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루 독립 전쟁 Peruvian War of Independence Guerra de Independencia del Perú | |||
| 스페인령 아메리카 독립 전쟁의 일부 | |||
| 날짜 | <colbgcolor=#fff,#191919>1809년 ~ 1826년 | ||
| 장소 | 페루, 볼리비아 수크레 지역 | ||
| 결과 | 페루의 독립 | ||
| 교전국 및 교전 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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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원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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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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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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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해 | |||
| 총 20,000명 사망 페루에 거주하던 스페인 민간인 6,000명 사망 또는 추방 | |||
1. 개요
1809년 페루 남부 지역에서 스페인 제국에 대항하는 독립군들의 전투를 시작으로, 1811년 라파스에서 일어난 라파스 혁명과 와키 전투, 1824년 아야쿠초 전투, 1826년 카야오 함락으로 이어진 독립 전쟁.2. 배경
16세기 스페인 제국이 잉카 제국을 점령한 이후 식민지 통치와 식민지 당국의 처우에 대한 토착민 봉기가 여러 번 있었다. 특히 투팍 아마루 2세가 일으킨 봉기는 그 정점이었다. 이런 가운데 1808년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점령하고 자신의 형인 호세 1세를 스페인 왕으로 즉위하자 식민지인들은 왕권이 나폴레옹 가문에 넘어간 것을 부정하며 자치와 독립을 주장했다. 스페인에서는 카디스 의회가 제정된 헌법을 통해 단일 제국 체제를 유지하려 했으나, 자치정부를 원한 미대륙 식민지들과 충돌하며 독립 선언과 무력 충돌이 이어졌다. 나폴레옹 몰락 후 페르난도 7세가 왕권을 회복했지만, 그는 1812년 헌법을 거부하고 절대군주제를 복원했다. 스페인 본토에서는 자유주의가 탄압되었으나, 아메리카에서는 무장 저항이 강화되어 각국의 독립 선언과 공화국 수립으로 이어졌다. 초기 봉기는 대부분 스페인 제국 해체보다는 부패한 식민 정부를 반대하며 “왕은 만세, 나쁜 정부는 타도하라”를 외쳤고, 카디스 헌법을 지지했다. 그러나 결국 왕정 복고와 보수 세력의 반격으로 초기 봉기들은 실패했으나, 이후 외부 해방군의 지원으로 페루의 독립이 확립되었다.3. 전개
3.1. 초기 봉기
1811년 타크나에서 시작된 페루의 첫 번째 반란은 리오플라텐스 군의 승리를 알게 된 후 독립군 지도자 프란시스코 안토니오 데 젤라가 군사적 반란을 일으켰으나, 스페인군에 의해 진압되고 젤라는 체포되어 리마로 이송돼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게 된다. 1812년 후안호에서 일어난 인디언 반란은 스페인군과의 전투 끝에 진압되었고, 주요 지도자들이 처형됐다. 1813년 타크나에서 일어난 두 번째 반란은, 아르헨티나의 마누엘 벨그라노가 이끄는 리오플라텐스 군의 승리로 일어났으나, 스페인군에 의해 재차 진압되었고, 반란 지도자들은 도망쳤다. 1814년 쿠스코에서 발생한 반란은 쿠스코와 그 주변 지역의 상류층과 인디언들이 스페인 왕정을 반대하며 일으킨 것이었으며, 메이토 푸마카우아와 안굴로 형제들이 지도했으나 스페인군의 반격과 내분으로 진압되었고 지도자들은 처형되었다. 1818년 아이마라에스 지역에서 발생한 인디언 반란은 사회적 불만에서 시작되어 후에 독립을 주장하는 운동으로 발전했으나, 스페인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그 지역은 계속해서 게릴라 활동을 이어갔다.3.2. 산 마르틴의 등장
1820년, 스페인의 대규모 군사 작전은 라파엘 델 리에고의 반란으로 중단되었고, 이로 인해 아르헨티나와 베네수엘라의 저항이 강화되었고, 호세 데산 마르틴이 칠레에서 페루로 진입하게 되었다.1820년 8월 20일, 호세 데 산 마르틴 장군의 원정군이 페루를 향해 출발했다. 25척의 군함과 6,03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이 원정군은 9월 8일, 페루의 피스코 근처 파라카스 해변에 상륙했다. 상륙 과정에서 왕당파의 기병대가 도망쳤고, 산 마르틴은 병력을 보내 교두보를 확보한 뒤, 지역 주민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산 마르틴은 즉시 페루 국민들에게 독립을 선언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10월 7일, 산 마르틴의 군은 파르파 근처에서 왕당파 군을 추격해 승리했고, 10월 12일, 창길료에서 또 다른 승리를 거두었다. 11월 5일, 토마스 코크레인은 스페인군의 에스메랄다 호를 격파하며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1821년 7월 19일, 코크레인의 함대는 미르플로레스 앞바다에서 산 마르틴 호를 침몰시키며 가장 강력한 군함을 잃게 되었다.
1821년 3월, 밀러와 코크레인 장군은 왕당파 항구인 아리카와 타크나를 공격했다. 1821년 6월 5일, 라 세르나 총독은 리마를 떠났고, 왕당파 군은 6월 25일 고지대로 퇴각했다. 6월 28일, 산 마르틴 장군은 리마를 점령하고 독립 선언을 발표했다. 1821년 7월 15일, 페루 독립선언서가 서명되었고, 산 마르틴은 리마에 입성하여 독립을 선포했다. 이후 1822년 9월 22일, 산 마르틴은 발파라이소로 떠나며 독립운동의 지휘를 시몬 볼리바르에게 맡겼다. 볼리바르는 1823년 12월 10일 리마에 도착하여 독립을 위한 전쟁을 재개했으며, 1824년 후에는 아유쿠초와 후닌 전투에서 승리하여 페루와 남미 전체의 독립을 확립했다. 마지막 왕당파 저항은 1826년 1월 칼라오 요새와 치로에 요새에서 항복하며 종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