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탈로스 (그리스어: Θαλλός) |
출생 | 미상 |
사망 | 미상 |
직위 | 역사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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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1세기의 역사가.2. 행적
3~4세기의 기독교 학자 에우세비우스의 '문헌 목록' 아르메니아어판 사본에서는 탈로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하지만 아르메니아어판 사본은 많은 숫자들이 손상되어 있으며, 섹스투스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의 탈로스에 대한 논박을 인용한 게오르기오스 싱켈로스가 명시한 날짜와 맞지 않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제167회'가 아니라 제217회 올림픽(89~93년)이라고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180년경 안티오키아의 주교 테오필로스는 '안티오키아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탈로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탈로스는 아시리아의 왕 벨로스와 타이탄의 크로노스를 언급하며, 벨로스는 티탄인들과 함께 신이라 불리는 제우스와 그의 동료들과 전쟁을 벌였다고 말한다. 게다가 그는 기구스가 심한 부상을 입고 타르테소스로 도망쳤다고 말한다. 그 당시에 기구스는 그 나라를 통치했는데, 그 나라는 당시 아크테라고 불렸으나, 지금은 아티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 다른 나라들과 도시들이 그들의 이름을 따왔으니, 역사에 정통한 여러분들에게 굳이 별도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유대 고대사>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이제 또 다른 사마리아인 탈로스가 있었다. 탈로스는 카이사르의 해방자였고, 100만 드라크마를 빌린 뒤 안토니아에게 빚을 갚았다. 그리고 가이우스의 궁정에 남은 돈을 보내, 그와 함께 큰 권위를 가진 사람이 되었다.
학계의 정설은 이 문맥에서는 이전 사마리아인을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또 다른 사마리아인'은 탈로스를 지칭한다고 본다. 그러면서 이 탈로스가 에우세비우스와 아프리카누스가 언급한 탈로스와 동일인물이라고 본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이제 다른 사람, 즉 인종(출생)에 따른 사마리아인이자 카이사르의 자유인이 있었다"라고 읽는게 옳다고 주장하며, 탈로스가 에우세비우스와 아프리카누스가 언급한 역사가 탈로스와 동일인물이라고 볼 근거가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9세기 동로마 제국의 기독교 학자 게오르기오스 싱켈로스가 인용한 섹스투스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의 연대기는 탈로스의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온 세상에 가장 무서운 어둠이 닥쳤고, 지진으로 바위가 세들어 있었고, 유대와 다른 지역들의 많은 곳이 무너졌다. 그의 역사의 세번째 책에서, 탈로스는 이를 일식이라고 지칭했다. 내가 보기에 이 주장은 말도 안 된다. 히브리인은 달에 따라 14일에 유월절을 기념하며, 우리 구원자의 순교는 유월절 전날에 벌어졌다. 그러나 일식은 달이 태양 아래에 올 때에만 일어난다. 새로운 달의 첫날과 마지막 달의 교차점 사이의 간격, 즉 달이 태양과 거의 정반대로 있는데 일식이 어떻게 발생할 수 있겠는가?
탈로스의 기록은 이외에도 여러 기독교 학자들에게 인용되었다. 락탄티우스는 탈로스가 "트로이 전쟁 322년 전에 벨로스가 태어났다"고 기술했다고 밝혔으며, 순교자 유스티누스의 이름을 쓴 익명의 저자는 모세에 대해 다룬 역사가들 중에 탈로스도 있었다고 기술했다. 요안니스 말라라스는 탈로스, 폴리비오스, 헤로도토스, 테오필로스 등이 크로이소스의 통치에 관해 기술했다고 밝혔다. 이외의 행적 및 역사서 내용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