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주변의, 누구의 통제 하에도 있지 않던 유리 조각들이 칼날처럼 날카로운 비가 되어 내리기 시작했다.

====# VS-5 #====
파일:Arcaea/Story/VS-5.png
마치 폭풍과 같았다.

히카리의 뜻대로 움직이는 유리 조각들이 무차별적으로 쏟아져 내렸다. 히카리는 이 폭풍을 다루는 데에 조금 애를 먹었다.

순식같에 뒤바뀐 전세에, 타이리츠는 동요하는 표정을 한 채 뒤로 물러섰다. 히카리의 모습은 유리의 푹풍에 가려져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 안에서, 히카리는 새로 얻은 이 힘을 제어하기 위해 무릎을 꿇고 앉아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타이리츠는 하늘을 한 번 바라보고 히카리의 폭풍을 다시 보았다. 그리고선 손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폭풍에 맞서려면, 홍수를 불러일으켜야 한다.

그렇게, 멀찍이 떨어진 도시와 새하얀 산맥으로부터, 수 천개의 유리 조각이 타이리츠의 부름에 응답해 날아왔다.
무질서한 히카리의 폭풍과는 다르게, 타이리츠의 유리 조각 무리는 정돈되어, 무기질적일 정도로 날카로운 오와 열을 이루고 있었다.

흑색의 소녀 등 뒤로 유리 조각들이 거대한 장미의 형항을 이루어, 그 꽃잎이 휘날리듯 하나씩 떨어져나와 백색의 소녀를 지키고 있는 돌풍을 깔끔하게 베어냈다.
히카리는 두려움을 삼키고서 일어나, 타이리츠의 공격과 똑같이, 정돈된 공격으로 맞받아쳤다.

꽃이 한 송이, 두 송이 피어나고, 일격을 또다른 일격을 불렀다. 싸움 속에서 두 장대한 힘이 미친듯이 뒤엉켰다.
멀리서 바라보면, 그 모습은 타이리츠가 바라던 그대로였다. 비에 맞서는 비, 번쩍이는 ‘번개’, 일렁이는 ‘구름’이 터져나오고 소용돌이치며 폭발적인 광경을 이루었다. 대자연의 힘으로 빚어낸 빛의 전쟁이었다.

그렇게 휘물아치는 은빛 홍수 아래에, 불꽃의 심장을 지닌 두 소녀가 서있었다.

수 밀리미터 차이로 공격이 비껴나갔다. 둘은 더이상 한자리에 서있지 않고 달리며 싸움을 이어나갔다. 아르케아의 드넓은 초원을 가로지르며, 유리 조각의 대포를 만들어 서로에게 포화를 퍼부었다. 지면을 미끄러지듯 달리는 두 소녀 사이로 “포탄”의 파편이 반짝이며 부서졌다. 두 소녀는 유리 조각으로 서로를 직접 공격하거나, 길을 막거나, 발목을 노려 움직임을 막으려 했다.
광란, 끝없이 계속되는 혼돈.
어느새 두 소녀의 움직임이 점점 비슷해지기 시작했다. 규칙성을 띄기 시작했다.

피하고, 쏘고, 피하고, 쏘고.

이 압도적인 폭력과 아름다움 안에서, 둘은 또다시 교착 상태에 이르렀다.

타이리츠가 다시 우위에 설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 VS-6 #====
이 세계에서 타이리츠가 걸어온 길은 지옥도였다.

첫걸음을 때었을 때부터 지옥이었다. 아니, 타이리츠는 그 첫걸음조차 부정당했다. 처음으로 눈을 뜨고 시작했던 여정은, 이윽고 쏟아지는 비탄과 비극에 파묻혀버리고 말았다. 그때 이래로, 비탄과 비극은 타이리츠를 그림자처럼 따라왔다.
이 모든게 마치 잔인한 농담같아.

나는 악인이 아니야.

이 검은 옷도, 날 괴롭히는 끔찍한 기억들도, 내가 아니야.

나는 “악한” 사람이 아니야. 악한 세계에 고통받는 평범한 사람이야.

이성도, 법칙도 없어.
마치 깨어날 수 없는 악몽과도 같아.
너무나도 잔인하고 차가운 세계.

나의 끝은, 한심하고 의미 없는 죽음이겠지.
...

이러한 생각 때문에, 타이리츠는 수없이 많은 눈물을 흘렸다.

이제는 끝이다.

타이리츠는 다시 결심하며, 히카리가 날려보낸 유리 조각들을 스치듯이 피했다.
그 순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몇 분 전에 느꼈던 익숙하지만 기괴한 기척. 현실 그 자체가 정합성을 잃어버리는 듯한, 불가능의 현현.

그 기이한 느낌이 뺨을 스쳤다.
타이리츠는 오른쪽을 바라보았다. 그 곳에 있는 것은 기괴하게 뒤틀린 보랏빛 유리 조각이었다.

한 순간, 찰나였다.
그 사이에 조각은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그 기이한 조각은 기억을 담고 있지 않았다. 대신, 예상을 뛰어넘은, 절대로 닿을 수 없는 해답을 내놓았다.

그 표면에서 발하는 빛이 타이리츠의 눈에 닿자 마자,

머릿속이 빛으로 가득 차는 듯한 느낌과 함께, 이 세계의 모든 지식, 과거에 존재했고 현재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지식이 타이리츠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선명한 깨달음을 이루었다.
이름.
과거.
세계.
목적.
“히카리”
“타이리츠”
“에토”와 “코우”... “사야”와 “레테”... “루나”와... 이름. 수없이 많은 이름.

다른 세계의 지식. 다른 여행자들과 그 목적지에 대한 지식. 끝, 시작, 그리고 이유와 목적. 그 모든 것들.

그리고, 진실, 단 하나의 진실. 그것은...
히카리가 잠시 멈춰섰다. 타이리츠에게 무언가 변화가 있었음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그 눈에 비치는 것은, 공포다.

그렇군. 그런 거였나.

타이리츠는 “현실”이라는 이름을 한 새장의 진실을 알아냈다. 그 지식으로부터 힘을 얻었다. 지식과 힘. 모든 것을 알아버렸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무엇이 바뀌는가?

감정이 마구 뒤틀린다. 타이리츠의 가슴 속에 꽈리를 틀었던 끝없는 독기가 전신에 퍼져, 혀로, 이로 옮겨간다.
그 입술이 쓰디쓴 미소로 뒤틀린다. 쓰디 쓰지만, 이상하게도 즐거워보이는 미소로.
웃어라, 소녀야. 폭풍우를 일으켜라.

인류 최악의 기억으로 타올라 빚어진 이 길. 그 끝에 있는 것은 종말일 것이니.

그 때가 찾아오면, 너희 둘중 하나는, 목숨을 잃으리라.

====# VS-7 #====
호각의 싸움이라는 환상이 깨지고, 히카리의 희망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무런 경고 없이 히카리의 폭풍이 타이리츠의 곁으로 옮겨가 그녀를 어둠과 빛으로 가렸다.
폭풍에 둘러싸인 타이리츠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녀가 다시 눈을 뜨자, 무수한 기억으로 이루어졌던 푹풍은 여섯 개의 거대한 날개가 되어 타이리츠의 등 뒤로 펼쳐졌다.

자연 법칙을 농락하듯 하늘로 부유한 타이리츠는, 그 날카로운 눈빛으로 히카리를 바라보았다.

이제 히카리에게 승산이 없다는 것은 명백했다.
히카리는 타이리츠를 짐승이라고 생각했었다. 지금에 와서야 그녀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초월적인,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

유리 조각이 그녀의 등 뒤로 마치 거대한 천처럼 솟아올랐다. 마치 천공의 빛처럼 투명하게 일렁였다.

지상의 히카리에겐 더이상 타이리츠와 싸울 방도가 없었다. 그렇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래... 타이리츠라고 해서 만물을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살아남을 수 있다. 분명히!
히카리는 스무 개의 유리 조각을 불러모아 하늘의 초월자에게 맞서 싸울 준비를 하였다.

타이리츠의 유리 조각 몇 개가 천천히 날아왔다. 히카리의 긴장이 조금 풀렸다.
‘할 수 있겠어.’ 히카리가 생각했다.
저 화려한 유리의 장막도, 그저 보여주기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히카리는 전과 같이 방어막을 펼친 후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해 재빠르게 떨어지는 유리 조각들로부터 몸을 보호했다.
눈동자가 반짝이은 유리 조각의 무리를 좇아 쉴새 없이 움직였다.
자신감이 마음 속으로부터 차올랐다. 아직까지 한 조각도 놓치지 않았다. 미소가 히카리의 입가에 걸렸다.

최악의 경우, 도주하여 후일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이곳에서 죽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히카리의 가슴으로, 유리 조각 하나가 날아들었다.
마치 히카리의 환상을 깨부수듯이. 그 어떤 아르케아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그 조각에서 타이리츠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장난은 끝이야. 이제 그만 죽어.”

조각이 히카리의 드레스를 파고들었다. 히카리는 타이리츠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흑색의 소녀는 웃고 있었다. 그 얼굴에 만연하던 비애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히카리가 여태껏 보아왔던 그 무엇보다 공포스러운 얼굴이었다.

조각은 히카리의 살에 닿는 일 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부서진 조각이 회오리가 되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회오리는 지나가며 히카리의 옷과 살을 베었다. 치명적인 상처는 없었다.
메세지였다. 흑색의 소녀는, 히카리를 죽이기 전에, 이 모든 것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보여주려 하고 있었다.

공포가 엄습했다. 유리의 급류가, 마치 거센 돌풍이 몰아치듯 예리하게 히카리의 주변을 휘돌았다.
두려움이 히카리의 몸을 움켜잡았다.
그 자리에 얼어붙어, 아무것도 못하고 그저 타이리츠가 하는 일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히카리는 그렇게 서서, 추악한 세계의 기억을 보았다.

고통, 배신, 질투,

죽음, 고난, 퇴락의 기억.

순수할 정도의 어둠. 이 조각들이 비추는 기억에는... 빛이 없다.
조그마한 불빛이 잠시 나타났다 사라질 뿐인, 빛이 없는 풍경.
타이리츠가 묘사한 바와 같았다.

눈을 뜬 순간부터 계속해서 타이리츠를 괴롭게 한 혐오스러운 기억들.
그녀는 이제 그 기억들을 이용해 다른 사람들도 같은 괴로움을 맛보게 할 것이다.

유리 조각들이 히카리의 소매를 갈고리처럼 붙잡고, 치맛자락에 박혔다.
히카리는 유리 조각들에게 끌려 하늘 위로 올라갔다. 더이상 두 발로 설 수 없는 곳으로.

가슴에 차오르는 감정이 눈물이 되어 흘렀다. 죽음을 앞에 두고 느끼는 그 감정이.
두려움이 아니다.
이 감정을 표현하기에 “두려움”은 무른 단어다.

절박함인가? 희망인가?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이 끔찍한 광경.

주마등이 눈 앞에 펼쳐졌다.
마치 과거의 기억에서 지금의 상황을 벗어날 만한 방법을 찾으려는 듯이.

하지만 그런 기억은 없었다.

검은 폭풍이 다가와 히카리의 몸을 무자비하게 베어냈다.
고통을 안겨주겠다는 의도를 명백하게 드러내는 폭풍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 의도만으로 살이 베어나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본인의 기억이든 타인의 기억이든, 히카리가 겪고 들은 그 모든 경험을 뛰어넘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미지를 마주했다는 공포와, 이 끝에 다다를 자신의 운명에 대한 이해.
그 두 감정과 인식이 역겹게 뒤섞인 결과물은...

끔찍한 공포.
“두려움” 따위가 아닌,
끔찍한 이해.

이 곳에서 자신의 명에 따르는 유리 조각은 없다.
기적이든, 이상현상Anomaly이든, 뭐든 일어난다면...
만약 그렇게 된다면 히카리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도망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기적이 일어난다면 지금이다. 지금이 아니면 미래는 없다.

지면이 울리더니 솟아올랐다. 마치 세계 그 자체가 둘 사이에 끼어드려는 듯이.
지금이다.
바로 지금! 자신을 구원할 유리 조각이 나타날 것이다!

히카리는 온 힘을 다해 세계가 자신을 도와주기를 간절하게 빌었다.

어떤 운명의 장난이, 어떤 인과율의 결과가,
히카리에게 승리할 힘을 쥐어줄 ‘신’을 만들어내리라!

빌어라. 기도해라.
너를 구원했던 그 조각을, 또다시 그 피 흐르는 가슴 가까이에 간직하라.
구원의 표상인 그 조각을. 그리하면 분명히...!



또다른 유리 조각이 소녀의 몸을 찔렀다. 마치 심장을 관통하는 말뚝과도 같았다.
조각은 심장에 닿지 않았다. 그러나, 메세지는, 그 최후의 메세지는, 히카리의 마음을, 의지를 꿰뚫었다.
흑색의 소녀로부터 온 마지막 메세지였다. 아주 단순하고, 무자비한 메세지.

“그런 일은 없어.”
파일:Arcaea/Story/VS-7.jpg
히카리의 가슴에 박혀 거의 목숨을 빼앗아갈 뻔한 그 조각은,
모든 것을 집어삼킬 정도로 거대한 화재의 기억을 비추고 있었다.

죽음에 이렇게나 가까운 순간에도, 히카리의 심장은 뛰었다.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알리는 듯이.

히카리의 동공이 수축했다.

화재의 기억처럼, 온 몸이 불타오르는 듯 뜨거워졌다.
녹아내리는 듯한 열기.
고통. 격렬한 고통. 그리고 피...

히카리가 가슴팍의 상처를 움켜잡으려 손을 펴자 그녀를 구원했던 조각이 밑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폭풍우로부터 조각이 하나 빠져나와 손등을 파고들었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숨마저 쉴 수 없다.

눈 앞에 펼쳐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그 눈은 고정되어 있었다.

존재해서는 안될, 하지만 명백하게 존재하는 끔찍한 현실이.

히카리는, 이윽고, 자아마저 잃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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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S-8[2]

>
자신에게서 사라져가는 것들을 깨달은 히카리의 안에서 오래전에 잊혀진 본능이 꿈틀거렸다.

현실적으로 유용하지만 버려졌던 그 본능. 아직 움찔대고 있을 뿐, 완전히 깨어난 것은 아니다.
여전히 공포가 히카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히카리는 여린 손으로 그 희망에 매달렸다.



어느샌가 히카리는 열 개의 조각을 불러내,
자신을 하늘에 붙잡고 있던 조각들을 깨부수었다.

일그러진 땅 위로, 히카리가 볼품없이 낙하했다.
10개의 조각이 괴로워하는 소녀의 웅크린 몸 주변을 맴돌았다.
기이하게도, 히카리는 웃고 있었다.

그녀는 왼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섰다.
타이리츠의 공격은 악의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고통을 주는 것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치명적인 일격은 단 한번도 가하지 못했다.

히카리의 가슴에 박힌 조각조차,
비록 심장에 가까이 다가가 불타는 듯한 격통을 그녀에게 안겨주었으나,
결국 목숨을 앗아가지는 못했다.

그게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히카리는 아직 살아있다.

히카리의 공격이 허약하게 날아가다 타이리츠의 반격에 치여 사라졌다.
타이리츠의 모습은 이제, 히카리가 옛 기억에서 들었던 그 어떤 악마보다 더욱 사악해보였다.

밤과 낮의 세계 위에 군림하는 어둠의 여왕.
황홀한 듯한, 하지만 텅 비어있는 저 미소..

그 모습을 보며, 히카리는 자신의 감정이 사라져가는 것을 느꼈다.

그 빈 자리를, 냉혹한 현실이 주입한 이성이 채웠다.
몇 분, 아니 몇 초 전까지 공포에 사로잡혀있던 히카리는,
냉정하게 현재 상황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하키라는 타이리츠의 끊임없는 공격을 받아넘기며, 천천히... 타이리츠를 향해 다가갔다.

몸을 좌우로 움직이며, 그녀는 조각 몇 개를 곁에 남겨 자신의 약점을 지켰다.
그리고 전장을 살폈다.
파일:Arcaea/Story/VS-???.jpg
지면이 완전히 갈라져, 그 어느때보다 황폐해보였다.
마치 포화를 받은 마을처럼 찢어져 망가져버린 광경.
두 소녀 주변의 유리 조각은 셀 수 없이 많았고, 타이리츠의 힘은 가늠할 수 없이 강했다.

반면, 히카리는 약했다.
유리를 다루는 힘은 물론이고, 몸이 너덜너덜하기까지 했다.
지쳐서 쓰러지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조각과 같은, 변칙적인 현상을 찾아내면 승산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찾아내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실제로 찾아내지 못했으니 이건 가정이 아니라 사실이다.

그러면?
완전히 막혀버린 길을 어떻게 나아갈까?
애초에, 나아가긴 해야 할까?

빛으로 반짝이는 유리 조각이 그녀의 어깨에 직격했다.
히카리는 그 유리 조각을 바라보았다.
이젠 타이리츠도 빛을 다룰 수 있는건가.

여태까지 일어난 일을 재고해보았다.
여기서 죽을 수도, 죽지 않을 수도 있다.
가능성은 그 둘이다. 이를 깨닫고, 히카리는 상황을 받아들였다.

이게 끝일지도 모른다는 걸.

눈 깜짝할 새에 모든 것이 끝나있을 수도 있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하지만, 마음 속에서 계속해서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이젠 아무래도 좋아.”

생각, 희망, 감정이 모두 소녀에게서 사라진 후에,
마지막에 사라지는 것은, 의지였다.



이건,

이건...

이건... 포기하는 게 아니다.
아니...

히카리는 손등에 박혀있던 조각을 빼냈다.
새하얀 불길이 일어 상처를 지졌다. 그 빛에 눈이 잠깐 멀었다.
하지만 그 조각을 목에 가져다 대지는 않았다.

살고 싶었다. 하지만 죽어도 상관 없었다.
살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너무나 적었기에, 죽어도 상관 없었다.

칼날의 폭풍 한 가운데에 히카리는 섰다. 조각 하나도 대동하지 않은 채.
이젠 타이리츠의 표정이 어떤지 알아보기조차 힘들었다.
그녀의 영역은 완전한 혼돈이었다. 물체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휘몰아치는 유리 조각 사이를 느릿느릿 걸어가다, 히카리는 무언가를 눈치챘다.
소용돌이의 일부분이 다른 조각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곤 하는 것이다.
그 움직임은 너무나 부자연스러웠다. 타이리츠가 일부러 저렇게 움직이는 걸까?

마치 중간을 건너뛰는 동영상을 보는 것 같았다.
저 조각들 덕에 이 유리의 폭풍우를 헤쳐나가는 일이 더 쉬워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상한 일임에는 틀림 없었다.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응...?”
히카리의 입술 사이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지진이라고? 아르케아에서?

또다시 지면이 찢어지려 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히카리는 얼굴과 가슴을 팔로 막았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현상이었던 건지, 히카리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타이리츠가 한 짓이 아니라면, 공중에 떠있으니 눈치채지 못했겠지.

칼날의 폭풍에서 유리 조각이 몇개 떨어져나와 거칠고 딱딱한 움직임으로 공중에서 춤추었다.
히카리는 타이리츠를 향해 유리 조각을 몇 개 더 던졌다.
그녀의 공격은 춤추는 유리 조각들을 쉽게 지나쳤지만, 곧 밝게 빛나더니 부서지고 말았다.

유리 조각은 멋대로 부서지지 않는다... 사라질 뿐.
그리고 아르케아가 사라진 자리에는 마치 공간 그 자체에 금이 간 듯한 흔적이 남는다.
히카리가 그걸 보자,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자, 모든 것이 멈추었다.

그 순간, 그녀의 주변을 멤돌던 흑요석 조각이 그 자리에 멈추었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아름다워...” 히카리가 키득대며 속삭였다.
자신의 무덤 자리가 될지도 모르는 곳에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 있다니.

그 사실이 기묘해서... 웃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웃었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슬프고 메마른 웃음을.

세상의 모든 것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늘 위의 소녀도...
하늘 위의...
하늘...?

하늘에 금이 갔다.[3]
하늘을 조각하듯, 금은 점점 넓어지더니, 거대한 조각이 땅으로 떨어졌다.[4]
더욱 기묘한 것은, 그 조각에는 수없이 많은 형상이 재빠르게 바뀌며 비춰지고 있던 것이다.

세계가 점점 더 기이한 폐허로 변해갔다.
히카리는 이 광경을 바라보며, 벅차오르는 만족감에 다시 미소를 지었다.
잠잠해진 폭풍 뒤로, 환상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하늘이, 만들어진 하늘이 아니라 진짜 하늘이 무너지다가, 멈췄다가, 다시 무너졌다.
마치 변덕쟁이 신이 하늘로 퍼즐 놀이를 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히카리의 얼굴에서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눈동자에 차가움이 깃들고, 호흡이 느려졌다.
종말적인 광경을 바라보며 느껴졌던 조금의 즐거움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객관적 사고가 채웠다. 모든 것을 파괴하는 대재앙의 앞에서, 소녀가 내뱉을 말은 단 한가지였다.

텅 비어버린 단어로, 그녀는 말했다. “아름다워라.”
마치 그 단어에 의미가 있다는 듯이.
이 종말에 의미가 있다는 듯이.

이 세계에, 의미가 있다는 듯이.
}}} ||

7. Final Verdict

7.1. 해금 조건

스토리 # 진행 순서 해금 조건
F-1 Final-1 파일:arcaea_char_unknown_icon.png 파일:Arcaea/Infinite Strife,.jpg Final Verdict첫 번째 Terminal곡 해금
F-2 Final-2 파일:Arcaea/魔王.jpg Final Verdict두 번째 Terminal곡 해금
F-3 Final-3 파일:Arcaea/Pentiment.jpg 파일:Arcaea/Arcana Eden.jpg Final Verdict3/4번째 Terminal곡 해금[5]
F-4 Final-4
F-5 Final-5 Final VerdictFatal Choice 곡 진입
F-6 Final-6 Final VerdictFatal Choice 곡 플레이
F-7 Final-7 F-6 스토리 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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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 진행 순서 해금 조건
마지막 꿈 Silent-1 파일:arcaea_char_unknown_icon.png 파일:Arcaea/Last.jpg Silent AnswerLast에서 운명을 거부하기
완벽한 소망 Silent-2 파일:fatalis_hikari_icon.png 파일:Arcaea/Last.jpg 히카리Fatalis를 봉인한 채로 Silent AnswerLast에서 Arcaea를 받아들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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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1 #====
단 한 순간, 세계가 소녀를 기억했다. 그걸로 충분했다.

새하얀 불꿏에 감싸인 붉게 물든 소녀, 히카리를 향해 이 세계가 겨의를 표하듯 머리를 조아렸다.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불꽃을 손에 넣은 히카리. 어째서 이렇게 된 건지는 본인도 몰랐다. 두 소녀 간의 결투는 멈췄다. 위에, 하늘에 변화가 생겼기에.

이미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죽음을 눈 앞에 두고서도 공포를 느끼지 않는 마음을 히카리가 다시 떠올렸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두려워하지 않을 뿐, 죽고 싶지는 않았다. 히카리는 죽음에 전력으로 저항했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 계곡, 찢어발겨진 하늘 아래. 소녀의 핏방울이 뚝, 뚝, 하고 떨어지나 땅에 닿지는 않았다.
이곳에서 보이는 것은 오로지 탑 하나. 텅 빈 교회의 종탑이 이곳에 균열이 있다고 알리기라도 하듯 우뚝 서 있었다.

이 투쟁의 결말이 다가온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이것이 운명이었던 걸까?
별빛이 하늘을 수놓았다. 장막은 찢어지고, 그 뒤를 채우던 어둠은 빛으로 반짝였다. 히카리는 이를 알고 있었을까?
안다 해도 의미가 있는 걸까? 그 모든 풍경이 느려지다가, 이윽고 멈추었다. 무너지던 하늘이 속도를 늦추다가 멈추었다.
히카리의 피가 뜨겁다. 눈은 멍하다.

타이리츠는 알고 있다. 저 멍한 눈은 “종말”을 예언하고 있다. 타이리츠는, 알고 있다.
바싹바싹 타는 혀와 목. 타이리츠는 얼마 남지 않은 침을 삼키고서 히카리의 눈을 바라보았다.
저 눈이 말하는 미래를 거부하리라 맹세하는 데에는 말이 필요 없었다.
히카리의 마음을 위협하는 것은 ‘공허함’. 하지만 눈에 비치는 종류의 공허함이 아니었다. 그 마음 속에서 또 하나 피어오르는 것은 ‘의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결코 굴복하지 않을 삶에의 의지가 히카리의 영혼에서 꿈틀댔다.
살아남으리라 맹세하는 데에는 말이 필요 없었다.

타이리츠가 용과 같이 매섭게 전진했다.

세계가 그녀를 붙잡았다. 마치 사나운 맹수처럼 타이리츠는 매섭게 저항했다. 공기 그 자체와 같은 어떤 기묘한 힘이 그녀의 피부를 찢어발기는 듯 했다. 그럼에도 타이리츠는 앞으로 나아갔다. 저기 서있는 진짜 “짐승”을 향해.
저 “짐승”이 고개를 돌렸다.
세계가 옆으로 뒤집어지는 듯 했다. 순식간에 타이리츠는 땅으로 고꾸라졌다. 유리 조각이 시끄럽게 쨍그랑대며 땅에 떨어져 깨지고 부서지고 흩날렸다. 한쪽 팔에 감각이 없었다. 정신을 집중해 다시 감각을 되찾았다. 타이리츠는 무릎으로 땅을 기었다. 발 밑의 조각에서 새하얀 불의 기둥이 반짝, 하고 솟아오르는 순간, 검은 소녀는 뒤로 날아갔다.

대지가 불꽃에 휩싸였다.

다시 세상이 뒤집혔다.

뒤틀리며 꿈틀대는 속을 애써 억누르고, 타이리츠는 자세를 고쳐잡아 섰다.
그리고 아무런 전조도 없이, 눈 앞에 서 있었다. 어깨 너머로 창백하게 타오르는 색과 같은 불꽃을 목도리처럼 두른 백색의 소녀가.

다시 한 번 타이리츠는 후퇴했다.

유리 조각이 날아올라 거대한 새장을 이루며 타이리츠를 가두었다. 타이리츠의 몸이 잠시 떨리다가, 완전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타이리츠는 히카리의 눈을 바라보았다. 히카리는 타이리츠를 보지 않았다. 자신이 만들어낸 새장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언가를 속삭였으나...

검은 옷을 입은 소녀가 듣고 싶은 말은 없었다.
타이리츠의 손이 거친 유리 감옥을 부수고 히카리의 목으로 날아들었다. 히카리는 고개를 들어 손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일곱 빛깔의 색채가 일렁이더니, 시간이 멈추었다.

====# F-2 #====
파일:Arcaea/Story/F-2.webp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전에도 이처럼 완강히 저항한 적이, 몸부림친 적이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이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듯한 고통.

멈춘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을 그만두고픈 욕구가 솟아올랐다. 그 욕구는 이윽고 짜증으로 변했다.
왜냐하면, 그만두고자 하는 이 마음은 결코 상냥함에서 온 게 아니기 때문이다. 무심함. 히카리가 항상 지녀왔던, 마음 아주 깊은 곳에 자리잡은 공포스러울 정도의 무심함. 이 심오할 정도의 무심함... 전에도 느낀 적이 있다.

히카리의 영혼 속에서는 두 의지가 부딪히고 있었다.

할 수 없어, 히카리가 생각했다.

해야만 해, 히카리가 생각했다.

이 생각들이 “해야 한다”, “하면 안된다”는 생각에 부딪히고 있었다.

하지만 히카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또다른 불꽃이 타올랐다. 그녀의 진짜 염원은, 꺼지기에는 너무나도 강렬히 타올랐다.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로 자신을 향해 손을 뻗는 타이리츠의 앞에, 히카리가 서있었다.

주변은 무지개의 색채로 얼룩지고 있었다. 타이리츠도 히카리도, 그 누구도 움직일 수 없었다.

히카리의 안에서, 희망이 제안했다.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한 후에, 이 애를 저 멀리 옮겨버리는 건 어떨까?”
히카리의 살고자 하는 의지가 그 제안을 고려했다.

그것도 괜찮겠네. 히카리가 결론을 내렸다. 희망도 어딘가에는 쓸모가 있었다.
세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타이리츠는 순식간에 교회의 대문 앞으로 옮겨졌다. 타이리츠가 절박하게 뻗은 손은 히카리의 목이 아닌 대문의 쇠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유리 조각이 날아와 손잡이를 대문에서 뜯어내버렸다.
그 순간, 타이리츠는 “짐승”의 계획을 이해했다. 검은 소녀는 주변에 남은 유리 조각을 모두 긁어모아 공중으로 내던졌다.
조각들이 반짝이며 다양한 풍경을 비추었다. 이윽고 타이리츠는 히카리를 찾아냈다. 그리고, 대지를 움직였다.

대지 밑에서 만물이 뒤틀렸다. 반역의 의지로 불타오르는 히카리가 조용히 세계의 현실 구조 위에 발을 딛었다.
그리고 하얀 소녀는, 여전히 타이리츠가 이 모든 것을 빼앗아갈 심산임을, 그리고 그렇게 할 수단을 갖고 있음을 깨달았다.
갑작스럽고도 두려운 깨달음.

그래, 희망이 뭐 어쨌다고?
히카리는 웃었다.

희망 따윈 없다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다.

두 소녀 사이의 공간이 뒤틀린다. 둘 중 누가 한 짓인지는 자신들조차 몰랐다. 무너져내린 대문 앞에서, 교회의 그림자에 덮인 채, 히카리와 타이리츠는 서로를 마주보았다.

미소를 입에 건 채, 히카리는 전에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아주 쉽게, 그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는 말은,

“말했잖아... 이런 짓 하지 않아도 된다고.”

검은 소녀는 단 한마디도 듣고 싶지 않았다.

====# F-3 #====
“그럼 ‘해야 하는 일’은 뭔데? 지금 말장난 해?” 타이리츠가 말했다.

“너도 네가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르지? 나 말고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이 있긴 할까?

해야 하는 일 따윈 없어.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이 세계엔 아무 의미도 없어. 너는... 넌 그게 어떤 느낌인지 알고 있어?
아무것도 모르지?

난 충분히 참았어. 내가 여기 있고 싶어서 있는 줄 알아? 이 망할 이야기 속의 내가 영웅인지, 악당인지조차 모르겠단 말이야.

하지만...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지. 그래, 부질 없는 고민이야. 다만... 네가 죽어야만 한다는 건 알겠어.”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짓은 안해도 돼.

그걸 네가 좀 더 일찍 깨달았으면...”

...날카로운 말이, 타이리츠의 입에서 부드럽게 쏟아져나와 무거운 돌처럼 히카리를 짓눌렀다.
히카리에게 있어 타이리츠의 말은 광기와 같았다. 드디어 히카리는 타이리츠를 이해한 기분이 들었다. 저 소녀의 머릿 속은, 광기로 가득 차 있다.

타이리츠는 자신이 미쳐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미쳤다고 해서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었기 떄문이다.

마지막으로 타이리츠가 입을 열었다.

“살고 싶다면 날 죽여.”

“하지만 명심해...”
“나는, 죽고 싶다는 걸.”

타이리츠는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 진실된 마음과 독기가, 마음 속에서 투지가 되어 손 끝으로 퍼져나갔다.

어떻게든 이 싸움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무슨 결말로 치닫더라도.
그렇게 마음 먹은 타이리츠는 주인 없는 유리 조각을 불러모았다.

주인 없는, 부서진 하늘의 조각을. 지평선에 어둠이 드리웠다.

====# F-4 #====
히카리가 모든 것을 조종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가지고 있던 권능을 순식간에 잃어버리기에 이르렀다.

마치 줄다기리... 아니, 몸부림...

아니, 일방적인 폭력이었다.
하늘의 조각이 땅으로 떨어지며 교회의 일부분을 무너뜨렸다. 거대한 먼지 바람이 일어나 모든 것을 뒤덮었다.
조각이 떨어진 위치는 히카리에게서 아주 가까웠다. 우연일 리가 없다. 우연이라기에는 너무나도 가까웠다.
더 많은 하늘의 조각이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히카리는 타이리츠가 하늘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터무니없다.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가 없었다.
땅과 공기, 유리와 바람. 모든 것이 떠올랐다가, 다시 내려앉았다가, 뒤집어졌다가, 날아갔다. 히카리는 그 재앙의 일부를 사라지게 할 수는 있었다. 손가락으로 가리킨 부분이 일시적으로 창백한 불꽃으로 타올랐다가 사라졌다. 하늘의 일부를 떼어내 부릴 수도 있었다. 타이리츠가 자신에게 세계의 조각을 던지면, 그걸 잡아서 다시 되돌려줄 수 있었다.

천재지변. 마치 거인이 내려와 땅을 짓밟는 듯한, 종말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휘몰아치는 백색 한 가운데에 히카리가 닿을 수 없는 흑색이 있다. 타이리츠가 멀리서 불러온, 절대로 양보하지 않을 조각들이. 그것들이 모든 것을 차지할 기세로 소용돌이쳤다.

땅과 대문, 그리고 건물들조차 흔들리는 한 가운데에, 히카리는 맞서싸웠다. 진동에 턱이 흔들려 이가 맞부딪치며 딱딱 소리를 냈다. 히카리는 발을 단단히 땅에 고정했지만, 여전히 진동이 손끝까지, 머리 끝까지, 뼛속 깊숙한 곳까지 전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소녀들 위로 서있던 거대한 교회도 하늘에서 떨어진 조각에 얹어맞으며 신음했다.
하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히카리 또한, 무너지지 않으리라.
...기회가 있을 때 모든 걸 끝냈어야 했다.

히카리의 심장이 뛰었다. 눈을 가늘게 떴다. 아주 조금.

다음에 부서지는 것은, 이 세계의 핵일까? 저 검은 소녀가 원하는 바는 그게 아니던가?

히카리는 무너져가는 대지를 가까스로 붙들어매며 생각했다. 검은 옷을 입은 소녀를 막을 방법을...
그 순간, 어둠 속에서 아르케아로 이루어진 날카로운 사슬이 날아와 히카리의 가슴을 옭아맸다. 히카리는 재빨리 창백한 화염으로 사슬을 불태웠으나, 순식간에 다른 사슬이 날아와 또다시 가슴을 속박했다.

그 다음은 팔이었다. 히카리는 간신히 고개를 돌렸다. 이미 다리, 발, 허벅지가 모조리 속박당한 후였다.

그 다음은 배였다. 히카리의 몸이 다시 불타올랐다. 그리고 다시 묶였다.

이... 그림자들. 이 고통의 기억들이 히카리를 구속하고 있었다.

마치 잔인한 농담처럼.
타이리츠가 다가왔다. 히카리는 다리를 묶은 사슬들을 불태우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히카리의 등 뒤로 끔찍한 형태의 유리 가시가 다리를 향해 솟아올랐다.

히카리는 가시를 바라보고서, 불태우려고 했다.

하지만 가시는 불타오르길 거부했다.
히카리는 다시 묶이고, 잡아당겨져, 무릎이 꿇렸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또 있을지 모른다.

아니면, 있었을 지도 모른다.

...어느새 다가온 건지,

고개를 들자 히카리의 눈에 보인 것은, 미동 없이 서있는 타이리츠의 모습이었다.

====# F-5 #====
파일:Arcaea/Story/F-5.webp
침묵...

그것을 마주하는 것은, 또다른 침묵.

말은 하지 않아도, 서로의 시선은 단단히 마주치고 있었다. 미동 없이, 두 소녀는 끝난 싸움의 소리가 메아리치는 공간에서 서로의 눈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서진 대지의 신음이, 흩어진 바람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와도, 무너져내린 건물들에서 먼지와 파편이 불어와도, 두 소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오로지, 서로의 눈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히카리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타이리츠의 눈동자 너머에 아직 투지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는 것을.
이것은 싸움을 그만하자는 제안이 아니라, 조용한 협박이라는 것을.
히카리는 침을 삼켰다. 타이리츠는 히카리의 목을 바라보았다.
너무나도 증오스러운 그 목. 너무나도 증오스러운 그 목소리.

히카리는 그 불타는 의지와 욕망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히카리는 시간을 멈추려고 했다. 멈추지 않았다.

히카리는 자신을 묶은 사슬을 불태우려고 했다. 불타오르지 않았다.

대지도, 하늘도,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다.

수가 떨어진 히카리는, 어느새 숨을 참고 있었다.
“...”

하늘은 무너지길 멈추었으나, 교회는 아직도 쓰러져가고 있었다.

두 소녀의 주변으로 먼지 바람이 일었다,

타이리츠의 눈은 여전히 악의로 가득 찬 의지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 눈이 천천히 예리해졌다. 그 순간만큼은, 무너진 세상조차 평온했다.
타이리츠가 옛 기억을 떠올리고 코웃음을 쳤다. 히카리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다시 이렇게 됐군.” 고개를 조금 기울이며 타이리츠가 말했다. “또 빌 거야? 또 기적이 일어나길 빌어볼 거냐고.”

히카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기적이란 건 말이지. 너무나 완벽한 순간에, 너무나 편리하게 모든 걸 해결해버려. 그래서 일어나지 않는 거고, 그래서 기적인 거야. 이 조각들... 무너져버린 세계의 기억은 아르케아를 통해서 수없이 봐왔겠지?
그럼 너도 알 거 아니야. 기적이란 건 ‘희망’과 같은 거라고.

그리고, 넌 어차피 기적 따위 있든 없든… 살아가고, 죽을 거잖아.”

히카리가 숨을 내쉬었다. 타이리츠가 부드럽게 허리를 펴 자세를 고쳤다.

검은 옷을 입은 소녀가 말을 이어갔다.

“사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알아? 잊어버리는 거. 모든 걸 다.”

히카리는 다시 한 번 몸을 움직이려 시도했지만 자신의 몸이 얼마나 단단히 묶여있는지 다시금 깨달을 뿐이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발가락이 움츠러들었다.

“널 죽여버릴 거야.” 타이리츠가 말했다. “그러면 이 세계... [ruby(「네 세계」, ruby=아르케아)]도 함께 죽겠지.”
다시 한 번 타이리츠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검은 옷을 입은 소녀는 숨을 한 번 들이쉬고는 억지로 웃음을 내뱉았다.

그리고 타이리츠는 한 손으로 히카리의 뺨을 잡아 고개를 들어올렸다.

“네가 옳았어.” 히카리에게 다른 쪽 손을 가져가며 타이리츠가 말했다.
“이런 짓을 할 필요는 없지... 적어도 널 위해서는.”

몸을 앞으로 숙이는 타이리츠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타이리츠의 눈은… 왠지 모르게 익숙했다.

후회, 그리고 연민.

등 뒤로 뻗은 칠흑같은 날개는 접혀 있었다.

머리 위에서는 밤의 하늘이 계속해서 반짝였다.
격렬한 싸움은 이미 끝난 후임에도, 히카리의 심장은 계속해서 요동쳤다.

히카리는 마침내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타이리츠를 제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타이리츠가 왼손을 들어 천천히 뒤로 뺐다.

...그 손바닥 위에 검고 뾰족한 것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게 마지막이라는 듯, 타이리츠가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알려줄게. 이 세계에서 내 이름은 타이리츠였고, 네 이름은 히카리였어.”
“제발...”

히카리가 애원을 쥐어짜냈다.

“제발 멈춰...” 거의 쇳소리였다.

타이리츠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또 비는 거냐?” 타이리츠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덧붙였다. “그런다고 바뀌는 건 없을 거야.”

눈부신 빛과 함께 히카리를 구속하던 사슬이 타올라 사라졌다. 히카리는 일어서서 무기를 바라며 손을 뻗었지만...
손목, 허리, 다리가 구속되어 다시 땅을 기었다.

그럼에도 히카리는 바라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손에 검 한 자루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새로운’ 물건. ‘창조된’ 검이다. 유리로 이루어져 있지만, 기억이 아닌 물질.

존재할 수 없는 검... 그 도신을 따라 공간이 뒤틀리며 빛을 발했다. 아르케아가 스스로의 법칙을 다시 써, 이 무기가 존재할 수 있게끔 하였다.
타이리츠에게는 웃긴 일이었다.

저 검은, 어디선가 보았던 기둥이 아닌가.

순식간에 히카리는 구속을 풀고 다시 일어서서, 검을 역수로 쥐고 땅에 박아넣었다. 그러자 알 수 없는 강한 바람이 불어와 타이리츠를 날려보냈다. 아주 멀리.

히카리는 검을 다시 들고서 타이리츠를 향해 겨누었다. 시야에 자신의 떨리는 손이 들어왔다.
바람에 계속 밀리면서도 타이리츠는 가까스로 착지했다. 그 시선은 히카리의 검을 향했다.

검을 바라보았다.

계속.

...이가 갈렸다.

히카리의 얼굴을 보았다. 전혀 집중하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우유부단함. 머뭇거림.

타이리츠는 저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고 싶지 않았다.
지면에서 유리의 벽이 솟아올라 히카리를 감쌌다. 그 벽면에 타이리츠가 다가오는 모습이 바추었다.
반사된 상인가, 아니면 현실인가? 무언가 이상했다. 여러 명의 타이리츠들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습.
검은 소녀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는 칼날을 보자 히카리의 몸에 공포의 감정이 스며들었다.

저 높이 치켜든 손은, 다른 어느 곳도 아닌 바로 자신의 목에 직격할 것이다.
벌벌 떠는 두 손으로 백색의 소녀는 검을 강하게 쥐었다.

히카리의 머릿속에서 어떤 소리가 크게 울려퍼졌다. 아주 고통스러운 소리가. 그 뒤를 심장이 박동하는 소리가 이었다.

히카리의 이성이 판단한다. 원한다면... 싸움을 끝내는 대신 영원히 이어가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다시 검을 역수로 쥐고 땅에 박아넣으면 이 유리 벽들은 날아갈 것이고, 타이리츠 또한 쉽게 날려보낼 수 있을 것이다.

====# F-6 #====
히카리의 이성이 판단한다. 원한다면... 싸움을 끝내는 대신 영원히 이어가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다시 검을 역수로 쥐고 땅에 박아넣으면 이 유리 벽들은 날아갈 것이고, 타이리츠 또한 쉽게 날려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럴 터였는데, 어째서?

타이리츠의 손이 부드럽게 오른쪽 뺨을 어루만지는 것을 느끼자...

검은 옷을 입은 소녀의 것임이 분명한 육체가 자신의 앞에 나타자나...
어째서, 검을 위로 들어 그 가슴을 찔러버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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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렬하게 타오르는 감정이 검을 밀어넣었다. 시야의 한켠으로 타이리츠의 손에서 검은 물체가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타이리츠의 오른팔이 고통에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

천천히, 눈부신 광채가 그 빛을 더해갔다. 현실을 벗어난 듯 기묘한 빛깔.

살고 싶다 울부짖는 듯한 비명이 소녀의 생명력을 앗아갔다.
대지를 울리는 그 외침이 타이리츠의 몸을 타고 흘렀다.

그리고 침묵했다.

소리와 함께, 소녀의 생명이 멎었다.



유리의 검이 소녀의 몸을 꿰뚫어 파고들자마자 타이리츠의 피와 생명력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워 자신을 채우더니,
이윽고 갈라지고 깨지며 공기 중으로 흩어져 사라지기 시작했다.
타이리츠의 생명이 완전히 꺼지고, 그 몸이 쓰러질 때까지 걸린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반사적으로 히카리는 자신의 뺨 위에 올려져있던 타이리츠의 손을 잡았다.
그 곳에 타이리츠는 없었다. 싸늘한 주검만이 남아있을 뿐.

그럼에도... 부서져가는 검을 잡은 히카리의 손 끝에 온기가 감돌았다.
다른 쪽 손을 잡은 타이리츠의 손에서 힘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느껴졌다.

검은 소녀의 발이 땅에 닿았다. 그 차가운 몸을 지탱하는 것은 히카리의 따뜻하고 축축한 손 뿐.
감은 눈. 이제는 풀려버린 찡그렸던 미간... 그렇게, 평화를 찾지 못한 채, 타이리츠는 죽었다.

그리고, 아직 뜨인 눈과 뛰는 심장을 지닌 히카리는, 이제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타이리츠를 받치던 왼손을 천천히 빼자 시체가 쓰러지기 시작했다.
히카리는 이제는 생기가 감돌지 않는 그 손을 세게 꽉 잡았다.
눈이 점점 크게 뜨였다. 이윽고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무릎을 꿇은 자세가 되었다.

움직이지 않는 타이리츠의 가슴에 손을 대자, 다시 온기가 느껴졌다.
히카리는 자신이 낸 상처로 시선을 옮겼다.

히카리는 이 땅에도, 하늘에도 상처를 입혔다.
모든 것이 무너져 평평해진 세계. 히카리는 타이리츠의 가슴에 뚫린 구멍에서 눈을 돌리기가 힘들었다.
자신도 모르는 엄청난 힘으로 뚫어버린 그 구멍을.

대지는 평탄했고, 하늘은 움직이지 않았다. 교회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검은 소녀의 등 뒤로는 폭발에 휩쓸려 반쯤 무너져내린 벽이 있었다.
타이리츠의 몸이 막아준 덕에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무사하지 못했다.

어리석은 히카리는 자신의 얼굴을 타이리츠의 얼굴 가까이 대고 결코 내쉬지 않을 숨을 부질없이 기다렸다.

히카리는 타이리츠의 손을 더욱 세게 쥐었다. 타이리츠의 손은 힘이 풀린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화가 난 듯 손을 내팽개친 히카리는 손톱을 검은 소녀의 옷으로 파묻었다.
무언가 따뜻한 게 느껴졌다. 자신의 손 위로 떨어진 눈물이었다.

눈물보다 앞서 이 손을 적셨던 온기가 무엇이었는지 히카리는 잘 알고 있었다.
히카리의 손은 그 액체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붉은색 표면을 눈물이 붓질하듯 가로질렀다.
차마 모를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럼에도 붉은 색에 뒤덮인 스스로의 손을 보자...

히카리는 극심한 공포에 빠졌다.

두려움에 질려 등을 꼿꼿이 세우는 바람에 뒤로 나자빠질 뻔 했다.

표정이 뒤틀리고 입술이 벌벌 떨렸다.

깨끗한 쪽의 손으로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더 울었다.

그렇게 히카리는 타이리츠와 함께 땅 위로 쓰러졌다. 백색의 소녀는 붉게 물든 손을 드레스로 갖다 대었다.
자신의 위에 엎드려있던 시체가 교회의 잔해 위로 쓰러졌다.

자기 자신이 한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자기 자신이 내뱉았던 그 냉소적인 질책이.

이런 짓은 하지 않아도 됐다.



...정말, 하나도 재미없다.

더이상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어.
그래, 평생 그 시체에 손 올려놓고 있어봐.
그러면 네 피부를 태우는 듯한 그 열이, 그 검처럼 사라지기라도 할 것 같아?

그 아이는 죽었어. 너 때문에. 네가 죽인거야.

그 애가 얼마나 큰 고통을 받았는지.. 정말 이해하려고 해보긴 했어?

“이제 어떡해야 하냐”고...? 아니, 정말 모르겠어?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야.
다시 일어서서 여행을 계속하고 싶다고?
이 세계가 네가 한 짓을 모두 지켜봤는데도?

그런데 어디 갔어? 승리의 희열은 어디 갔냐고. 이겼잖아? 살아남았잖아?

그래도 싫어?

그 애도 살아있길 싫어했지.

그렇다고 해서 네가 한 짓이 정당했던 걸까?
정당했다고 해도 과연 네 마음이 편해질끼?



너, 제정신이야?

지금조차...

너는 아직 너만 생각하고 있짆아.

그 생각과 함께, 히카리의 마음은 종이로 지은 집처럼 무너져내렸다.
오른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쥐뜯었다. 왼손은 여전히 시체에 올린 채.

자책하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자기를 향한 책망. 자기, 자기, 또다시 자기 자신.

수면 밑에서 맴돌던 생각이 표면으로 떠올랐다.

...항상 이렇지 않았나?

소녀가 깨어나자마자 그녀의 눈앞에 보인 것은 유리로 된 나비의 무리였다.
‘너무 예쁘게 날아다닌다. 줄에 달려 떠있는 걸까?’라고 소녀는 생각했다.

무릎 꿇고 앉아 드레스의 매무새를 가다듬고 유리 나비들을 바라보았다.
알고 보니 이것들은 나비가 아니라 유리 조각이었으며, 놀랍게도 스스로 떠다니고 있었다. “아름다워라!” 소녀는 느낀 대로 외쳤다.

유리 조각은 지금 소녀가 있는 이 새하얀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바다, 도시, 화염, 불빛이 차례대로 보였다. 소녀는 손을 뻗어 조각들을 흐트러뜨리며 즐겁게 웃었다.

나는 이 유리 조각들에 “아르케아”라는 이름이 있다는 것을 아직 몰랐어.
사실, 이름이 무엇이든 나에겐 상관없었어. 조각들은 그 자체로 너무나 아름다웠으니까.
조각들을 만지고, 휘두르고, 바라보며 즐겼어. 그거면 충분했어.

...충분했을까?

사실 알고 있었잖아. 경험으로 알고 있었잖아.
사람이 진정으로 변하는 일 따윈 없다는 걸.

여태껏 쭉, 알고 있던 사실이잖아.



평생 암막은 내려오지 않을 거야. 이 이야기에 ‘끝’은 없으니까.[6]

이 세계엔 의미가 없거든. 네가 원하던 바잖아?

망자의 세계에서 외로이 눈물을 흘리는 소녀가 있을 뿐이야.

그래도 변하지 않는 하나의 진실.
이 세계에서 너를 내보낼 수도 있었던 소녀의 피와 함께 너에게 스며든 단 하나의 진실을 위안삼길 바래.

그래.

이 세계는 낙원이 되었어.

====# F-7 #====
낙원.
사후 세계, “천국”, 망자의 나라.
삶을 다 한 이들이 잠시, 또는 조금 오랫동안 머무는 장소. 더러는 그 위에 남기도 하지.

너와 내가 있는 이 장소는 그런 곳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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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게 끝인가? 히카리의 뺨에 손을 올린 내가 유리의 검으로 찔리는 걸로...?
이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저 애의 뺨에 닿은 내 손조차도...
...
...이제 날 놓아줘.”

왜? 아직 죽지 않았잖아. 아직... 그 안에 꿈틀대는 의지가 있잖아. 아직 숨이 붙어있잖아. 아직... 좀더 나아갈 수 있잖아.

“아니야...”
아니, 아직 끝나지 않았어...
내 말을 듣고... 떠올려봐.
네가 누군지...
오래 살아왔잖아. 이것보다 더 끔찍한 일도 목격했잖아.
그러니 일어나서 싸워. 다시 한 번 더…

“그만해.”

...그래.
그럼 싸우지 말고, 이야기만...

“내 말을 듣긴 한 거야? 이야기고 싸움이고 아무것도 하기 싫다고. 나는... 나는...”

나는 네가 다시 기억을 떠올렸으면 좋겠어.
“...슬슬 짜증이 나려 하네.
넌 기억해? 그럼 내가 왜 이러는지...

...으윽.
기억들이... 사라지지 않아.
원하지 않아도 마구 떠올라.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이 기억들이 맞다면, 하… 이게 무슨 재미없는 장난인지.”
...

“내 전생에선... 난 살아가고 싶었어. 살아있는 게 좋았어. 하지만... 삶은 끔찍했지.
수없이 쓰러지고, 수없이 모욕당하고... 어딜 가나 증오만이 우리를 맞이해줬어.
우린 그저... 그 힘으로...
사람들을 도우고 싶었을 뿐인데...”

그 사람들은 우리가 두려웠던거야.

“‘우리’? 넌 누군데?”

그러는 너는 누구야?
“...웃기기도 하지. 내가 누군지, 그것만은 기억나지 않아.
...
그냥, ‘타이리츠’라고 불러.”

그럼... 나도 그렇게 불러줘.

“...말도 안돼. 지금 장난해? 내가... 결국 내가 옳았다는 거야?”

뭐가?

그 애가 아무 생각 없이 이 세계를 만들었다는 거!
만약 네가... 여기서의 내 생명이...

...끔찍한 녀석 같으니...”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으니 어쩔 수 없었겠지.

“그렇다고 그 애를 동정하고 싶지는 않아. 나와는 다른 세계 출신이지만, 적어도 자기 능력이 얼마나 강한지는 알고 있었을 거 아니야? 분명 알고 있었을 거야. 그러고도 일부러 아무 생각도 안 한 거라고. 그러니까...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해도 그건 변명거리가 안 돼. 날 봐. 조형자들이 내게 가르친 그 모든 게 지금 무슨 쓸모가 있지?
그 애와 내가 다른 건 배움의 차이가 아니야. 인간으로서의 차이라고. 내게 같은 힘이 있었다면... 정말 모든 걸 바꿀 힘이 있었다면...세계를 위해...”

썼겠지. 하지만 없었어.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그래서 내 두번째 삶이 시작되어 버린거야. 그 아이가 두 번째 삶을 원했으니까. 하지만 멍청하게 자기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환생의 기회를 줘버렸으니까. 정말... 질리도록 바보같아. 웃겨, 안 그래? 웃어봐. 어서, 웃어보라고!”

...
“왜, 안 웃겨? 못 웃겠어? 그렇겠지. 무슨 두 번째 기회가 이런 식이냐고.
전생과 똑같은 삶을 끔찍하고 뒤틀린 방식으로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잖아.
난 온 몸이 갈갈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버티며 힘겹게 살아갔어.
뼈가 부러지고 피를 흘리면서도 난 다시 일어섰어. 그게 내 인생이었다고!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다시 일어나 싸웠어!
왜 이런 삶을 또 겪게 만든거야? 대답해! 왜냐고! 나는...!
나는... 이번만큼은 다르길 바랬어…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고...”

...그래도 결국, 포기하고 말았지.
“...그래.
...
있지...
나도 이제 죽기 직전인 거 알아. 하지만 하나 알려줄래? 죽기 전에 바깥을 볼 수 있을까?
나의 ‘새’들로… 그 아이가 만들어낸 이 작은 감옥을, 마지막으로 한 번 볼 수 있을까?”

...볼 수 있어.

“좋아.
...
아무도 모르는 조그마한 장소들이 수없이 많아. 그 안에 갇혀 방황하는 영혼들도...
아니, 영혼이라고 부르면 안되겠지. 여기에 있는 건 기억뿐이니까. 우리들조차 그저 기억의 잔재일 뿐이니까.
저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 조각을 엿보았을 때도 내게 모든 걸 알려주진 않았거든.
대부분은 아주, 아주 행복해.

“...악랄하네, 하핫…
나... 나 울고 싶어. 그냥… 울고 싶어. 대체 나는 여태까지 뭘 해온 거지? 난 왜 죽은 거지?”

...

“표정이 볼만하네. 넌 알아? 대답할 수 있어? 내가 왜 죽은 건지?
...으윽, 아파. 모든 게 다 아파. 드디어… 모든 걸 이해했어. 이 세계의 모든 게 다 끔찍하다는 사실을... 그런데... 난 울지도 못해.”
그거야.

“...?”

죽고 싶지 않았잖아. 그런데 왜 죽었어?

“...내 전생에선, 내 삶이 어떻게 될지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어.
미래는 수없는 갈림길의 연속이었지.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었어. 그래, 그 중에는 죽음도 있겠지.
하지만 길을 잘 고르기만 한다면 그 무엇이라도 가능했던 거야.
여기서는 달라. 바보같이 여기도 전생과 같다고 생각했던 시기가 있었지. 구역질이 나와.
이 세계의 길은 끝이 없는 황무지야.
누가 어떤 길을 걷든, 목적 없이 영원히 걸어가다 결국 지쳐 쓰러지고 진리를 알게 돼.
이 세계에서는 어디서 어떤 선택을 하든, 모든 길은 결국 허무로 이어진다는 진리를.”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나는 이 세계에도 가능성이 있다고 믿어.

“여기에 갇혀서 죽은 사람하고만 얘기할 수 있는 주제에 왜 그렇게 생각해?
바보야? 여태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긴 했어?”

...너처럼 생각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야. 희망을 놓고 싶지 않아.
나는... 네 말을 믿고 싶지 않아.

“내 말이 그거라고. 진리에서 눈을 돌리지 마. 이 세계에 의미 따위는 없어.”
아니.
그건 진리가 아니야.
진리가 되도록 두지 않겠어.
너도 그렇게 생각하잖아. 만약 그게 진리라면 너무... 역겹지 않을까? 너무 슬프지 않을까?

“...
기억해, 전생에서는 나도 너처럼 생각했지. 그렇게 살아가려는 의지를 곱씹었어.
너는 정말 나구나. 나는 그 아이가 만들어낸... ‘나’의 복사본.
그래... 우린 결국 텅 비어버린, 복제품 영혼에 불과했어.
그렇구나...
그 아이는 살아있고, 우린 모두 죽은 거구나.”
...

“그런데... 너는 왜 여기에 있지? 다른 아이들의 ‘원본’은? 영혼은?”

...나도 잘 모르겠네, 바보라서.

“그래, 그럼... 말 돌리지 말고 이것만은 확실하게 말해줘. 너는 ‘진짜’ 나이자, 나의 영혼인거야?”

그래... 맞아. 줄곧 이 장소에서 홀로 모든걸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나도 이제 슬슬 짜증이 나려 하네.
타이리츠야, 너는 ‘진짜’가 아니니? 나도, 너도, 그 세계의 모두가 생각하며 존재하고 있잖아?
“그럴지도 모르지. 난 죽어서 없지만.”

또, 짜증나는 소릴.
그렇게 사람 신경 긁는 재주가 있는 네가 어떻게 가짜겠니.

“하핫...
...
고마워.”

두 번째 삶에서조차 끔찍한 운명을 맞이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게다가 이렇게 바뀌어버리다니...
“뭐가 어떻게 바뀌었는데?”

네가 네 입으로 말했잖아.
포기했다고.
나는... 음...
좋은 쪽으로 바뀌길 원했는데...
...
정말 어떻게 안될까? ‘악당’은 죽었잖아.

“...‘악당’이라... 농담인건 알지만, 미안해.
화가 많이 났었나봐.
나도 완전히 포기하기는 싫었어.
전혀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네가 있잖아? 어쩌면 내가 사라지고 나서도 넌 여기 남아있을지도 모르지...
내가 없어지고 나서도 계속 이 세계를 지켜볼 생각이라면...
...나처럼 희망을 놓지 않아줬으면 해.
그럼, 어쩌면...
아니, 확실히,
이 세계에 남아있는 아이들도 구원받을 거야. 그렇게 믿고 싶어.
네가 말한 대로 뭔가 바뀌는 것...
내가 원하는 건 그게 다야.
내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이 모든게 다 끝나고 나서도 날 찾아낼 수 있다면...
그게 이루어졌을 때 알려주길 바래.”
약속할게.

“생각해보니 웃기네.
살아있을 때 주변에 아무도 없으면... 곧잘 나 자신에게 말을 걸곤 했어.
그런데도, 혼자인 느낌은 들지 않았지.”

그 누구도 진정으로 혼자인 사람은 없어.

“그래...
그렇게 되뇌이곤 했지.
...다시 이 세계를 보고싶어.
무너진 탑. 하늘을 떠다니는 유리 조각. 드넓은 백색의 세계.
하얀색, 하얀색, 망자의 영혼에 이끌리는 유리...
이제는 알아.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어.
저 아이들은 더이상 방황하지 않을 거라는 걸.
정말? 누구 잊은 사람 없어?

“잊은 사람...?
아. 그렇지. 히카리... 여기서도 보여. 상심이 엄청 큰 모양인데.
...하지만 저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분개하고, 상처받고...
아무것도 없는 허무보다는, 저게 나아.”

그렇지.
“히카리가 앞으로도 잘해나갈지는 몰라. 하지만 저 순간은 분명 영원히 기억에 남겠지.
솔직히... 히카리에게 사과하고 싶어. 분명 나는 옳은 일을 했어. 하지만...”

그게 무슨 소리니? 네가 한 일에 어디 옳은 게 있다고.

“풉...! 하핫. 그래. 하지만... 정말로, 잘못된 일은 하지 않았다고 믿어.
히카리에게 사과하고 싶어. 우리가 진짜고, 히카리도 진짜라면...
저 애도 아무것도 모른 채 이유없이 벌을 받은 또다른 멍청한 영혼에 불과한걸.
...
이제 시간이 다 된 것 같네.”

유감이지만, 그런 것 같아...
...
떠나지 말아줘.
“유감이지만, 그럴 수는 없어... 나는 겨우겨우... 여기 존재하고 있을 뿐이니까...”

하고 싶은 말이 있잖아.

“그렇지...
...히카리...
미안해. 후회는 하지 않지만, 내가 느꼈던 증오는... 너를 향한 게 아니었어.
또다른... 너는... 아직... 있어... 살...아있어...
그 아이는... 여전히 싫...지만...
너는...
...
너는... 그 녀석보다 강해… 너도 알고 있잖아...
히카리, 그러니까...
나는 네가 다시 일어서리라 믿어.”
눈을 감자.

“이미 감았어.”

이제 아무 걱정 하지 마...

“걱정 따위 없어.”

다시 만나자.
“그렇게는 안 될 것 같아.
그래도 괜찮아.
받아들였으니까.
난 끔찍한 삶을 살았지만, 더 나은 세상을 꿈꿨어...

그 어떤 벽과 마주치더라도, 나에게는 이상이 있었어. 그래서 싸웠어.
얼마나 잘못되었다 해도… 길을 잃어버렸다 해도...

...

죽음을 택해버려서 미안해.
포기해버려서 미안해.
...이렇게 낭비해버렸지만, 한 번 더 기회가 주어진 건 행운이었어.
그러니까... 받아들였어.
응.

“히카리...나는...한심...
바보같… 끝으로만… 내가 기억되질 않았... 좋겠어...

...내 말이 들린다면, 꼭 명심해줘, 히...히카리...
정말로. 잊지... 마...
...
...
내가... 이 삶을 받아들였다는 걸.”


소녀는 타이리츠의 주검 앞에서 울었다.

고통스러울 정도의 비애로 가득찬 히카리는, 마지막으로 타이리츠가 지은 미소를 놓치고 말았다.

이 이야기의 일부분은 아직까지 전해지지 않는다. 어떤 이야기는 완전히 전해지지 않은 채 끝을 맺는 법이다.

그런 이야기들은 조각만이 남아, 다시 하나가 되어 전해지길 기다리는 것이다.
이 곳은 조각의 세계.

조각을 줍는 것은 남겨진 소녀들.

조각에 비치는 것에 의미가 있고, 삶이란 존재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믿는 소녀들.

상처받고 외로운 하얀 옷의 소녀가 땅 위로 쓰러졌다.

하지만 언젠가는 일어서, 다시 조각을 찾아 나설 것이다.
기억들은 이 세계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끝의 순간. 그 너머까지, 영원히 기억될 것이며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소녀들은 나아갈 것이며,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잊지 않으리라.


끝.
운명 거부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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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꿈
One Last Dream

>
먼지와 피로 덮인 히카리가 외로이 앉아있어.

순전히 자신의 잘못으로... 자기 연민으로 말미암아 파멸을 맞이한 소녀.

손에 얼굴을 파묻은 히카리의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건 바로 너.

죽어버린 나의 분신이야. 너의 죽음, 아니,
이 모든 비극을 불러온 그 무심함이 다시 소녀의 마음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려 하고 있어.

붉게 물든 하얀 소녀도 알고 있을 거야. 이게 자신의 운명이라는 걸.
너를 죽이는 게, 자신의 운명이었다는 걸 말이야.

뻣뻣하게 굳어있던 히카리의 등이 조금 굽어.
이 세계, 아르케아에 팽팽하게 돌던 긴장감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져.
안도감.

혼돈은 물러갔어. 이제 안심해도 돼...
하지만 나에게도 들리는 걸.

이 상황을, 자기 자신을, 아르케아를 받아들이라고 히카리의 마음 속에 속삭이는 무언가가.
...하지만.

“...타이리츠...”

히카리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조그맣게 너의 이름을 속삭였어.

“그게 ‘이 세계’에서의 이름이라니, 대체 무슨 뜻이었어...?”

그리고 조용히 사색에 잠겼어.

그러자 다시 속삭이는 목소리가 찾아왔지.
원한다면 그 질문의 답은 언젠가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이 세계는 기억의 보관소니까.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

점점 마음을 채워가는 무심함 밑에서 들꿇는 것은 격렬한 혐오.
자신을 향한, 끝없는 혐오.

당연한 일이야. 어떻게 이런 결말을 용납할 수가 있겠어?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지? 이게 히카리 자기 자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말이야.

히카리는, 이 세계에서 앞으로 보고 걸어갔던 히카리는, 도저히 이 결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

히카리는 울렁이는 가슴을 붙잡고 어금니를 꽉 물었어.

“...”

그러고는 발 밑의 모래에 손을 파묻고 몸을 일으켜 무릎을 꿇었어.

“아르케아... 너는 나를 치유하는 존재니?”

서늘한 감각이 사지를 타고 흘러오는 것이 느껴졌어. 팔의 긴장이 풀렸어.

“...나는 알아.” 히카리가 천천히 눈을 감으며 쉰 목소리로 속삭였어.

“이 세계가 겁먹고 지치고 나약한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낙원이라는 걸...”

“...”

바싹 미른 입으로 침을 삼키는 시늉이라도 해보는 히카리.
천천히 눈을 뜨고, 모래에 파묻은 손을 꽉 쥐고 두 발로 일어섰어.
쥔 주먹 사이로 모래가 흘러나오고 있었어.

“내가 뭘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네가 날 위로하도록 두는 게 정답일까?”

“아니... 절대로 아니야.”

“이런 건 싫어...”

“싫단 말이야...!”

...
“으읍...!”

히카리가 갑작스레 앞으로 몸을 굽히며 한 손으로는
배를 부여잡고 다른 손으로는 입을 틀어막았어.

히카리의 거부 선언에, 세계가 또다시 히카리를 ‘기억’한 모양이야.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입을 틀어막은 히카리가 갑자기 움찔했어.
나에게도 들려. 히카리의 귓속에서, 머릿속에서, 심장 속에서 날카롭게 울리는 소음이.

이제는 속삭임이 아니라 우렁찬 고함과도 같은 소음.
그 고요한 아우성이 히카리에게 묻고 있어. 결정하라. 네 마음이 원하는 것을 외쳐라.

“내... 마음이 원하는 것을...?”

히카리는 자신의 마음이 가라는 대로만 움직이는 수녀였어. 이 세계에서 눈을 뜨기도 전부터 말이야.
그 결과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지.

본능일까? 히카리의 ‘몸’이 기억하고 있는 걸까? 히카리의 전생은 어땠지...?

하핫...
난 별로 궁금하지 않아.
그저 히카리의 새로운 ‘마음’이, 이 모든 일을 한 순간에 없었던 일로 하려는 게 조금 웃길 뿐.

얕은 숨을 내쉬며,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히카리가 내뱉은 ‘답’은 아주 명료했어.

“나는... 되돌리고 싶어.”

“타이리츠를 되살려야만 해.”

“이 세계는... 엉터리야
이런 세계 따윌 위해 내가 죽을 것 같아? 다른 사람이 죽도록 내버려둘 것 같아?”

“아니! 절대로!
무슨 짓을 해야 하든. 무엇을 포기해야 하든. 모든 걸 희생해서라도...!”

히카리가 손에 꽉 쥐고 있던 모래를 흩날리자 공중에서 모래알이 반짝거렸어.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결말을 바꾸고...!”

세계의 심장이 요동치며 히카리의 목소리를 묻었어.
아르케아는 히카리를 놓아주지 않을 거야. 절대로.
또다시 목소리가 들려.

세계의 정신이, 의도가, 지식이 히카리의 마음 속으로 들어와 전신에 울려퍼졌어.

너는 죽을 수 없다.
너는 살아가기를 택했고, 살아가는 것이 너의 운명이다.

히카리는... 이미 그걸 알고 있었지.
마음 속으로부터 죄책감과... 용서를 빌고 싶은 마음이 차올라 눈물이 고였어.

하지만, 그 눈물이 흐르기 전에 세계의 심장이 또다시 고동쳤어.
아르케아가 말하기를,
“죽지 말아라.”


“다만, 끝을 맺어라.”

히카리는 입술을 깨물었어.
눈물이 넘쳐흘러 뺨을 타고 내려갔어.
고개를 끄덕였어.

또다시 심장이 뛰었어.
그리고...

아르케아의 빛이 서서히 멎어갔어.

그리고 그 빛은 히카리에게 흘러들어갔어. 팔과 다리로, 심장으로.
몸을 가누기 버거워진 히카리는 거의 쓰러질 뻔 했어.

히카리는 눈 앞에 주마등처럼 스쳐지나는 수많은 기억들을 무시했어.
오로지 생명이 꺼진 너의 주검만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히카리는 이제 자신의 소명만을 마음에 담았어.
내가 아래로 끌려 내려가는 것이 느껴져.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네가 죽어버린 그 세계로.

...
히카리는... 자기가 뭘 포기하고 있는 지 알고는 있는 걸까?
이런 방식으로 ‘끝을 맺는다’는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고 있는 걸까?

난 모르겠어.

너도 모르겠지.

그 세계로 끌려간 나는... 여전히 이 모든 걸 기억하고 있을까? 이해하고 있을까?

아니... 아마도 아니겠지. 하지만... 히카리는 그 어느때보다 확신에 차있어.



...

히카리의 마음이, 심장이, 앞으로 일어날 일에서 모두를 인도할 등대가 될거야.

...나는, 저 등대를 믿어. 너도 그렇지?

결국 네가 옳았으니까...

히카리와 그 아이는, 다른 사람이라는 걸.

...‘타이리츠’...

이제 작별이야.

하지만 걱정하지 마.

네 곁을 떠나지는 않을 테니까.



히카리의 의지에 따라 또다시 하늘이 무너져내리며, 대지가 치솟았다.
세계가 스스로를 희생해 타이리츠를 되살리기 위해 움직였다.

살아있는 영혼이 진정으로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살아있었을 적의 모습을 한 모조품일 뿐.

그러나 빛의 소녀와 대립의 소녀가 지닌 영혼은... 평범하지 않았다.

일어날 수 없었던 일이 펼쳐지고 있다.
분명, 세계가 크게 망가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아르케아는 있는 힘을 다해 모든 것을 다시 써내려가고자 할 것이다.

그러려면 검은 옷을 입은 소녀의 ‘첫 번째 영혼’과, 소녀의 두 번째 삶이 남긴 영혼의 조각이 필요하다.

조각난 영혼의 외침을 들은 완전한 영혼이 저 너머의 공간에서 이 세계를 향해 재빠르게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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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카리의 주변으로 소용돌이가 솟아올라 빛과 그림자의 격류로 현실의 장막을 찢어발겼다.

아르케아가 타이리츠를 ‘기억’했다. 그리고 히카리의 명령에 따라 그녀의 기억이 유리가 되어 쏟아져내렸다.
순식간이었다. 마치 항상 그 곳에 있었다는 듯이.
정말 가능할까? 정말로 이 세계가 찢어진 두 영혼을 다시 합칠 수 있을까?

...할 수 있을 것이다. 법칙 따위 무의미하다.
타이리츠의 기억으로, 히카리의 의지로, 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유리 조각들이 빛을 반사하며 소용돌이를 뚫고 나타났다.

고통을 머금고 이 땅위를 거닐던 소녀가 있었다.
사무치는 비애에 파묻혀 땅을 기던 소녀...
그럼에도 그녀는 구원을 찾아 앞으로 나아갔다.

구원을 찾아, 자유를 찾아.
소녀가 바라던 것은 오로지 한 가지.
진정으로 미소를 지을 이유였다.

이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
세계를 뒤집는 한이 있더라도, 세계와 맞서싸운 소녀.



히카리의 눈 앞으로 기억의 풍경이 스쳐지나갔다.
히카리는 자신의 기억을 되돌아볼 틈새도 없었다.

검은 소녀의 눈물 방울이 폭풍 속으로 섞여들어갔다. 대부분의 고통은 이미 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빛의 영혼으로서,
히카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타이리츠가 겪은 절망의 기억 중 짧은 것들만을 모으는 것이 고작이었다.
긴 기억들은, 히카리의 손을 거부하고 멀어질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 깊은 고통으로 말미암아 타이리츠가 겪은 일을 알고 있는 히카리는,
슬픈 기억들을 놓아주기로 했다. 자신이 타이리츠와 만났던 순간의, 찾지 못할 그 기억과 함께.

새로이 탄생하는 타이리츠는 역경의 늪에서 빠져 겪은 절망은 모르지만,
자신이 투쟁과 대립 한가운데에서 태어났으며, 살아갔던 존재라는 것은 기억할 것이다.

히카리의 몸에서 새로운 힘의 파동이 퍼져나갔다. 힘을 가득 담은 빛기둥에 네 개, 땅에서부터 솟구쳐올랐다.
마침내 강림한 검은 옷의 소녀로부터 히카리를 지키기 위해 이 세계가 불러낸 것이었다.

처음엔, 히카리는 자신이 보고 있는게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죽음 그 자체의 현현과도 같은 모습으로, 완전한 영혼이 하늘을 뒤덮었다.
그것은 천천히 가까워지더니 유리의 소용돌이로 흘러들어갔다.

그 순간 마침내 히카리는 이해했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서, 부드럽게 영혼을 유리 조각으로 인도했다.
그렇게 ‘첫 번째’ 타이리츠의 길잃은 영혼은 새로이 태어날 타이리츠의 몸에 생명을 불어넣었고,
‘두 번째’ 타이리츠의 영혼은 그 몸을 안정시켰다.

히카리의 발 밑에서 땅이 격렬하게 진동했다.
히카리는 최대한 쓰러지지 않으려 애쓰며 두 손으로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지휘했다.
이 세계가 격통에 내뱉는 천둥과 같은 곡성을 들으면서도, 새하얀 소녀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리고 소녀는 마음 속으로 흔들리지 않는 그 맹세를 다시금 상기했다.

히카리는 이 세계를 이루는 핵조차 비틀어 죽어버린 여신의 부활에 이용했다.
그렇게, 마침내, 절대적이었던 법칙이 다시 쓰인 순간, 히카리의 고요하지만 명징한 명령으로,
세계의 핵에 새로운 죽음이 도달했다.



압도적인 빛과 그림자의 파동과 함깨, 아르케아가 죽어가기 시작했다.

소원의 후폭풍이 일기 시작했다. 하늘이 격류와 같이 흐르고, 세상에 얼마 남지 않은 빛은 모조리 히카리에게 흘러들어갔다.
히카리는 공중에 떠 찬란하게 빛나는 타이리츠의 몸에 영혼을 불어넣고,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느끼며,

온 세계의 생명을, 대지의 생명을 불어넣었다.

그렇게 히카리는, 아르케아를 포기했다.

멎어가는 햇빛 아래, 소녀의 머리 위로 구름이 강물처럼 흘러갔다.

반쪽짜리 밤하늘 아래,
한 귀족이 갈라지는 대지 위에 서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자 하나둘씩 사라져가는 별들이 보였다.

상냥하게 돌보는 소녀, 방랑하며 탐구하는 소녀, 관찰하고 염원하는 소녀...

행복한 영혼, 굶주린 영혼, 야망하는 영혼...

전쟁을 울부짖는 심장, 노래를 부르는 심장...

모든 생명이 머나먼 한 장소로 모여드는 모습을 보며 그들은, 종말을 보았다.

이윽고...

...히카리는 마지막 생명의 조각이 타이리츠에게 흘러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검은 옷을 입은 소녀의 몸이 천천히 땅으로 내려앉고, 히카리의 손에서 생명의 기척이 사라져갔다.
그리고...

하얀 옷을 입은 소녀는, 자신의 일부가 이 급류에 섞여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아무런 걱정 따위 없었다.

몰아치던 바람이 멎고, 아르케아의 하늘에 평온이 찾아왔다.
현기증을 느낀 히카리는 쓰러지기 전에 자세를 고쳐잡았다.

어떻게든 진정하려 했다. 자신이 지금 한 일이 무엇인지, 다시금 곱씹으려 했다.
하지만 그리 할 수 없었다.
온 신경이, 단 한 가지에 쏠려있었기 때문이었다.

타이리츠는 정말로 되살아난 건가?





하늘에서 또다시 먼지가 불어와 내려앉았다.

검은 소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끝이 다가온 때에,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곁에 그 누구도 없었다는 것을, 그저 눈을 감고 눈물을 흘렸을 뿐이라는 것을.

천천히 눈을 뜨자...

그러한 기억들은, 연기처럼 서서히 사라져갔다.



타이리츠의 눈썹이 움찔거리는 것이 보였다.
히카리는 주먹을 꽉 쥔 채 숨을 내쉬려 했지만 공기가 목에 걸려 잘 빠져나오지 않았다.

아주 화려한 소란을 불러일으킨 것 치고는, 히카리가 한 일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너무나도...
소원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게 희망과 노력뿐이라니, 믿기지가 않았다.

히카리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의심을 떨쳐내고 덜덜 떠는 다리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타이리츠의 눈이 완전히 뜨여, 한번 눈꺼풀을 깜빡이더니, 다시 감기기 시작했다.

히카리는 재빨리 달려가 무릎을 꿇고 타이리츠를 껴안았다.

“으, 으응?! 지금 뭐하는...?”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도 강하게 자신을 껴안는 히카리를 보고서,
타이리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히카리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타이리츠의 품에 얼굴을 품고 하염없이 울었다.
검은 옷의 소녀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채, 그저 히카리를 바라보기만 했다.

대지에 수많은 균열이 새겨졌다.
영원히 하늘에서 내리쬐던 빛은 멎었다.
세계가 상처를 입었다.

그럼에도 히카리가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눈 앞에 있는 검은 옷의 소녀.
타이리츠가 움찔대는 히카리의 등 위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종말의 때에, 두 소녀는 말없이 서로를 위로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히카리가 끝없이 사과했다.

“뭘 잘못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타이리츠가 대답했다.
“결국 바로잡았잖아? 그런데 뭘 사과하고 있어?”

여전히 팔은 타이리츠를 껴안은 채로, 히카리가 몸을 들었다.
눈과 코가 새빨갛게 상기된 히카리는 비탄과 기쁨이 섞인 오묘한 감정을 품고 타이리츠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갑작스레 다시 타이리츠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타이리츠는 부드럽게 히카리를 안아주었다.
조용한 풍경 속, 검은 옷을 입은 소녀는 하얀 옷을 입은 소녀가 마음껏 울도록 두 팔로 안았다.


회색 빛이 되어버린 세계로 손을 맞잡은 두 소녀가 여정을 떠난다.

처음엔 타이리츠가 앞서갔으나, 얼마 안가 두 사람의 보폭이 맞춰졌다.

타이리츠는 자신의 비극을 기억하지 못했다. 적어도 가장 끔찍한 부분만은.

절망의 기억을 비추는 유리 조각들은 더이상 타이리츠에게 이끌리지 않았다.

행복한 기억을 비추는 유리 조각들 또한, 더이상 히카리의 주위를 맴돌며 춤추지 않았다.

검은 옷의 소녀는 어둠의 일부분을 잃었으며, 하얀 옷을 입은 소녀와 세계는... 계속해서 빛을 잃어갔다.
하지만...
...이제 히카리는, 유리 조각의 빛 없이도 찬란한 미소를 보일 수 있게 되었다.

소녀들은 절벽의 끝으로 걸어가,
천천히 무너져내려가는 잊혀진 기억의 세계를 바라보았다.
언젠가 완전히 바스라져 무너지고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소녀들은 오로지 서로만의 존재를 느끼며, 과거를, 기억을 놓아주었다.

타이리츠는 따뜻한 눈빛으로 조용히 히카리를 바라보았다.
언젠가 다른 삶을 살았을 때, 곧잘 짓던 표정이었다.
히카리는 그 얼굴을 보고 아주 간단히 미소를 지어보였다.

‘미래’...?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 상관 없었다.

그들이 느끼는 ‘충족감’은 결코 흔들리는 일이 없을테니까.

그리고...
히카리는 이 여정이 끝났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미래를 향해 놓인 길 위에서 새로운 여정이 시작될 것이다.

...그 길을 걸으며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것을, 히카리는 천천히 받아들였다.
미래의 일을 그 누가 알겠는가?

히카리는 그렇게 되뇌이고, 눈을 감고 생각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예전에는, 미래에 어떤 일이 있을지 알았는가?
아니, 그저 앞만 보고 걸어갔을 뿐이다.

...

살기로 선택했다면, 살아가리라.
이 세계에서 살아가며, 많은 것을 보고, 모든 순간을 음미하며 내 것으로 만드리라.
히카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짐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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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카리는 눈을 뜨고 숨을 들이쉬었다.[7]
아직 모르는 미래를 알리듯 불어오는 바람, 곁에 선 소녀,
만나지 못한 사람들, 가보지 못한 장소...

그 모든 것을 소중히 간직할 것이다.

히카리는 타이리츠의 손을 잡았다.

여정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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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소망
A Perfect W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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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지 않은 과거...

어둡고 추운 어느 곳에...

텅 빈 황량한 대지가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거뭇거뭇한 구름으로 들어찬 하늘 아래, 새로이 차갑고, 새로이 공허하게 된 대지가.
청록의 나뭇잎과 붉게 물든 꽃들은 회색빛으로 바랬고, 사람이 이 땅에서 살아갔다는 유일한 증거인 발자국조차 하늘에서 내려온 새하얀 재에 덮여 사라져갔다.

아직 겨울은 오지 않았음에도, 모든 것이 얼어붙은 공간.
얼음과 재로 뒤덮인 대지 위에 한 소녀가 무릎을 꿇고 구름 사이로 삐져나온 빛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을 크게 뜨고 빛을 응시하는 그 눈에 비친 것은, 천사였을까, 신이었을까.

돌아갈 집도 없고, 부모님은 죽었다. 보호자라고 불릴 법한 사람은 모두 다 죽었다. 동료였던 견습 조형자들도 모두 죽었고, 그녀를 미워하던 사람들조차 죽어버렸다. 유일하게 남은 것은 손에 쥔 유리 조각. 자신의 집에서 가져온 깨진 창문의 조각이었다. 하지만, 아직 희망은 있었다.
소녀는 선택받은 특별한 아이였으니까.

어린 나이에 조형자 훈련을 헤쳐나온 영재니까.

일단 시도해보기만 하면 가능성은 있었다.

분발한다면…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반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럴 넘어, ‘신’이라 불릴 존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소녀는 이 사태를 막고 싶었다.

사람들을 되살리고 싶었다.

손에 쥔 유리 조각을 바라보며, 세상을 구하고 싶다는 소원을 마음에 새겼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의지만으로는 무(無)에서 힘을 창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제 아무리 강인한 의지라도, 아무 짝에 쓸모가 없었다.

이를 깨달은 소녀는 울었다.

하늘에 머무는 신의 의지만이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신의 의지가 바란 것은 소녀와 소녀의 민족이 먼지로 사라지는 것이었으며,
그 바람은 눈 깜짝할 새에 현실이 되었다. 신의 손으로, 직접.

소녀는 유리 조각에 반사된 자신의 눈동자를 보았다. 곧 눈물이 번져 시야가 흐려졌다.
떨리는 입으로, 심장을 움켜쥐는 듯한 고통으로, 사무치는 무력함으로, 비애가 온 몸에 서렸다.

그 무엇도 의미가 없었다. 소녀가 해온 일들도, 지금 하는 일도. 그 무엇도.

천사가 강림하는 것을 본 흑발의 소녀는 고개를 속였다.
그 앞에 선 천사가 손을 들었다.
그렇게, 소녀는 죽었다.
소녀의 이름은 잊혀졌다.

자기가 왜 죽은 건지,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

그 누구도 그 삶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의 순간, 또다른 누군가가 빈 소원이 소녀를 데려가버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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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조금 더 먼 과거...

따뜻하지만 어두운 어느 곳에...

잊혀진 이름의 다른 시대와 다른 장소를 사는 또다른 소녀가 있었다.

이 장소를 어둡게 만든 것은 다름아닌 본인. 커튼을 치고 문을 잠근 뒤, 문고리 밑에 의자를 받친 풍경의 방.

그 방에서, 소녀는 침대 위에 앉아 눈을 뜨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무릎을 끌어안은 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소녀는 “자기 자신”에게 압도되어 있었다.
머릿속을 한 기억이 끝없이 맴돌았다.
계단 아래에서 들려오는 부모님의 선명한 목소리를 엿듣던 기억이.

악담은 아니었다. 다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확실했다.

부모님이 소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그 마음엔 무언가 결여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부모님조차 사랑할 수 없었다.

어느새 기억과 같은 계단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무언가가 난간을 놓고 대리석 바닥을 향해 뛰어내리라고 종용했다.

하지만 실패하면 어떡하지?

소녀는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돌아가 다시 문을 잠갔다.
왜 나는 사라질 수 없는 걸까?
왜 홀연히 어디론가 떠나버릴 수 없는 걸까?
왜 이런 생각이 들까?
왜 내 마음은 이런 걸까?
왜 사라질 수 없는 걸까...?

손톱이 종아리를 파고들었다.

동공이 커지며 호흡이 빨라졌다.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다.
고뇌하는 백발의 소녀는 신이었다.

하지만 고뇌의 이유는 자신이 신이라는 사실이 아니었다. 소녀는 자신이 지닌 힘을 몰랐다.

마음 속으로 피난처를 바랬다. 그리고 그 소원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이루어졌다.

“어딘가… 내가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곳으로...”


흑발의 소녀가 죽었다. 누군가가 빌었던 소원이 그 영혼을 불러냈다.

머나먼 세계, 또다른 현실에서, 더욱 강한 힘을 지닌 누군가가 빈 소원이.

백발의 소녀의 힘은 너무나도 강력했던 나머지 한 세계를 만들어내는 데에 이르렀다.

의미 없는 이름을 지닌 세계, 아르케아를.
아르케아는 망자를 위한 안식처였다.

소원을 빌 때 소녀는 살아있었으나, 항상 ‘죽음’을 가까이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녀는 이 세계의 창조에 아무런 관심을 주지 않았다.
줄래야 줄 수도 없었다. 아르케아는 자신을 위해 빌었던 소원에 불과했으니까.
아르케아에 오게 되는 이들이 어떤 운명을 겪은 사람들인지 만약 알게 된다면, 소녀는 분명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르케아는 시공간을 넘어 수많은 세계에 손을 뻗었다.

그 세계는 살아있었다. 생각은 없을지언정, 죽은 자들과 생명을 나누기를 ‘원했다’.
아르케아는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는 자들을 마구잡이로 불러들였다.

현실을 잇는 봉합선 사이, 부드러운 자줏빛 별이 반짝이는 공간...

...수많은 영혼이 그물에 얽혀, 검은 지평선 너머 새롭게 만들어진 빛나는 세계로 옮겨졌다.

백색의 세계...

그 곳에서 아르케아는 각 영혼의 완벽한 복제품을 만들어 풀어놓고, 따스한 공간과 새로운 모습을 주었다.

영원을, 끝없는 삶을 관측하거나 다시 경험할 영원을 주었다.

하지만 자신의 창조자만큼은 구원할 수 없었다.
아르케아는 수많은 영혼의 복제본을 만들어 새로운 몸을 주고,
원본이 되는 영혼은 풀어주어 원래대로의 운명을 맞이하도록 두었다.
그러나, 후에 ‘히카리’로 알려질 사람의 영혼만큼은 거둘 수가 없었다. 아직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생각이 없는 세계인 아르케아는, 살아있는 사람의 영혼을 어떻게든 최대한 비슷하게 복제하였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아르케아는 끔찍한 비극에 젖은 영혼, 자신의 창조주와 비슷한 영혼을 발견했다.

그 영혼에도 이상한 점이 있었다.
복제본을 만든 후 풀어주었음에도 다른 영혼과는 다르게 이 가짜 세계의 경계선을 건너지를 못했다.
어쩔 수 없으니, 그 영혼은 이 새하얀 대지에서 깨어난 자신의 복제본을 관찰하기로 했다.

타이리츠가, 무너진 탑에서 깨어났다.
파일:Arcaea/Story/완벽한 소망-허영.webp


그리고 시간이 흐른 후...

두 영혼 중 하나가 아르케아의 모든 것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 세계의 창조주가 돌아와, 다시 세계는 안정을 되찾았다.

아르케아는 존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위협을 느낀 세계는 창조주를 불렀고, 창조주는 그 부름에 답했다.
아르케아가 자신의 존재를 위협할 이변을 먹어치울 조각의 감시자를 만들어냈듯이...
그리하여 아르케아의 존재는 지켜졌다.

천 년 이상, 줄곧 존재했다.
스며들었던 붉은 피가 사라져 또다시 순백의 대지만이 남았다.
타이리츠의 몸은 불타 사라져버렸다.

만물에 따스함이 스며들었다. 하늘은 눈부시게 빛났다.

하얗게 반짝이는 무한의 대지가 다시 본 모습을 되찾았다.

실로 아름다운 세계였다.

끝없는 여정의 무대인 이곳에서 안식을 택한 소녀들이 대지를 수놓았다.
얼어붙은 시간 안에 갇혀, 영원히 이 망자의 세계를 바라보길 선택한 소녀들.
그들이 만약 생각이라는 걸 하고 있다면... 아주 머나먼 과거의 기억 뿐일 것이다.

분명 이게 더 나은 선택일테니까.

영원히 걸음을 이어가며 여러가지를 보고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분명 이게 더 나은 선택일테니까...
저 소녀들은 행복할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아르케아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그 선택밖에 없었다.
이 세계는 아직 현실의 봉합선 사이에 갇혀있었기에, 이 곳에서의 탈출은…

아르케아의 바깥은… 아주 머나먼 곳에, 그 누구도 다시는 볼 수 없는 곳에 있었다.

쌍둥이, 검을 든 소녀, 여행자, 귀족, 노래하는 소녀...

모두가 천사의 상이었다.

아르케아의 유리 조각 또한 종종 안식을 취했다.
벽과 기둥을 따라 모여 거대한 형태를 이루곤 했다. 마치 수정처럼.

...마치 부식 얼룩처럼.
신이 관리하는 아름다운 세계. 그 위에서, 히카리는 모든 것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리고 떠올렸다...
옛 세계가 잊어버린 모든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아주 조그마한 따스함과 관심을 품은 눈으로 옛 세계의 기억들을 보았다.
그것은 바래고 무기력한 신에게 있어, 일종의 유희였다.

어쩌면... 자신은 변한 게 아닐까. 예전의 나보다 더 ‘높은’ 존재로.

히카리는 이 소중한 진실을 누군가 이해해주길 바랬다.
하지만 이해해주지 않는다 해도 상관 없었다. 그렇다면 여태껏 해왔던 것처럼 말없이 지켜볼 뿐일테니.

히카리는 조용히 소녀들을 지켜보았다.
저들에게 세상의 ‘전부’를 주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

...히카리의 시야 바깥에서는, 한 철학자가 사역마와 함께 방랑하고 있었다.

히카리의 시야가 닿는 곳에서는, 뿔이 난 여자가 소중한 기억의 조각들을 돌보고 있었다.

오른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꽃이 핀 여자가 고요한 땅을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었다.

허황된 일이다.

아르케아는 이제 그저 허영에 불과했다.

하지만... 차라리 이게 낫다.

자신을 증오하는 세계에서 스스로를 경멸하며 살아가는 것보다는, 이게 훨씬 낫다.

살아간다는 사실 자체를 사랑하며, 허황된 꿈에 굴복하는 것이...
...현실이란 어떻게 보든, 공허하고, 부질없고, 무의미한 것이다.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이 유일하게 원하는 것은 최대한 많은 것을 얻는 것 뿐.

쾌락을 추구하고, 사랑을 꿈꾸고, 희망을 품고, 힘을 갈망하라.

그렇게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다면…

...

더이상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히카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쟁취하고, 살아가고,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를 진실로 사랑하라.

천 년이 지나고, 또다시 천 년이 지나도, 삶에 의미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사랑하라.
결국 현실에는 ‘끝’이 없는 법이니까. 아르케아는 더욱이, 기억을 담아두는 그릇에 지나지 않으니까.

보이지 않는 조용한 기억들을 담아두는 그릇.
안에서는 바깥이 보이지 않고, 그 누구도 모르며, 아무도 돌보지 않는 그릇.

그리고 이 고요 속에 기억들은 살아갈 것이다.

무심한 신, 히카리가 구해낸 망자들의 영혼과 함께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이 세계에서는 떠올리지 못할 기억도, 느끼지 못할 감정도 없으니까.
이게 ‘전부’니까. 이 세계의 빛이 닿는 모든 것이, 빛이 내려준 전부니까.

과거의 삶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행복. 영원한 평온.
히카리는 아르케아를 사랑했다.

편애하지도, 재단하지도 않고 모두에게 평등히 베푸는 아르케아를.

그렇게 운명의 수레바퀴는 계속해서 돌아간다...

...그 어떤 운명도 기다리지 않는 미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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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치판] Nintendo Switch 에디션에서는 Particle Arts가 수록되지 않아 Vindication으로 대체되었다.[2] 원래는 ???였으나 v4.0 업데이트를 기점으로 VS-8로 스토리 번호가 변경되었다.[3] 이 문구를 기점으로 나오는 BGM과 함께, 이후의 문구들은 터치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계속 넘어간다.[4] 참고로 허구한 날 Side Story에서 나오는 하늘이 갈라졌다느니 찢어졌다느니 부서졌다느니 하는 사건이 이걸 가리킨다.[5] 두 곡 중 하나를 해금할 시 F-3, 두 곡 모두 해금할 경우 F-4를 열람하게 된다.[6] 이 문장부터, 터치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재생된다.[7] 이 문구를 기점으로 나오는 BGM과 함께, 이후의 문구들은 터치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계속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