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한도신(韓道信) |
이명 | 탄실이 |
생몰 | 1895년 7월 5일 ~ 1986년 2월 19일 |
출생지 |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신흥리 |
사망지 | 서울특별시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한도신은 1895년 7월 5일 평안남도 대동군 고령면 신흥리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915년 20살 때 김예진(金禮鎭)과 결혼했고 1919년 2월 말 재봉틀로 태극기를 만들어 평양에서 3.1 운동을 주도한 남편을 도왔다. 남편에 체포되어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를 때 옥바라지를 해줬고, 남편이 출옥 후 만주로 망명할 때 함께 했다. 이후에도 독립운동에 적극 뛰어든 남편을 뒷바라지 하면서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고, 한 번은 일본 순사에게 체포되어 고문받기도 했다.하지만 그녀는 이에 굴하지 않고 남편을 도왔다.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해 임시정부에 송금했고, 임시정부 요원에게 은닉처를 제공하기도 했다. 1920년 8월 남편이 참여한 평안남도 도청 폭탄 투척에 사용할 폭탄을 직접 옮기기도 했으며, 1922년 남편과 함께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안창호, 여운형 등 주요 요인들을 보필했고 기독교여자절제회를 조직해 상하이 한인들의 생활 개선과 독립의식 고취 활동을 전개했다. 1925년 상하이에서 임시정부에 인구세를 납부했고, 1926년 평안남도 도청 폭탄투척 사건으로 체포된 남편의 석방을 위해 평양으로 돌아와 구호 활동을 했다.
1928년 12월 2일 남편이 석방된 후 7년간 시골 교회를 7번이나 옮기며 목회 활동을 펼쳤으며, 수차례의 예비 검속을 당하고 극도의 빈곤으로 곤경에 처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삯바느질, 고무공장 직공 등 여러 직업에 종사했다. 그녀는 자녀교육이 가장 중요한 책무라 믿으며 두 가지 신조를 지키려 노력했다. 첫째는 무엇보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살아서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핏줄이 이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건강해야 하고 건강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먹는 일에 조심해서 영양을 잘 섭취해야 했다.
두번째 신조는 모든 이가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람은 많이 배우고 배운 것을 바로 행해야 한다. 아는 것이 힘이기에 배우지 못하면 이 무서운 경쟁사회에서 이길 수 없고 또 이기지 못하면 바른 역사를 이어가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녀는 극도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식들을 배불리 먹이고 교육을 잘 받게 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한편 개신교 신앙이 투철했던 그녀는 일제 말기 신사참배를 거부했다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8.15 해방 후 경교장에서 김구를 모셨다가 백범 김구 암살사건을 목도해야 했고, 1950년 6.25 전쟁 발발 후 남편 김예진이 조선인민군에게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에 굴하지 않고 혼자 힘으로 슬하의 2남 2녀를 훌륭하게 길려내 1963년 서울시로부터 모범 어머니상을 수여받았다. 그녀는 1962년부터 15년간 지난 삶을 되짚으며 기록했는데, 그 분량이 원고지 1,200매에 달했다. 그녀의 회고록 <꿈갓흔 옛날 피압흔 니야기>는 1979년에 발간되었다.
한도신은 1986년 2월 19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에 그녀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