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덜란드령 실론 Nederlands-Ceylon ලන්දේසි ලංකාව ஒல்லாந்து சிலோ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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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기 | 국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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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40년 ~ 1796년 |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 시타와카 왕국 | 영국령 실론 | ||||
| 포르투갈령 실론 | |||||
| 위치 | 스리랑카 해안선 | ||||
| 수도 | 갈레(1640–1658) 콜롬보(1658–1796) | ||||
| 정치 체제 | 식민지 | ||||
| 국가원수 |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사장 | ||||
| 공용어 | 네덜란드어[공식], 싱할라어, 타밀어 | ||||
1. 개요
1640년부터 1796년까지 스리랑카 실론 섬에 위치했던 네덜란드령 식민지이다.2. 역사
포르투갈의 침략을 막아내기위해 캔디 왕국은 네덜란드와 동맹을 맺었다. 1638년 라자싱헤 2세와 칸디안 조약을 체결한 네덜란드인들은 곧 공동의 적과의 전쟁에 돌입했다. 그러나 포르투갈 세력이 점차 축소되자 라자싱헤 2세는 네덜란드가 강해지는 것을 염려하였다. 그래서 네덜란드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에게 접근하였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프랑스의 거점을 점령해 프랑스를 스리랑카에서 몰아내버렸다. 그 후 네덜란드 육해군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실론 섬 일부 지역에서 포르투갈을 몰아냈다. 1640년 2월, 콜롬보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포르투갈의 네곰보 요새가 필립 루카스에게 함락되고, 포르투갈의 유일하게 남은 거점인 갈레가 점령당하자 포르투갈은 완벽하게 스리랑카에서 몰아냈다.그 후 네덜란드는 착실하게 점령한 지역을 유지한 다음 점차 영토를 넓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캔디 왕국이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내륙과는 달리 섬의 해안선과 항구들을 중심으로 통치기구를 세워 상업적 독점을 구현하려 했고, 특히 계피)를 비롯한 향신료의 채취·가공·무역을 엄격히 통제하면서 왕실·지방귀족·상인 네트워크를 재편성해 막대한 수익을 본국으로 송환하는 구조를 확립했다. 식민 당국은 단순한 무역 지배에 그치지 않고 식민 행정의 도입, 토지·노동 조직의 변형, 법체계와 세제의 정비를 통해 현지 사회경제 질서를 바꾸어 놓았다: 토착 지배층의 권위를 침식시키고 요새를 중심으로 한 유럽식 관청과 항만 행정을 배치했으며, 향신료 채취지에는 외부 노동력을 동원하고 때로는 노역과 노예제도를 이용하여 생산성을 확보하려 했다. 해안 통제에 의해 네덜란드는 무역망을 지배하면서 갈레, 콜롬보, 네곰보, 트린코말리 등 전략적 항구를 중심으로 요새를 건설하고 해군력을 유지해 외국선과의 충돌을 관리했으며, 이 과정에서 네덜란드는 실론을 자사의 인도·동인도 무역망과 연결하는 거점으로 만들고, 코로만델 연안과의 연계로 인력·자본·상품의 흐름을 조직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실론 통치는 여러 내부적·외부적 한계를 드러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본국과의 관료적·재정적 연결고리 속에서 이윤 극대화를 최우선으로 삼았기 때문에 지배의 폭이 해안과 상업지역에 집중되었고 캔디 왕국과의 관계는 끊임없는 협상·충돌·휴전의 반복으로 특징지어졌으며, 캔디는 내륙의 지형적 이점을 바탕으로 외세의 직접 통치를 회피하며 자주 독자적 정책을 펴나갔다
1793년 프랑스 혁명전쟁이 발발하자 영국과 네덜란드 공화국은 프랑스 공화국에 맞서 참전했지만, 1794~1795년 겨울 프랑스군이 네덜란드를 점령하고 그 영토에 바타비아 공화국을 세웠다. 영국은 프랑스의 영향력이 네덜란드 식민지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1795년 1월 19일 바타비아 선박을 나포하고 식민지를 중립화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2월 9일 결국 영국과 바타비아 공화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이 소식이 동인도 지역에 전해지는 데는 몇 달이 걸렸고, 그동안 영국과 프랑스 해군은 인도양에서 무역로 통제를 놓고 교전 중이었다. 프랑스 함대가 모리셔스에 봉쇄된 상태였기에 영국은 네덜란드령 실론 공격에 해군력을 집중할 수 있었다. 당시 네덜란드는 실론 전역을 지배하지 못하고 콜롬보와 트린코말리 등 해안 요새를 중심으로 식민지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특히 트린코말리는 벵골만 무역로를 위협할 수 있는 전략적 항구였다. 이에 마드라스 총독 로드 호바트는 해군 사령관 피터 레이니어와 협의해 실론 침공을 명령했다.
육군 지휘관 제임스 스튜어트 대령은 영국군 및 인도인 병사 등 약 2,700명의 병력을 이끌었고, 레이니어는 HMS 서퍽과 HMS 센튜리온 등 함선으로 이를 지원했다. 두 사람은 네덜란드령 총독 요한 판 안헬베이크가 평화적으로 영국군의 점령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기대했으며, 런던 망명 중이던 오라녜 공 윌리엄이 식민 당국에게 영국과의 협력을 촉구했다. 영국 대표 애그뉴 소령이 콜롬보에 파견되어 협상을 시도한 결과 트린코말리 인근 요새에 300명의 영국군이 상륙하는 데 합의가 이루어졌으나, 8월 1일 트린코말리에 도착했을 때 현지 네덜란드 지휘관이 명령문 해석 문제를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이틀간 협상이 이어지는 동안, 영국 프리깃 HMS 디오메드가 항만 내 암초에 부딪혀 침몰하며 대량의 군수품을 잃는 사고까지 발생했다.
1795년 8월 3일, 협상이 결렬되자 피터 레이니어 제독과 제임스 스튜어트 대령은 트린코말리 침공을 명령했다. 9월 이후 레이니어는 대부분의 함대를 바타비아 작전에 투입하고, 앨런 가드너 함장이 콜롬보 봉쇄를 계속했다. 1796년 1월 조지 키스 엘핀스톤 제독이 인도양 함대를 지휘하게 되면서 HMS 스테이트리와 HMS 애로건트가 지원에 나섰다. 2월 스튜어트는 가드너의 지원을 받아 콜롬보 공격 작전을 시작했고, 2월 5일 네곰보에 상륙해 14일 콜롬보에 도착했다. 영국군은 즉각 항복을 요구하며 공격 준비를 했으나, 2월 15일 네덜란드 총독 요한 판 안헬베이크가 항복을 수락하면서 도시는 전투 없이 평화적으로 영국의 손에 넘어갔다. 이로써 네덜란드령 실론은 완전히 붕괴되고 섬은 영국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3. 여담
- 1948년 영국의 통치가 끝난 후, 많은 네덜란드 버거[2]들은 유럽계라는 이유로 백호주 정책을 이용하기 위해 호주로 이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