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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착촌 | 캉에흘루크 |
케케르타르수아크 지구의 정착촌 쿠흘리사트 Qullissat | |||||
<colbgcolor=#d00c33><colcolor=#FFFFFF> 경위도 | 70°05'04.0"N 53°00'35.0"W | ||||
국가 | [[그린란드| ]][[틀:국기| ]][[틀:국기| ]]그린란드 | ||||
주 | 케케르탈리크 | ||||
지구(地區) | 케케르타르수아크 | ||||
시간대 | UTC-02:00 | ||||
인구 | 0명[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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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시가 존재하던 시기에 촬영된 도시 전경 |
그린란드에서 도시(Illoqarfik)로 분류되었던 거주지 가운데 현재까지 폐쇄된 유일한 곳이다.
2. 역사
2.1. 도시의 설립과 발전
쿠흘리사트는 본래 그린란드인들이 정착하여 살던 땅이 아닌, 여름에나 방문하는 일종의 임시 거주지였다.[2] 유럽인들은 이곳이 탄광으로서의 가치가 높다는 것을 18세기부터 알고 있었고, 인근에서 이미 채굴 중이던 광산촌 카르수아르수크(Qaarsuarsuk)가 고갈됨에 따라 1924년 정착촌이 설립되었다.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본국으로부터 그린란드 전체가 완전히 고립됨에 따라 그린란드 전 지역의 석탄 수요를 홀로 전담하였다. 쿠흘리사트의 인구가 급증한 것 또한 이때의 일이다.
1950년 쿠흘리사트는 바이가트(Vaigat) 자치구의 중심도시로 지정되었다.
20세기 중반 기준으로 쿠흘리사트는 그린란드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으며, 그린란드 문화권 내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산업 도시라는 점과, 인구 구성이 원래 일대에 살던 주민들이 아닌 그린란드 전 지역과 심지어 국외에서 유입된 인구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 등, 이촌향도의 표본과도 같은 도시였다.
1952년 12월 15일, 해협 건너편의 니오르투트(Niiortuut)산에서 대규모 산사태가 발생, 높이 2.2미터에서 2.7미터 규모의 쓰나미가 쿠흘리사트에 도달하여 다소의 피해가 발생하였다.
2.2. 수익성 저하와 도시의 폐쇄
1957년 쿠흘리사트의 미래에 관해 논의하기 위한 위원회가 발족하였다. 이들은 1962년 광산이 앞으로도 계속 운영되어야 하며, 장기적인 운영을 위해서 채굴량을 다소 줄이는 방향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결론지었다. 이는 광산의 수익성이 점차 낮아지고 있음에도 늘어나는 인구에 맞추어 채굴량을 급격하게 늘리고 있던 당시의 운영 방침이 오래잖아 중대한 위험이 될 것으로 보았기 때문으로, 그 우려는 바로 그 다음 해인 1963년부터 사실로 드러났다.1966년경 이곳에서 채굴하는 석탄의 양은 약 4만 톤이었으며, 인구는 1400여명이었다. 이때 기준으로 그린란드에서 여섯 번째로 큰 도시였다. 이 해 그린란드주[3]의회에서 해당 도시의 폐쇄를 결정하였다. 이는 이미 이때 들어 채굴량이 감소하고 있기도 했거니와, 대구 어업에 산업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필요가 있었기 때문으로, 도시는 1972년을 기하여 폐쇄하고 주민들은 적당한 재정착 계획을 세워 이주될 예정이었다.
1968년에 들어서는 도시의 폐쇄가 이미 결정되고 세부적인 계획까지 모두 세워진 상태였으나, 덴마크 정치인 한스 이외르겐 렘보른(Hans Jørgen Lembourn) 등은 이를 번복하거나 적어도 미루어줄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 주장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1972년 10월 4일 본래 그린란드 정부가 생각하고 있던 대구 산업은 중간에 실패해 버렸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이 도시는 기존의 계획대로 폐쇄되었다. 당시까지 남아있던 500여명의 주민들은 강제 이주되었다. 본래 계획에서는 이주당하는 주민들에게 대한 별다른 경제적 지원조차 없을 예정이었으나, 1971년 보상금을 지급하는 쪽으로 계획이 수정되었다.
2.3. 폐쇄 이후
강제 이주로 인한 사회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당시 그린란드인들의 거주 이전에 관한 권리는 상당히 제한적이었고, 광업에 종사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던 일을 찾아서 계속할 길이 모두 막혔으므로 별도의 전문성을 요하지 않는 다른 일들을 찾아야 했다. 자연히 이는 생활 수준의 저하로 이어졌으며, 여기에 더해 당시 급격히 증가세에 있던 인구를 감당하기 위해 지어올린 공동주택에 이들이 입주하게 되었는데, 이 또한 본래 각자 살던 집에 비하면 비용이 매우 많이 들었다. 결과적으로 강제 이주된 주민들은 이중으로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는 상황에 처했다.쿠흘리사트에 집중되어 있던 인구가 그린란드에서도 손꼽히게 많았던 점까지 겹쳐, 그린란드의 사회 문제 가운데 많은 부분이 이때 쿠흘리사트의 폐쇄와 강제 이주와 중요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일련의 사태는 덴마크의 어설픈 탈식민화 정책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로 각인되었다.
2000년 11월 21일 해협 건너편의 파투트(Paatuut)에서 대규모 산사태가 발생, 이미 폐쇄된 쿠흘리사트 부지에 28미터 규모의 메가쓰나미가 들이닥쳐 내륙 방향으로 100미터 이상이 침수되었다. 도시가 폐쇄되지 않고 그럭저럭 계속 운영되고 있었다면 대규모 인명피해를 면할 수 없었을 것이었다.
3. 대중문화에서
그린란드의 록 밴드 '수미(Sumé[4], 1972-1977)'가 이 도시의 종언을 주제로 하여 '쿠흘리사트(Qullissat)'라는 제목의 노래를 1974년 발표하였다. 앨범 '이누이트 누나트(Inuit Nunaat)'.4. 인물
이 도시 출신의 유명인사.- 아카 회그(Aka Høegh): 1947.12.16-현재, 예술가.
- 쿠피크 클라이스트(Kuupik Kleist), 1958.03.31-현재, 전 그린란드 총리(이누이트 공동체당, 재임기간 2009-2013).
- 마카 클라이스트(Makka Kleist), 1951-현재, 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