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의 기념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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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 뽕나무 | 화양동 느티나무 | 강감찬 생가 터(낙성대) |
서울특별시의 기념물 제2호 | |
화양동 느티나무 華陽洞느티나무 | |
소재지 | <colbgcolor=#fff,#191919> 서울특별시 광진구 화양동 110-34번지 |
분류 | 자연유산 / 천연기념물 / 생물과학기념물 / 생물상 |
수량 / 면적 | 느티나무 1그루, 토지 367.1㎡ |
지정연도 | 1973년 1월 17일 |
관리자 (관리단체) | 광진구 |
화양동 느티나무의 계절별 모습[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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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울특별시 광진구 화양동에 있는 느티나무. 현재 서울특별시의 기념물 제2호로 지정되어 있다.2. 내용
화양 느티나무의 높이는 28m, 줄기 둘레는 3m이고 추정 수령은 약 700년이다.이 느티나무가 서 있는 자리는 조선 세종 때 조정에서 건립하였던 화양정(華陽亭) 터이고, 세종 임금의 태평성대와 단종 곧 노산군(魯山君) 그리고 명성황후(明星皇后) 민씨에 얽힌 사연 등 다채로운 곳이다.
궁궐지(宮闕志)에 따르면 세종은 1432년(세종 14) 이곳 조정 목장의 언덕 위에 정자를 짓고 방목한 말들이 떼 지어 노는 광경을 즐겼다고 했다.
또한, 금석일반(金石一斑)의 기록에 의하면 화양정을 세운지 불과 24년만인 1455년에 삼촌 세조(世祖)에게 쫓겨난 단종이 영월 땅으로 귀양 갈 때 내시 안로(安璐)의 전송을 받으며 하룻밤을 지새운 곳이 바로 이 화양정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곳 화양정에 얽힌 이야기도 구전되고 있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壬午軍亂) 통에 장호원(長湖院)에 피신했다가 돌아온 명성황후는 피난길에 이곳 화양정에서 쉬어 갔었다고 한다. 이때 몰려든 동네 여인들이 가마 문을 열고 “아이고 예쁘기도 해라, 저토록 젊은 여자가 장안에 제 집 두고 민비라는 못된 왕비 북새통에 피난 가나본데 세상이 하도 뒤숭숭하니 언제 다시 돌아올 날 있을라구” 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화양정은 100여 칸 이상이 되고 기둥 둘레도 한아름이 넘는 큰 규모였으나 1911년 낙뢰를 맞아 없어졌다.
현재 화양동 느티나무의 주변에는 느티나무 공원이라는 명칭의 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근방에 화양동 동주민센터가 위치하고 있다.
3. 외부 링크
4.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호
느티나무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 대만, 중국 등의 따뜻한 지방에 분포하고 있다. 꽃은 5월에 피고 열매는 원반모양으로 10월에 익는다. 예전부터 우리나라 마을에는 대개 큰 정자나무가 있었는데 가장 뛰어난 기능을 했던 것이 느티나무였다.
화양동의 느티나무는 7그루가 한 곳에 모여 자라고 있으며, 나이는 700년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는 약 28m이며, 7그루의 총 둘레는 7.5m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곳은 세종(재위 1418∼1450) 때 세워진 화양정이란 정자가 있던 자리로 고종(재위 1863∼1907)의 비인 명성황후가 임오군란(1882) 중에 피난길을 가다 잠시 쉬어간 곳이라 한다.
화양동 느티나무는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의 관심과 보살핌 속에서 지내온 나무이며, 특히 커다란 느티나무는 전국적으로 많이 있으나 이곳처럼 7그루가 한 곳에 모여있는 광경은 보기 드물어 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화양동의 느티나무는 7그루가 한 곳에 모여 자라고 있으며, 나이는 700년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는 약 28m이며, 7그루의 총 둘레는 7.5m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곳은 세종(재위 1418∼1450) 때 세워진 화양정이란 정자가 있던 자리로 고종(재위 1863∼1907)의 비인 명성황후가 임오군란(1882) 중에 피난길을 가다 잠시 쉬어간 곳이라 한다.
화양동 느티나무는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의 관심과 보살핌 속에서 지내온 나무이며, 특히 커다란 느티나무는 전국적으로 많이 있으나 이곳처럼 7그루가 한 곳에 모여있는 광경은 보기 드물어 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1] 사진 출처 - 광진구청 동주민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