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3-15 16:19:48

호르체 전투

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후스파3.2. 보헤미아 가톨릭군
4. 전투 경과5. 결과

1. 개요

후스 전쟁 시기인 1423년 4월 20일, 23일, 또는 27일에 얀 지슈카가 이끄는 후스파 군대가 바르텐베르크의 체네크가 이끄는 가톨릭군을 격파한 전투.

2. 배경

1419년 후스 전쟁이 발발한 이래, 후스파는 얀 지슈카의 지휘하에 네크미르 전투, 수도몌르 전투, 비트코프 전투, 쿠트나 호라 전투 등 여러 전투에서 지기스문트가 이끄는 십자군을 잇달아 무찔렀다. 결국 십자군은 보헤미아 공략을 포기하고 철수하였고, 후스파는 보헤미아 전역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외부의 적을 물리치고 난 뒤, 후스파 내부에서 분열이 발생했고, 급기야 후스파의 종교적 지도자였던 얀 젤리브스키 사제가 정적들의 선동으로 인해 처형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얀 지슈카 역시 양형파로부터 군사적 권위를 도전받았다.

후스파가 이렇듯 내분에 시달리는 틈을 타, 보헤미아 내 가톨릭 세력이 다시 준동하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는 바르텐베르크의 체네크가 있었다. 그는 이친 시와 벨리스 성의 영주로, 보헤미아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으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 1413년 얀 후스의 추종자가 되어 은신처를 제공하였고, 1415년 얀 후스 화형에 항의하는 편지를 452명의 체코 및 모라비아 귀족과 함께 지기스문트에게 보냈다. 1419년 지기스문트가 보헤미아 왕이 되자, 이에 반발하여 얀 지슈카와 힘을 합쳐 지기스문트에 대항했다.

그러나 1420년 6월 지기스문트가 프라하를 압박해 들어가자, 체네크는 지기스문트에게 귀순하여 후스파와 대적했다. 지기스문트가 비트코프 전투에서 패한 뒤 철수하자, 그는 1421년 5월 도로 후스파가 되어 얀 지슈카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다. 이후 1421년 6월에 설립된 보헤미아 잠정 정부의 일원이 되었으나, 1421년 12월 지기스문트가 쿠트나 호라에 입성하자 지기스문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가톨릭에 귀의했다. 이후 그는 보헤미아 내 카톨릭 세력의 핵심 인물이 되어 후스파에 대항했다.

얀 지슈카는 이렇듯 배신을 밥먹듯이 하며 가톨릭 진영의 핵심 인물이 된 그를 가만히 놔둬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1423년 4월 10일, 그는 군대를 이끌고 이친 시로 진격하면서, 체네크의 영주민들을 상대로 약탈했다. 체네크는 적군을 막기 위해 이친 시 외곽의 호르체 평원에 전 병력을 집결하였다. 이윽고 1423년 4월 20일, 23일 또는 27일[1]에 얀 지슈카의 군대가 호르체에 도착하면서, 전투가 임박했다.

3. 양측의 전력

3.1. 후스파

3.2. 보헤미아 가톨릭군

  • 지휘관: 바르텐베르크의 체네크
  • 병력: 기록이 미비해서 정확한 숫자를 알 수 없으나, 후스파보다 약간 적은 숫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4. 전투 경과

전투 당일, 얀 지슈카는 성 베드로 교회가 세워진 언덕 위에 바겐부르크 120대를 세워놓고, 적 기사들이 말에서 내려 언덕에 기어오를 때 핸드 캐논을 쏘며 버텼다. 체네크는 고지에 있는 바겐부르크를 향해 대포를 쐈지만, 조준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모조리 빗나갔다. 이후 기사들이 바겐부르크를 뚫지 못하고 고전하다가 지쳐버리자, 지슈카는 기병 300명과 함께 출격하여 적을 언덕 아래로 도로 내쫓아 버렸다. 결국 전의를 상실한 가톨릭군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후스파가 승리를 거뒀다.

5. 결과

호르체 전투의 사상자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지만, 19세기 체코 역사학자 프란티셰크 팔라츠키(František Palacký, 1798.6.14~1876.5.26)가 저술한 '고대 체코 연대기'에 따르면 체네크는 모든 대포와 기마를 잃고 소수의 측근과 함께 전장에서 탈출했다고 한다.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기록이 미비해서 확인이 어렵지만, 체네크가 얼마 안가 보헤미아 잠정 정부에 재출석한 걸 보면 후스파에 도로 귀순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1425년 9월 17일 벨리시 성에서 흑사병에 걸려 사망했다.

얀 지슈카는 호르체 전투 승리를 통해 자신의 입지를 굳건히 다졌다. 얼마 후 보헤미아에 대한 새로운 십자군이 준비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타보르파와 양형파는 6월 24일 코노피슈티에서 동맹을 체결하여 십자군에 맞설 태세를 갖췄다. 하지만 십자군은 얼마 안가 흐지부지되었고, 후스파 내부에서 재차 분열이 일어났다. 양형파의 지배를 받던 흐라덱코라로브가 타보르파 지지를 선언하자, 얀 지슈카는 흐라덱코라로브로 진군하여 1423년 8월 4일 흐라덱코라로브 인근의 스트라초프 농장에서 양형파를 격파했고, 1424년 1월 스칼리스 전투에서 재차 승리하고, 6월 말레소브 전투에서도 양형파 군을 격파했다.

그후 1424년 9월 프라하에 입성한 뒤 타보르파 중심의 정부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이리하여 후스파 사이의 내전을 종식시킨 뒤, 얀 지슈카는 모라비아 원정을 준비하였으나 1424년 10월 11일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 후스파 십자군은 이 기회를 틈타 보헤미아를 침공하면서 아우시크 전투가 발발했다.


[1] 호르체 전투의 전투 날짜가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한 기록에는 전투가 성 베드로 축일 전날 화요일에 벌어졌다고 하며, 또다른 기록에는 성 이르지의 날에 벌어졌다고 하며, 다른 기록에는 성 이르지 후 화요일에 벌어졌다고 한다. 이에 따른다면, 전투는 4월 20일(성 이르지 축일), 23일(성 베드로 축일 이전 화요일), 또는 27일(성 이르지 후 화요일) 중에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