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진주 하씨 |
출생 | 1900년 9월 28일 |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 |
사망 | 1967년 2월 4일 |
경상남도 창녕군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795호 |
종교 | 천주교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하찬원은 1900년 9월 28일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에서 태어났다. 그는 보성학교 졸업생인 구중회가 창녕군에 내려와 만세시위 계획을 도모할 때 가담하여 결사대 24인 중 한 사람으로 뽑혔다. 하지만 그는 처가가 있는 경상남도 함안군에 들렀다가 그곳에서 벌어진 독립만세시위에 가담했기 때문에, 창녕군에서의 만세시위는 그를 제외한 23인의 결사대에 의해 주도되었다.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하찬원은 함안군에서 조한휘(趙漢輝), 이희석(李喜錫), 한종순, 이찬영(李讚榮)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시위에 가담해 2천 명의 군중 선두에 서서 만세를 부르며 함안 경찰주재소로 행진했다. 이때 그곳에서 경찰을 지휘하던 마산경찰서장 키타무라(北村)와 이곳 경찰들이 오만한 태도로 나오자, 격분한 군중들은 몽둥이와 돌을 들고 주재소에 진입해 공문서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한 후 경찰관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배부하면서 만세를 부르라고 강요했다.
그러나 경찰관들이 무시하자, 군중은 이들에게 주먹세례를 가했고, 다시 군청으로 행진해 군수 민인호(閔麟鎬)를 붙잡아 제복과 제모를 벗긴 후 독립만세를 부르게 했으며, 등기소로 몰려가 이를 파괴하고 우편과 일본인 소학교를 습격했다. 그러나 마산 중포병대대 일본군 16명과 일본 경찰의 합동 진압작전에 밀린 그들은 해산했고 많은 주동자들이 체포되었다. 이때 하찬원 역시 체포되었고, 1919년 5월 2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소요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곧 공소를 취하하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향에서 조용히 지냈으며, 1967년 2월 4일에 별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하찬원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1999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