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르투갈령 실론 Ceilão Português පෘතුගීසි ලංකාව போர்த்துக்கேய இலங்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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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기 | 국장 | ||||
| <nopad> | |||||
| 1597년 ~ 1658년 |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 코테 왕국 | 네덜란드령 실론 | ||||
| 자프나 왕국 | |||||
| 시타와카 왕국 | |||||
| 위치 | 스리랑카 해안선 | ||||
| 수도 | 콜롬보 | ||||
| 정치 체제 | 식민지 | ||||
| 국가원수 | 포르투갈 국왕, 도독 | ||||
| 공용어 | 포르투갈어[공식], 싱할라어, 타밀어 | ||||
1. 개요
스리랑카에 존재했던 포르투갈 제국의 식민지이다.2. 역사
포르투갈은 바스코 다 가마의 항해 이후 인도 항로를 개척하면서 인도양의 향신료 무역을 장악하기 위해 각지에 거점을 세웠는데, 당시 실론은 특히 계피 생산지로서 전략적 가치가 높았다. 1505년 로렌수 드 알메이다가 실론 해안에 도착했을 때, 섬의 대부분은 캔디 왕국, 코테 왕국, 자프나 왕국 등 여러 토착 왕국들로 분열되어 있었으며, 포르투갈은 처음부터 이를 이용해 세력 확장을 꾀했다. 알메이다는 코테 왕국의 국왕 비라 파후\와 접촉해 외교 및 무역 협정을 맺었고, 포르투갈은 향신료 무역의 독점권과 함께 트리부트(조공) 형식의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그러나 포르투갈이 점차 군사적 개입을 강화하고 가톨릭 선교를 전면에 내세우자, 실론 내에서는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은 1518년 콜롬보에 요새를 건설하며 영구적인 거점을 마련했고, 이를 통해 향신료 무역의 중심을 장악했다. 이후 코테 왕국 내부의 왕위 분쟁과 외세 의존이 심화되면서 포르투갈의 영향력은 점점 확대되었고, 1550년대에는 코테 왕국의 상당 부분이 사실상 포르투갈의 보호령처럼 변했다. 그 과정에서 포르투갈은 토착 귀족 세력을 회유하거나 제거하며 행정적 통제를 강화했으며, 동시에 가톨릭 선교사들을 대거 파견해 불교 중심의 사회에 기독교적 가치관을 주입하려 했다. 특히 예수회, 프란치스코회 등의 선교 활동은 실론 남서부 해안 지역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많은 토착 귀족들이 정치적 생존을 위해 명목상이라도 개종했다. 그러나 캔디 왕국과 자프나 왕국은 포르투갈의 지배에 완강히 저항했다. 캔디 왕국은 험준한 내륙 지형을 바탕으로 포르투갈의 군사적 침공을 수차례 격퇴했고, 자프나 왕국은 북부 지역에서 타밀 문화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려 했다. 포르투갈은 이러한 저항을 제압하기 위해 여러 차례 원정을 단행했으며, 1560년대 이후에는 실론 전체를 군사적으로 정복하려는 야심을 드러냈다. 1597년 코테 왕국의 마지막 국왕 도나 주앙 다르마팔라가 자식 없이 사망하자, 그가 남긴 유언에 따라 그의 영토가 포르투갈 왕에게 상속되었고, 이로써 실론의 서남부는 공식적으로 포르투갈령 실론이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법적 합병은 실제 통제와는 달랐으며, 캔디 왕국은 여전히 강력한 독립세력으로 존재했고 포르투갈의 통치는 주로 해안 지역에 한정되었다. 포르투갈은 콜롬보, 네곰보, 갈레, 자프나 등에 요새를 건설하며 해상 무역로와 향신료 생산지를 확보했지만, 내륙에서는 반란과 저항이 끊이지 않았다. 그들은 무역과 행정뿐 아니라 종교적 측면에서도 깊이 개입하여 불교 사원을 파괴하거나 기독교 성당을 세웠고, 토착 문화의 억압과 강제 개종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정책은 현지인의 반감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캔디 왕국은 17세기 초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와 손을 잡게 되었다. 당시 네덜란드는 포르투갈의 인도양 무역 독점을 무너뜨리기 위해 실론을 전략적 목표로 삼고 있었으며, 1602년 이후 여러 차례 포르투갈 세력과 충돌했다.
1580년 포르투갈 왕위 계승 위기 이후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 아래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이베리아 연합을 이루었지만, 해군력이 약해 식민지를 제대로 방어하지 못했다. 네덜란드는 스페인과의 독립전쟁 중이었고, 포르투갈 식민지를 공격하여 향신료 무역을 장악하려 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실론의 캔디 왕국과 손잡고 1638년 조약을 체결, 포르투갈을 몰아내는 대신 무역 독점권을 얻기로 했다. 연합군은 1639년 바티칼로아, 1640년 네곰보와 갈레를 차례로 점령했지만, 캔디는 네덜란드가 새로운 식민 세력으로 자리잡으려는 의도를 의심하며 동맹이 깨졌다. 이후 양측은 충돌과 재협상을 반복했고, 1649년에 다시 동맹을 맺었다.
1640년 이베리아 연합 해체와 1648년 네덜란드–스페인 평화로 네덜란드는 군사력을 실론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1652년 이후 네덜란드와 캔디는 포르투갈을 공격했고, 1655년 콜롬보 포위를 시작했다. 캔디의 라자싱하는 도시를 자신들에게 넘기라고 요구했으나, 1656년 콜롬보 함락 후 네덜란드는 이를 거부하고 캔디와 적대 관계가 되었다. 캔디군은 콜롬보 주변을 약탈한 뒤 내륙으로 물러났고, 양측의 충돌은 이후 100년 가까이 이어졌다. 1658년 포르투갈군이 완전히 축출되면서 실론은 네덜란드령 실론으로 재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