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Colegio Coreano del Paraguay.jpg
파라과이한글학교 Colegio Coreano del Paraguay (Clase sábado) | |
교훈 |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긍지를 지닌 세계인을 기르는 파라과이한글학교 |
개교일자 | 1976년 3월 26일 |
성별 | 남녀공학 |
유형 | 해외 한국인 학교 |
운영 형태 | 사/공립[1] |
교장 | 권정순 |
교육부장 | 조하나 |
교직원수 | 약 20여명 |
학급 수 (2024년) | 유치부 (새싹반+햇살반) 2학급 초등부 (1학년 부터 6학년) 6학급 중등부 (7학년 부터 9학년[A]) 3학급 고등부 (고1학년 부터 고3학년) 3학급 총 14학급 |
학생 수 (2024년) | 유치부 (새싹반+햇살반) ○○명 초등부 (1학년 부터 6학년) ○○명 중등부 (7학년 부터 9학년[A])) ○○명 고등부 (고1학년 부터 고3학년) ○○명 총계 ○○○명 |
운영동아리 | 스터디부, 댄스부, 농구, 풋살부, 배드민턴부, 보드게임부 등 [4] |
관할 교육청 | 재외동포청 |
소재 | 남아메리카,파라과이,아순시온 |
주소 | Padre Casanello 1597 Esq. Battilana, Asunción Paraguay |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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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긍지를 지닌 세계인을 기르는 파라과이한글학교
- 파라과이한글학교 교훈
- 파라과이한글학교 교훈
2. 학교 역사
- 파라과이한글학교/한국학교의 역사는 파라과이 한인 이민사와 거의 궤를 같이 한다. 1965년 4월 23일, 1차 이민이 시작되었고 한국어 교육이 초기 교회나 선교사들에 의해 다락방식 한글 교육으로 출발하여 나중에 한인회가 동포 2세 교육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제도적인 교육의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 1976년 매주 토요일 교포 박혜숙씨의 집에서 박혜숙씨와 백명자씨가 10명의 아동에게 한글을 지도 하였는데 학생수가 늘어나 1978년에는 학생수가 200여명에 이르렀고, 교사도 4명으로 증원됨에 따라 현지인 학교 Colegio San Miguel의 6개 교실을 빌려 사용하였다. 1980년 하반기엔 학생수가 447명으로 늘어 다른 현지인 학교 Virgen de los Dolores로 이전하였으며, 그 해 제1회 졸업식을 거행하여 19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기에 이르렀다.
- 현지 학교를 빌려가며 전전하던 한글학교를 지켜본 동포들에게 파라과이 한인소유의 학교를 짓는 것은 숙원사업이 되었다.
- 1981년 4월 한인회 산하에 있던 한글학교 육성이사회가 학생수 증가로 분리, 독립운영이 시작되었다.
- 1981년 5월 23일 재파라과이한글학교는 재파라과이 한국학교로 개칭되었다.[5]
- 1983년 10월 교가를 제정하였다.
- 한국학교(현 한글학교) 건립은 한인회관 건립사업과 병행하여 계획, 및 추진되었는데 1982년 제18대 한인회장 한상건씨가 취임하며 한국학교(현 한글학교)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이 논의되고 1983년 8월부터 교포들의 모금이 시작되어 1985년 9월30일 한국학교(현 한글학교) 부지를 113,000불에 매입하기에 이르렀다.
- 1986년 제20대 이한철 한인회장 당시 한국학교(현 한글학교) 건립 추진회를 조직하면서 명덕선씨가 초대 위원장이 되어 사업의 기반을 닦았으며, 1987년 제21대 한인회장 음흥식씨는 제2대 건축위원장을 겸직하면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 1988년 1월 29일 제1차 한국학교(현 한글학교) 건축공사가 착수되어 2월 10일 머릿돌이 놓여졌고 당시 공사 예상총액이 520,000불이었으며 모금총액 237,000불로서 부지매입 비용 113,000불 지출을 뺀 나머지 124,000불이 1차 공사 착수금이었다.
- 1989년 12월 14일 한국 정부로부터 한화 약 1억5천만원에 해당하는 155,357불이 지원되어 1차 공사가 1990년 3월 완료되고 한국학교(현 한글학교) 입주식을 거행함과 동시에 신축 학교로 이전을 시작하였다.
- 1990년 재파한인교육문화재단이 발족되고 초대 이사장으로 구완서씨가 위촉 되었다.
- 1991년 제2대 한인교육문화 재단 이사장에 장의평씨가 취임하여, 한국 본국 교육부에 전일제 정규학교 (현 한국학교)설립 및 학력인가를 요청하였고, 교육부로부터 63,559불을 지원받아 2층 및 3층 내부 및 (세종관)강당 공사를 착공하였다.
- 1993년 2월 13일 교육부의 이종서 과장이 임석한 가운데 준공식을 거행하였다.
- 파라과이 교포들의 자발적인 모금으로 1983년 시작되어 착공 9년만에 준공된 이 공사는 현지거주 동포 모금액 250,000불과 정부지원 280,158불을 합하여, 총 530,158불이 투입된 결실인 것이다.
3. 역대 학교장
<rowcolor=#fff,#ddd> 취임년도 | 교장 |
1979.3월 | 제1대 양용승 |
1980.2월 | 제2대 강상태 |
1984.2월 | 제3대 이희주 |
1986.9월 | 제4대 명운기 |
1989.1월 | 제5대 이희주 |
1990.1월 | 제6대 강상태 |
1991.3월 | 제7대 김춘자 (제1대 재파 한국학교 교장 겸임) |
1994.1월 | 제8대 백명자 (제2대 재파 한국학교 교장 겸임) |
1997.3월 | 제9대 김옥화 (제3대 재파 한국학교 교장 겸임) |
1999.3월 | 제10대 박남금 (제4대 재파 한국학교 교장 겸임) |
2012.1월 | 제11대 이경연 |
2023.2월 | 제12대 권정순 (현) |
4. 학교 시설
- 총 부지면적 4089.26㎡(1237평) 내에 운동장 너비 2314.05㎡(700평), 건물 2975.21㎡(900평) 넓이 3층으로 이루어진 학교 건물 내에는 교실, 도서관, 강당[6], 수영장, 관리동, 한인회, 교육원, 평통자문회의실 등이 자리잡고 있다.
5. 학교 생활
5.1. 주요 행사
- 입학식
- 전교학생회 임원 및 학급임원 선출
- 학생회 임원 회의 및 학년별 회의
- 정기총회 안건 상정
- 정기총회 각 동아리 부장 발표
- 스승의날 행사
- 어린이날 행사
- 어버이의날 행사
- 현장체험 학습
- 한글날 행사
- 우리말 겨루기 대회
- 종업식, 졸업식
- 남미한글학교 합동교사연수
5.2. 시간표
<rowcolor=#fff,#ddd> 교시 | 시간 |
1교시 | 8:30 - 9:10 |
2교시 | 9:20 - 10:00 |
3교시 | 10:20 - 11:00 |
4교시 | 11:10 - 11:50 |
5교시 | 12:00 - 12:30 |
6. 학교 현황
- 같은 건물에서 토요일에는 재외동포청의 지원을 받고 있는 재파라과이한글학교(유치부부터 고등학교까지의 과정)가 운영[7]되고 있으며, 평일에는 교육부 소속 주파라과이한국학교(유치부부터 초등학교까지의 과정)가 운영되고 있다.
- 파라과이 한인 동포들은 어려운 이민생활 속에서도 설립 취지에 변함없이 50여년간 2세 교육에 힘을 쏟아 좋은 성과를 얻고 있는데 이는 세계 어느 동포 사회에 내놓아도 전혀 손색이 없다. 주파라과이한국학교의 경우 남미 최초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정규학교 인가를 얻었는가 하면, 재파라과이한글학교는 시설 인프라, 학사과정, 교사들의 열정과 헌신 등으로 재외우수사례 한글학교로 꼽히고 있다.
- 1차 교육목적은 이민자 자녀들이 현지 사회에 잘 적응하고 진출하도록 돕는 것이었으므로 현지사회 교육제도를 채택하여 교육하되 한국인으로서의 긍지와 정체성을 유지토록 하는 것을 목표로 시작했으나, 이민 역사가 길어지면서 현재는 현지에서 태어나는 2세, 3세들과 다문화 가정 자녀의 정체성 확립을 함양, 또 한류의 열풍과 한국에 대한 관심으로 한국어 및 한국문화를 배우고자 하는 현지인들에게 한국의 문화를 교육하는 것으로 점차 그 영역이 확장되고 있다.
[1] 학생들이 납부하는 학비와 재외동포청의 정부 지원금으로 운영된다.[A] 파라과이 학제: 우리나라 중학교 1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에 해당[A] 파라과이 학제: 우리나라 중학교 1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에 해당[4] 동아리 부서는 매해 추가/변경된다 (기존 등록된 동아리도 매년 새학기, 등록 기준에 맞춰 새로히 구성하여 재등록해야 함)[5] 이후 약 10년간 재파라과이 한국학교로 학교명을 통일해 사용하다, 1992년 3월 12일 전일제 교육을 시행하는 파라과이 한국학교가 개교하게 되면서 혼돈을 줄이기 위해 모태부터 계속 정시제로 운영되어 오던 토요학교는 '파라과이한글학교'라는 기존의 학교명으로 다시 돌아와 그 명칭을 현재까지 유지한다.[6] 세종관: 동포사회 행사장으로도 많이 이용된다[7] 운영결정에 관련해선 학교운영위원회에 심의, 자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