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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년 뉴올리언스 린치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개요2. 배경
2.1. 뉴올리언스의 데이고들2.2. 경찰서장 암살 사건
3. 린치4. 여파

1. 개요

1891년 3월 14일 뉴올리언스의 시민들이 폭도가 되어 11명의 이탈리아인이탈리아계 미국인사적제재로 살해한 사건.

미국 역사상 제일 큰 대규모 린치로 여겨진다.

2. 배경

2.1. 뉴올리언스의 데이고들

당시 뉴올리언스의 이탈리아인은 남북전쟁 이후 흑인을 대신할 노동력으로 유입된 이들이었는데, 데이고(Dago)라는 멸칭으로 불릴 정도로 입지가 나빴다. 시장인 조지프 셰익스피어(Joseph Shakspeare)부터가 이탈리아 혐오 감정을 드러낼 정도였다.

뉴올리언스 내 이탈리아인에 대한 인식을 더 악화시킨 것은 이탈리아계 범죄조직, 즉 마피아의 항쟁이었다. 뉴올리언스 마피아인 프로벤차노(Provenzano) 가문과 마트랑가(Matranga) 가문이 1880년대에 이권 다툼을 벌였는데 이로 인해 마피아라는 이탈리아계 범죄조직이 있다는 것이 뉴올리언스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것이다.

2.2. 경찰서장 암살 사건

1890년 10월 15일, 뉴올리언스 경찰서장 데이비드 C. 헤네시(David C. Hennessy)가 귀가 중 총에 맞아 살해당한다. 존경 받던 경찰이었던 그의 죽음은 뉴올리언스 시민들에게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윌리엄 J. 오코너(William J. O'Connor) 경감[1]이 증언한 헤네시 서장의 유언은 "데이고 놈들이 한 짓이야"였다.

이 증언에 따라 뉴올리언스 전역에서 백여명의 이탈리아인이탈리아계 미국인이 검거되었으며 그 중 19명이 헤네시 서장 살해 혐의로 기소되었다. 헤네시 서장이 형사 시절 이탈리아인 범죄자 주세페 에스포지토(Giuseppe Esposito)를 체포했으며 프로벤차노 가문과 마트랑가 가문의 전쟁에 개입했다는 것 역시 이탈리아계 범죄자들의 복수, 즉 벤데타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가설을 뒷받침했다.

1891년 3월 13일, 19명의 용의자 중 3명은 미결정 심리 판결[2]을 받고 6명은 무죄 판결을 받는다. 이 판결에 용의자들이 범인이라고 믿던 뉴올리언스 토박이들 사이에서 배심원이 매수당했다는 주장이 터져나왔다.

결국, 이 정의를 구현하지 못했다고 생각한 시민들은 자신들이 직접 범죄자를 단죄하기로 한다.

3. 린치

All good citizens are invited to attend a mass meeting on Saturday, March 14th at 10 o’clock AM, at the Clay statue, to take the steps to remedy the failure of justice in the Hennessy case. Come prepared for action.
헤네시 사건 재판 실패 해결을 위해 3월 14일 토요일 오전 10시에 클레이 동상 앞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집회에 선한 시민들을 초대함. 행동이 있을테니 준비하고 올 것.
1891년 3월 14일 뉴올리언스 신문들이 낸 광고

1891년 3월 14일 아침, 뉴올리언스의 신문들이 정의를 되찾기 위해 헨리 클레이 동상[3] 앞으로 오라는 광고를 낸다. 수천명의 시민들이 이 기사에 호응하며 거리에 모였다. 결국 변호사 윌리엄 S. 파커슨(William S. Parkerson)이 이끄는 폭도들이 용의자들이 있는 패리쉬 교도소(Parish Prison)를 습격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급조한 공성추로 교도소 문을 열어젖힌 폭도들은 간수의 제지 없이 11명의 이탈리아인이탈리아계 미국인 수감자들을 살해했다. 이들 중 세 명은 미결정 심리 판결을 받은 사람이었고 세 명은 무죄 선고를 받은 이들이었다. 나머지 다섯 명은 아직 판결이 나오지도 않았었다. 살해된 수감자 중 엠마누엘레 폴리치(Emmanuele Polizzi)와 안토니오 바그네토(Antonio Bagnetto)는 교도소 밖으로 끌려나와 군중 앞에서 목매달렸다. 나머지 8명의 수감자들은 폭도들을 피해 도망치는데 성공했다.

린치가 끝난 후, 파커슨은 폭도들을 귀가시켰다.

4. 여파

CHIEF HENNESSY AVENGED; ELEVEN OF HIS ITALIAN ASSASSINS LYNCHED BY A MOB. AN UPRISING OF INDIGNANT CITIZENS IN NEW-ORLEANS -- THE PRISON DOORS FORCED AND THE ITALIAN MURDERERS SHOT DOWN.
헤네시 서장의 복수: 서장을 암살한 이탈리아인 11명, 군중에게 린치당해. 분개한 뉴올리언스 시민들 감옥 문 강제로 열고 이탈리아 살인자 총살.
뉴욕 타임스, 1891년 3월 15일
NO MERCY WAS SHOWN: Vengeance Wreaked on the Cruel Slayers of Chief Hennessy.
자비는 없었다: 냉혈한 헤네시 서장 살해범들에게 닥친 복수
워싱턴 포스트, 1891년 3월 15일

많은 신문이 피해자들을 "비열하면서도 비겁한 시칠리아인"이나 "마피아"라고 부르며 매도하며 린치를 정당화했다.

주뉴올리언스 이탈리아 영사 파스콸레 코르테(Pasquale Corte)는 이탈리아인 수감자에게 벌어진 린치 사건에 대해 항의했다. 미국 정부는 11명의 희생자에게 약 2,200달러의 배상금을 지급해야 했다.

2019년 4월 12일 라토야 칸트렐(LaToya Cantrell) 뉴올리언스 시장이 이 사건에 대해 이탈리아계 미국인 사회에게 사과했다.


[1] 총성을 듣고 달려와 헤네시 서장의 마지막을 지켰다.[2] Mistral. 배심원단이 공통 의견을 내지 못할 때 나오는 판결로 사실상 무효 판결이다.[3] 당시에는 캐널 거리에 있었는데 1900년에 현재의 위치인 라파예트 광장으로 옮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