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Haroutune Krikor Daghlian Jr.맨해튼 계획에 참가한 미국의 물리학자.[1]
2. 생애
그는 1921년 5월 4일 코네티컷에서 태어나 1938년 17살에 MIT에 들어간 수재였다. 1942년 학사 학위를 받고 퍼듀 대학교 인디애나 캠퍼스에서 입자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준비 중이었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것은 1944년부터였다.운명의 그 날인 1945년 8월 21일[2] 그는 미국의 로스 앨러모스 국립 연구소에서 실험에 쓰일 탄화텅스텐(tungsten carbide) 벽돌을 나르고 있었다. 이 벽돌은 중성자 반사재로, 플루토늄을 이용한 실험에 쓰일 예정이었다.
카바이드 벽돌로 둘러싸인 플루토늄 구. 사고 재연차 찍은 것이다.[3]
그런데 그 벽돌이 우연히 6.2kg짜리 플루토늄-갈륨 합금 덩어리인 코어 위를 통과하자 경보장치가 울렸다. 그는 벽돌을 다른 곳으로 치웠지만 운 나쁘게도 그 벽돌이 플루토늄 위로 떨어졌다! 분명히 임계질량[4] 미만의 플루토늄 덩어리였으니 원래대로라면 아무 일도 없어야 하겠지만 벽돌이 중성자 반사재 역할을 했기에 핵 연쇄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재빨리 벽돌을 치웠으나 이미 때는 늦었고 5.1 시버트의 피폭을 당해 집중 치료를 받았으나 증상이 악화되어 25일 후인 1945년 9월 15일에 사망했다. 겨우 스물넷의 젊은 나이였다.[5]
영어 위키백과에 피폭 9일 후 그의 오른손을 찍은 사진이 올라와 있는데 도카이 촌 방사능 누출사고의 피폭자인 오우치 히사시, 시노하라 마사토처럼 피부 허물이 들떠서 흉측해졌다.[6] 이건 방사능 피폭으로 직후 그의 염색체가 모조리 부서져나가 더이상 몸에서 세포분열을 못 해서 새로운 세포를 재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플루토늄 코어에 손을 가까이 가져갔으니 손에 더 많은 피폭을 당했을 것이다. 그는 키가 190cm가 넘고 체구가 엄청나게 큰 젊은이였으나 대량의 방사선 피폭 앞에서 그런 건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그러나 이 사건 후에도 미국은 여전히 사람 손으로 실험을 진행했는데 이는 또 다른 임계사고를 부르고 말았다. 루이스 슬로틴 문서 참고.
3. 기타
문제의 플루토늄 코어는 루이스 슬로틴 문서에 서술된 또다른 초임계사고에서도 사용되었고 결국 \'Demon Core'라는 별명이 붙었다.1946년 7월 1일 비키니 섬 핵실험 중에 "Operation Crossroad"의 3번 핵폭탄 Charlie에 담아져 폭발할 예정이었으나 Charlie 실험이 취소되면서 회수되어서 나중에 다른 코어를 만들 목적으로 분해되었다가 결국 비키니 섬 핵실험의 첫 번째 핵폭탄인 Able에 사용되어 소모되었다.
[1] 최종학력은 물리학 학사[2]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가 일어난 지 각각 15일과 12일 만이었다.[3] 사진 사용 조건에 따라 다음 사항을 명기함: Unless otherwise indicated, this information has been authored by an employee or employees of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operator of the Los Alamos National Laboratory under Contract No. W-7405-ENG-36 with the U.S. Department of Energy. The U.S. Government has rights to use, reproduce, and distribute this information. The public may copy and use this information without charge, provided that this Notice and any statement of authorship are reproduced on all copies. Neither the Government nor the University makes any warranty, express or implied, or assumes any liability or responsibility for the use of this information.[4] 순수한 플루토늄의 경우 5.6 kg[5] 사실 5.1시버트 피폭 시에는 집중치료를 받으면 (확실히 보장은 못 하지만) 충분히 생존을 기대할 수 있다. 따라서 집중 치료를 한 것이 완전히 무의미하지는 않았겠지만 당시에는 급성 방사선 피폭에 대한 의학적 연구가 충분하지 않아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부터 반세기 후 도카이 촌 방사능 누출사고에서는 이전 사례들과 의료기술 발전 덕에 더그힐란의 3.5배가 넘은 무려 18시버트의 피폭을 당한 오우치 히사시(大内 久)를 역시 더그힐란의 3.5배가 넘은 83일간 생존이 아닌 연명을 시킬 수 있었다.[6] 이 사진은 흑백이라 오우치나 시노하라의 사진보다는 그나마 조금 덜 끔찍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