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그리스 강을 끼고 있는 구도심의 수몰 전 사진
튀르키예어, 영어 Hasankeyf
아랍어 حصن كيفا
쿠르드어 Heskîf
아르메니아어 Հարսնքվ
라틴어 Cepha
1. 개요
터키 동남부 바트만도에 위치한 유서 깊은 도시. 기원전 9천 년경의 주거 유적이 발견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그 후로도 현재까지 꾸준히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주요 도시로서 기능한 역사성을 지닌다. 지명은 시리아어로 돌을 의미하는 ܟܐܦܐ (케파)에 아랍어로 요새를 의미하는 حصن (하산)이 더해진 것에서 유래되었다. 우연의 일치로 현대 터키어로는 하산(Hasan, 남성 이름), 즐거움(keyif) 두 단어의 복합 명사로도 볼 수 있기 때문에 이거 가지고 개드립 치는 투란주의자들도 있긴 하다. 현재 인구는 5천여 명이다. 최근 이색 여행지로 터키 동부가 유명해지며 한국인 여행객들도 종종 방문했으나... 댐 건설로 인해 성채를 제외한 기존 도심이 수몰되어 버렸다. 다만 주요 유적들이 3km 떨어진 북쪽의 고지대로 옮겨졌다.세계테마기행 하산케이프 부분
하산케이프의 하맘(터키탕) 이전
2. 역사
옛 다리
상고대에 후르리인들의 거주지가 발견되었으며, 그들이 세운 미탄니의 일부였던 하산케이프는 히타이트를 거쳐 신아시리아 제국령이 되었다. 기원전 700년경 하산케이프는 당시 북부 메소포타미아에서 하란과 함께 주요 도시였다. 이후 아시리아 멸망 후 메디아와 그를 계승한 아케메네스 제국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고 헬레니즘기를 거쳐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로마식으로 케파 혹은 키파스로 불린 이곳은 사산 제국에 대항하기 위한 리메스(방어선)의 일부였으며 콘스탄티우스 2세 때에 요새화되었다.
363년, 로마의 율리아누스 황제가 이란 원정 중 전사하자 뒤를 이은 요비아누스는 사산 제국에게 메소포타미아 속주 대부분을 할양하였는데[1] 케파 요새는 할양 대상인 아르자네네[2]에 속했음에도 티그리스강 남안이라 로마령으로 남았다. 이로써 케파는 메소포타미아에 위치한 로마령 도시 중 가장 동쪽에 위치하게 되었으며, 사산 제국을 향한 로마의 교두보로서 제2 파트리카 군단이 주둔하게 되었다. 군단 도시가 되면서 인구가 늘어난 케파는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 주교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2005-08년의 구제 발굴 때에 로마식 성문과 상점가 유적 및 모자이크가 발견되었다.
동로마 제국 시대에 도시는 그리스어 발음인 키파스로 불리게 되었다. 7세기 초반, 로마-페르시아 간의 마지막 대전쟁에서 키파스는 사산 제국에게 점령되었으나 628년경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로마군에 의해 수복되었다. 하지만 30년간의 전쟁으로 두 제국 모두 쇠약해진 틈에 이슬람의 기치하에 단결한 아랍인들은 638년경 메소포타미아 대부분을 석권한 후 640년, 아르메니아로 진격하기 위해 다리가 놓여 있는 키파스를 점령하였다. 이후 우마이야 왕조, 압바스 왕조, 함단 왕조 등의 통치를 받은 히신 카이파는 현재 터키인의 조상인 셀주크 제국령이 되었다. 이후 셀주크 술탄 말리크 샤는 히신 카이파를 아르투크 왕조에게 맡겼다.
2.1. 전성기
1150년경 세워진 중세 시기 다리
아르투크 왕조 시대 지어진 하맘
1104년, 하란 전투에서 십자군을 격파한 아르투크조의 소크만은 생포한 에데사 백작국의 후계자 조슬랭을 히신 카이파에 감금하였다. 아르투크조는 1150년경, 현재까지 장엄한 규모의 유적으로 남아있는 석조 다리를 건설하였고[3] 이로써 히신 카이파는 아르메니아, 완호, 디야르바크르, 모술 일대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 번영기를 누렸다. 1176년에 아이유브 왕조는 아르투크 왕조를 복속시켰다. 1198년, 아르투크조는 디야르바키르를 점령하였고 그곳으로 수도를 옮겼다. 한편, 히신 카이파의 아르투크 지배자 루큰 앗딘 마두드는 호라즘 제국의 마지막 술탄 잘랄 웃딘 밍부르누와 동맹하여 아이유브 왕조에 저항하기도 하였다(1230년경).
1232년, 아르투크조를 응징하기로 한 아이유브 술탄 알카밀은 대군을 모아 북진하였다. 디야르바키르는 잠깐의 포위 10월 5일에 포위되었고 준비가 안 되어 있던 아르투크조의 베이 알마수드는 18일에 항복하였다. 이후 알카밀은 동생 알아슈라프를 히신 카이파로 파견하였다. 수비대는 주군인 알마수드의 설득에도 며칠간 저항하였으나 11월에 항복하였다. 이후 히신 카이파의 총독이 된 카밀의 아들 앗살리흐는 그곳에 큰 궁전을 지었고 (당시 기준으로도 한 세기가량 된) 낡은 다리를 보수하였다. 1235년, 룸 술탄국이 샨르우르파(에데사)와 하란을 함락하고 남하하였으나 디야르바키르에서 저지당하며 이곳까지 이르진 못하였다.
1237년, 알카밀이 사망하였다. 그는 차남 알아딜에게 이집트, 장남 앗살리흐에게 자지라(북부 메소포타미아)를 맡겼다. 앗살리흐는 아들 알무아잠(투란샤)에게 자신이 맡았던 히신 카이파 총독위를 맡겼고 자신은 동생 알아딜과의 내전에 돌입하였다. 1240년, 알아딜을 사로잡고 승리한 앗살리흐는 아이유브 왕조의 단독 술탄이 되었으나 1249년에 요절하였다. 이에 알무아잠은 섭정 샤자르 앗두르의 소환에 이집트로 향하였고, 그의 아들인 알무와히드가 히신 카이파의 총독이 되었다. 이때의 권력 구조에서 히신 카이파는 아이유브 왕조의 후계자가 거쳐 가는 도시였다.
2.2. 몽골(일 칸국)의 지배
언덕 위의 시타델과 묘지
1258년경 히신 카이파를 방문한 이즈 앗딘은 시내에 궁전과 사원 외에도 3개의 마드라사, 4개의 하맘, 영묘, 카라반사라이, 바자르 등이 있고 언덕의 시타델에도 사원과 광장, 그리고 주민들을 몇 해간 먹일 곡식을 키울 수 있는 밭이 있다고 서술하였다. 한편, 20년 이상 평화를 누리던 도시에 전운이 드리웠다. 1258년 2월에 13일에 바그다드를 함락한 몽골군이 1260년 1월 24일에 알레포, 3월 1일엔 다마스쿠스까지 함락하고 북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비록 훌라구 칸은 몽케 카안의 부고를 듣곤 타브리즈로 후퇴하였지만 그 경로상에 있던 마야파리킨(실반)을 함락하였다(4월 23일). 이로써 자지라 일대에서 아르투크조의 마르딘과 아이유브조의 히신 카이파만이 몽골의 영토가 아니게 되었다.
1260년 말, 마르딘 역시 몽골군에게 점령되었고 홀로 몽골 제국에 포위된 알무와히드는 결국 훌라구 칸에게 복속하였다. 한편,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몽골군을 격파하고 맘루크 왕조의 술탄이 된 바이바르스는 1267년경 무와히드에게 2명의 환관을 파견하여 대몽골 동맹을 제의하였다. 이에 무와하드는 동의하였는데, 그만 이집트로 돌어가던 사절단이 몽골군에게 사로잡혔다. 당시 일 칸국의 아바카 칸은 무와히드를 소환하였고 7년간 그를
2.3. 중근세
한편 1330년대 들어 일 칸국은 분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 틈에 마르딘의 아르투크 왕조가 히신 카이파를 침공하였으나 대패하였다(1334년경). 이후 영토 확장에 나선 아이유브 가문의 아미르 알아딜은 마야파리킨을 점령하고 인근 쿠르드 부족장 지르키[5]를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1335년 일 칸국이 붕괴하자 아이유브조는 아르젠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고 동쪽으로 50km 떨어진 시이르트를 점령하였다(1342년경). 1349년에는 경쟁 도시 아르젠을 함락, 성벽을 허물고 도시를 파괴하였다.[6] 이번에도 도움을 준 쿠르드족에게 통치권을 넘겼다.
하지만 연이은 군사 원정과는 별개로 1350년경부터 히신 카이파의 아이유브조는 급부상한 흑양 왕조에게 조공하였다. 1455년에는 백양 왕조의 우준 하산에게 충성하며 아이유브 가문은 지속적으로 도시를 지배할 수 있었다. 히신 카이파는 그의 수도인 디야르바키르 외에 하산에게 충성한 첫 도시였다고 한다.
6개월간의 포위 끝에 도시는 함락되었고 200여 년간 이어져 오던 아이유브 왕가는 축출되었다(1462년). 이후 우준 하산의 아들 제이넬 베이가 히신 카이파의 총독이 되었다. 하지만 백양 왕조는 1473년의 오툴루크벨리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에게 패배하였고 이때 제이넬 베이 역시 전사하였다. 그를 기리기 위한 영묘가 이듬해 히신 카이파에 세워져 현재에 이른다. 1490년대 들어 백양조는 내분에 시달렸고 자지라는 1504년 무렵 이스마일 1세의 사파비 제국령이 되었다. 하지만 1517년, 그는 찰디란 전투에서 셀림 1세에게 대패하였고 이후 히신 카이파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