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시의 역사 | ||
시대 | 시기 | 내용 |
삼한시대 | 4세기 중엽 | 밝혀진 유적조사에 따르면, 원주 지역에는 수만 년 전부터 인류가 생활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삼한시대의 원주지역은 54개 부족국가로 형성된 마한의 가장 동쪽에 있었던 일화국(日華國)으로 추정된다. |
삼국시대 | 백제 | 마한을 정복해 들어갈 때에는 백제의 영토였다. |
장수왕 57년(469) | 원주지방을 평원군이라 하였다. | |
남북국시대 | 문무왕 18년(678년) | 전국의 행정구역을 재 정비하여 9주 5소경을 설치할 때 북원소경이라 하였다. |
경덕왕 | 북원경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 |
9세기 말 | 신라가 쇠퇴하면서 각처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양길은 원주지역을 근거로 세력을 확장하여 오늘날의 강원특별자치도 지역 대부분을 차지하는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 |
고려시대 | 태조 23년(940) | 북원경을 폐지하고 원주를 개칭하였다. |
성종 14년(995) | 전국의 행정구역을 10도 12목으로 개편하였을 때 원주지방은 충원도(현재 충북)에 소속되었다. | |
현종 9년(1018) | 지주사(知州事)[1]를 두었다. | |
고종 46년(1259) | 원주가 왕명을 거역하였다는 이유로 일신현(一新縣)으로 강등시켰다. | |
원종 원년(1260) | 지원주사(知原州事)로 복구하였다. | |
원종 10년(1269) | 임유무[2]의 외향이라 하여 정원도호부(靖原都護府)로 승격시켰다. | |
충렬왕 17년(1291) | 합단적의 침입이 있었을 때에 향공진사 원충갑과 원주 사람들이 물리친 공을 기리기 위하여 익흥도호부(益興都護府)로 개칭하였다. | |
충렬왕 34년(1308) | 원주목(原州牧)으로 승격되어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원주목은 행정과 군사, 경제의 중심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
충선왕 2년(1310) | 여러 목을 도태시키면서 성안부(成安府)로 강등시켰다. | |
공민왕 2년(1352) | 원주의 치악산에 왕의 태를 안치하고 원주목(原州牧)으로 복구하였다. 별호는 평량경(平涼京)이며, 또 평량(平涼)이라 부르기도 했다.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속군, 속현 보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2개의 속군(屬郡)과 5개의 속현(屬縣)을 두고 있었다. 영월군(寧越郡): 고구려의 내생군(奈生郡), 신라 경덕왕 때 내성군(奈城郡), 고려시대에 영월군으로 개칭. 지금의 영월군이다. 제주군(堤州郡): 고구려의 내토군(柰吐郡)으로, 신라 경덕왕때 내제군(柰堤郡)으로 고쳤다. 현종 9년(1018)에 원주에 내속(來屬)하였다(원주의 임내(任內)로 편제). 지금의 제천시이다 평창현(平昌縣): 고구려의 욱오현(郁烏縣), 신라 경덕왕 때 백오(白烏), 고려시대에 평창현으로 개칭. 지금의 평창군이다. 단산현(丹山縣): 고구려의 적산현(赤山縣), 신라시대에 내제군(奈堤郡)의 속현, 고려시대에 단산현으로 개칭. 지금의 단양군의 일부이다. 영춘현(永春縣): 고구려의 을아단현(乙阿旦縣), 신라 경덕왕 때 자춘(子春), 고려시대에 영춘현으로 개칭. 지금의 단양군 영춘면이다. 주천현(酒泉縣): 고구려의 주연현(酒淵縣), 신라 경덕왕 때 주천, 고려시대에 주천현으로 개칭. 지금의 영월군 주천면이다. 황려현(黃驪縣): 고구려의 골내근현(骨乃斤縣), 신라 경덕왕 때 황효(黃驍), 고려시대에 황려현으로 개칭. 지금의 경기도 여주시이다. |
조선시대 | 태조 4년 (1395) | 태조는 지방행정구역을 정비하면서 강릉도와 교주도를 합하고 강릉의 '강'자와 원주의 '원'자를 합하여 강원도라 명명하였다. 이와 함께 원주에 강원감영을 설치하여 원주가 강원도의 수부로서 행정·치안·사회·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맡게 되었다. |
태종 13년 (1413) | 8도제를 시행하면서 강원도의 감영을 유지했다. | |
숙종 9년 (1683) | 강상(綱常) 사건으로 원성현(原城縣)으로 강등되었다가 1692년(숙종 18)에 원주목으로 회복되었다. | |
영조 2년 (1728) | 역당의 태생지라 하여 원성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737년(영조 13)에 원주목으로 회복되었다. | |
고종 32년 (1895) | 5월 26일, 전국을 23부 337군 제도로 개편하면서 원주의 강원감영을 폐하고, 강원도는 2개 부(강릉부-9개군, 춘천부-13개군)로 개편되었으며, 원주군 외 3개 군(영월, 평창, 정선)은 충주부에 이속되었다. | |
고종 33년 (1896) | 칙령 제36호[3]제5조에 의거 전국 23부를 폐지하고 13도로 개편됨에 따라 강원도가 부활되면서 원주군 외 3개 군(평창, 영월, 정선)은 강원도로 편입되고 관찰사는 춘천에 배치되었다. 이 당시 전국 군은 5단계 등급으로 339군 중 원주군은 4등급의 군이었으며 19개 면이 있었다.[4]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속군, 속현 보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1개의 속군(屬郡)과 2개의 속현(屬縣)을 두고 있었다. 관할[所領]은 지군사(知郡事)가 1이었다. 1군 : 영월군(寧越郡) 2현 : 횡성현(橫城縣), 홍천현(洪川縣) |
일제강점기 | 1914년 | 3월 1일, 총독부령 제111호[5]로 강원도를 21개 군[6]으로 조정한 뒤, 원주군은 원주군 일원으로 하였다. | |||
1916년 | 1월 1일 조선총독부 강원도고시 제52호[7]에 의거 원주군 10개면 67개리[8]로 구역이 설정되었다. | ||||
1937년 | 7월 1일 원주군 본부면이 원주읍으로 승격함으로써 원주군은 1읍 9개면[9]으로 확정되었다. | ||||
1938년 | 10월 1일, 부령 제197호[10]에 의거 원주읍 흥양정을 소초면에 넘겼다. | ||||
<colbgcolor=#005ba6> 대한민국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대한민국 | 1945년 | 정을 동으로 개정하였다[11]. | ||
1955년 | 원주시설치에관한법률[12]로 원주군 중 원주읍 일원, 판부면 단구리, 행구리, 호저면 우산리를 편입하여 행구동, 단구동, 우산동을 증설하여 18개 동으로 시 승격하고 나머지 구역을 원성군으로 개칭하였다. | ||||
1961년 | 9월 15일, 연합동제를 실시하였다. 중앙동, 평원동을 중평동으로, 원동·인동을 원인동으로, 학성1·2구는 학성동으로, 태장1·2구는 태장동으로 봉산1·2·3구는 봉산동으로 연합하였다. | ||||
1965년 | 시조례 제207호[13]로 14개동[14]의 명칭 및 구역을 설정하였다. | ||||
1970년 | 7월 1일, 인구 증가로 학성동, 태장동, 봉산동을 각각 2개 동으로 분동 및 3개 동을 증설하여 15개 연합동제를 실시하였다. | ||||
1973년 |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2호[15]로 18개 동 명칭과 구역을 설정[16]하여 법정동 18개동(행정동 18개동)으로 확정하였다. | ||||
1983년 | 대통령령 제11027호[17]로 원성군 소초면 장양리 일부를 원주시에, 원주시 관설동 일부를 원성군 판부면에(신촌리 설치),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의 매호리, 산현리 및 압곡리 일부를 원성군 호저면에 편입하였다. | ||||
1989년 | 법률 제4050호[18]로 원성군을 원주군으로 명칭 변경하였다. | ||||
1990년 | 시조례 제1486호[19]로 18개 동[20] 중 5개 동[21]을 제외한 나머지 동의 구역을 변경하였다. 단구동 일부를 명륜동과 개운동으로, 우산동 일부를 학성동과 태장동으로, 명륜동 일부를 원동으로, 원동 일부를 명륜동으로 조정하였다. | ||||
1992년 | 시조례 제1634호[22]로 원동 일부가 명륜동으로, 단구동 일부가 개운동으로 각각 편입되었다. | ||||
1993년 | 시조례 제1658호[23]로 무실동 일부가 단계동으로 편입되었다. | ||||
1993년 | 시조례 제1675호[24]로 개운동 일부가 단구동으로, 명륜동 일부가 원동, 단계동으로 편입되었다. | ||||
1995년 | 1월1일, 법률 제4774호[25]로 원주시와 원주군을 통합하여 원주시를 설치했다.(9면 18동)[26] 2월 15일, 시조례 제39호[27]로 단계동 일부가 명륜동으로 편입되었다. 3월 1일, 법률 제4802호[28]로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대둔리 일부가 원주시로 편입되었다. 시조례 제142호[29]로 행정운영 읍면동 조정으로 명륜동이 명륜1·2동으로 분리되었다.(9면 19동)[30] 3월 2일, 시조례 제141호[31]로 문막면이 문막읍으로 승격(1읍 8면 19동)되었다. 11월 17일, 시조례 제166호[32]로 1읍 8면 18개동 중 일부 동 구역이 조정되었다[33] | ||||
1999년 | 1월 1일, 시조례 제341호[34]로 행정운영 읍면동 명칭 및 구역이 조정되었다. 학성2동과 중앙평원동이 중앙동, 봉산1.2동이 봉산동, 관설동과 반곡동이 반곡관설동, 학성1동이 학성동, 단계동일부를 무실동으로 명칭 및 구역이 조정되었다(1읍 8면 16동)[35] |
삼국, 고려시대 출처 : 고려사 권 56 지 권제 10 地理 一[36]
고려시대 속군 정보출처[37]
교차 검증 및 조선시대 정보 출처[38]
[1] 지주사는 주(州)의 행정과 사법을 총괄하는 최고 책임자로서, 현재의 도지사나 군수와 비슷한 역할을 하였다.[2] 임유무는 당시 고려의 중요한 관료였으며, 그의 외가(外家)가 원주에 위치해 있어 이 지역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3] 건양원년 1896.8.4 공포, 당일 시행[4] 본부면, 저전동면, 사제면, 판제면, 금물산면, 미내면, 부론면, 귀래면, 강천면, 지내면, 지향곡면, 정지안면, 고모곡면, 호매곡면, 소초면, 수주면, 양변면, 가리파면, 부흥사면[5] (1913.12.19 공포)[6] 이천군, 간성군, 김화군, 철원군, 울진군, 춘천군, 횡성군, 홍천군, 원주군, 평창군, 영월군, 정선군, 삼척군, 강릉군, 양양군, 통천군, 회양군, 평강군, 화천군, 양구군, 인제군[7] 조선총독부 관보 제1032호. 1916.1.15 (1915.12.25 공포, 1916.1.1시행)[8] (본부면-5개리, 금물산면-5개리, 귀래면-5개리, 가리파면-7개리, 판부면-6개리, 소초면-7개리, 호저면-9개리, 지정면 -8개리, 건등면-9개리, 부론면-6개리)[9] 원주읍(15개정) - 본정1.2정목(중앙), 대화정(인동), 금정(일산), 개운정(개운,명륜), 남산정(원동), 영정(학성1.2동), 욱정(평원), 흥양정(소초면 흥양리), 봉산정 1,2,3구, 태장1.2구, 사천리(단계)[10] 1938.9.27. 공포[11] (15개동 - 평원동, 인동, 중앙동, 일산동, 개운동, 명륜동, 원동, 학성1.2구, 단계동, 태장1.2구, 봉산1.2.3구)[12] (1955.8.13 공포, 동년 9.1 시행)[13] (1965.12.28 공포, 동일 시행)[14] 중앙동, 평원동, 원동, 인동, 개운동, 명륜동, 단구동, 일산동, 학성동, 단계동, 우산동, 태장동, 봉산동, 행구동[15] (1973.3.12 공포) 및 시조례 제514호 (1973.5.23 공포, 동년 7.1 시행)[16] (중앙동, 평원동, 원동, 인동, 개운동, 명륜동, 단구동, 일산동, 학성동, 단계동, 우산동, 태장동, 봉산동, 행구동, 원성군 호저면 가현리를 원주시에 편입하여 가현동, 흥업면 무실리 일원을 편입하여 무실동, 판부면 관설리를 편입하여 관설동, 판부면 반곡리를 편입하여 반곡동)[17] (1983.1.10 공포, 동년 2.15 시행)[18] (1988.12.31 공포, 익년 1월 시행)[19] (1990.3.31 공포, 동년 4.1 시행)[20] 중앙동, 평원동, 원동, 인동, 개운동, 명륜동, 단구동, 일산동, 학성동, 단계동, 우산동, 태장동, 가현동, 봉산동, 무실동, 행구동, 관설동, 반곡동)[21] 단계동, 봉산동, 무실동, 행구동, 반곡동[22] (1992.9.29 공포)[23] (1993.4.6 공포)[24] (1993.7.21 공포)[25] (1994.8.3 공포)[26] 소초면, 호저면, 지정면, 문막면, 부론면, 귀래면, 흥업면, 판부면, 신림면, 중앙동, 평원동, 원동, 인동, 개운동, 명륜동, 단구동, 일산동, 학성동, 단계동, 우산동, 태장동, 가현동, 봉산동, 무실동, 행구동, 관설동, 반곡동[27] (1995.2.15 공포)[28] (1994.12.22 공포)[29] (1994.12.22 공포)[30] 소초면, 호저면, 지정면, 문막면, 부론면, 귀래면, 흥업면, 판부면, 신림면, 중앙동, 원인동, 개운동, 명륜1·2동, 단구동, 일산동, 학성1·2동, 단계동, 우산동, 태장1·2동, 봉산1·2동, 무실동, 행구동, 관설동, 반곡동[31] (1995.2.28 공포)[32] (1995.11.17 공포, 동일 시행)[33] 종전 일산동중 일부가 원동, 개운동 일부가 명륜동, 일산동 일부가 학성동, 학성동 일부가 단계동으로 편입[34] (1998.12.24 공포)[35] 문막읍, 소초면, 호저면, 지정면, 부론면, 귀래면, 흥업면, 판부면, 신림면, 중앙동, 원인동, 개운동, 명륜1.2동, 단구동, 일산동, 학성동, 단계동, 우산동, 태장1.2동, 봉산동, 행구동, 무실동, 반곡관설동[36] 황현, “高宗三十二年乙未”, ≪매천야록≫(한국사료총서 제1권, 1971).(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sa_001_0030_0020, 2007. 09. 03), “日陸戰隊撤退는 南北戰으로 中止? 今回 半數만 交代”, ≪동아일보≫ 1928년 3월 19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www.history.go.kr, np_da_1928_03_19_0030, accessed 2007. 09. 03)[37]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디지털제천문화대전)[38] 조선왕조실록 中 세종실록 153권, 지리지 강원도 원주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