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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D52B1E> 칠레 독립 전쟁 ,1810 ~ 1833, | <colbgcolor=#fff,#1919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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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레 독립 전쟁 스페인어: Guerra de la Independencia de Chile | ||
| 스페인령 아메리카 독립 전쟁중 칠레 독립 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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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칠레 독립 전쟁 그림 | ||
| 날짜 | ||
| 1810년 9월 18일 ~ 1826년 1월 15일 | ||
| 장소 | ||
| 칠레 | ||
| 원인 | ||
| 스페인의 착취 반대 크리오요의 불만 | ||
| 교전국 | | |
| 지휘관 | | |
| 결과 | ||
| 칠레의 독립 | ||
1. 개요
1812년에서 1826년 사이에 주로 당시 칠레 총독령에서 벌어진 독립 전쟁.2. 배경
1808년 초, 스페인 제국에서 가장 작고 가난한 식민지 중 하나인 칠레의 총독은 유능하고 존경받으며 인기 있는 왕실 총독인 루이스 무뇨스 데 구즈만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형 호세 1세의 즉위와 이에 반발한 스페인인들이 일으킨 이베리아 반도 전쟁으로 스페인 본토는 혼란에 휩싸였다. 그 사이 칠레는 내부 정치적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바로 2월에 구즈만 총독이 갑자기 사망했고, 스페인은 혼란에 휩싸여 총독을 임명할 수 없었다. 결국 가르시아 카라스코는 4월에 칠레 총독 직을 맡았고, 합법적인 왕이 없는 상황에서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최고 중앙 훈타가 구성되었다는 소식이 칠레에 전해졌다. 가르시아 카라스코 총독은 무례하고 권위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이었고, 매우 짧은 시간 안에 그의 지휘 하에 있는 크리오요 엘리트들을 소외시켰다.이에 불만에 쌓인 크리오요들은 아르헨티나에서 5월 혁명이 일어나자, 불만을 품은 그들은 카라스코 총독에게 직무정치처분을 내렸다. 결국 가르시아 카라스코 준장은 1810년 7월 16일 직무 정지 처분을 받고 사임했다. 그 후 1810년 9월 18일, 칠레의 산티아고에서 열린 공개 회의에서 첫 번째 국가정부인 칠레 왕국의 훈타가 들어섰다. 이 정부는 왕 페르난도 7세의 권한을 대신하여 칠레를 통치하였고, 주요 인물로는 마테오 드 토로 이 잠브라노, 호세 안토니오 마르티네스 데 알두나테, 후안 마르티네스 드 로사스 등이 있었다. 이후, 1811년 4월 1일 첫 번째 국가회의가 열렸지만, 정치적 갈등과 분열이 일어났다. 특히 군인 토마스 데 피게로아가 군을 일으켜 정부 해산을 요구했다. 피게로아는 실패하고 처형당했다. 그 후, 첫 번째 회의는 급진적인 독립 지지자들과 온건한 개혁을 원하는 인물들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특히, 카레라 형제는 정부의 독립 성향이 부족하다고 보고 군사적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새로운 정부를 구성했다. 이로 인해 정치적 긴장과 갈등은 심화되었으며, 특히 산티아고와 콘셉시온 지역 간의 대립이 강해졌다. 1812년에는 카레라와 마르티네스가 갈등을 겪고, 결국 카레라는 마르티네스를 몰아내고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였다. 전반적으로 이 시기의 칠레 독립 전쟁은 산티아고 중심의 중앙집권적인 엘리트와 콘셉시온 중심의 지방군 및 독립 지지 세력 간의 충돌로 특징지어졌다.
결국 로사스는 1813년 멘도사로 추방되었고, 카레라는 독립 운동의 지도자로 자리매김했다. 한편, 페루의 부왕 조세 페르난도 데 아바사칼은 칠레로의 반란 진압을 위해 군을 파견했다. 1813년 1월 18일, 안쿠드에 도착한 안토니오 파레하 장군은 1,400명의 군인을 모은 후 3월 27일 산비센테를 점령하며 반란을 진압하는 작전을 시작했다.
3. 전개
1813년, 칠레의 왕당파 군은 탈카우아노 항구와 콘셉시온 도시를 점령한 후, 칠레의 독립군을 향해 5,000명의 병력으로 산티아고로 진격했다. 독립군의 지도자 호세 미겔 카레라는 마울 강에서 진격을 막으려 했으나 여러 전투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그는 왕당파를 칠리안에서 물러나게 만들었다. 1813년 10월, 카레라는 칠리안을 포위했지만 왕당파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그 후, 왕당파의 총사령관인 가비노 가인자는 병력과 물자를 보충하여 1814년 초에 반격을 시작했다. 그는 3월에 탈카를 재점령하고, 칠레에서 정치적 혼란을 초래했다. 카레라는 3월 29일 칸차 라이아다에서 왕당파를 격파했지만 4월 8일에 다시 반격을 받고, 결국 5월 3일 리르카에서 양측은 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7월에 카레라는 정부를 타도하고 내전이 일어났다. 이후 1814년 7월, 왕당파의 마리아노 오소리오 장군은 5,000명의 병력과 함께 칠레를 침공했으며, 10월 1~2일, 랑카과에서 독립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이후 독립군 지도자들은 아르헨티나로 피신했으며, 왕당파는 10월 9일 산티아고를 점령, 12월에는 라세레나와 코피아포까지 점령하며 '구조된 칠레'를 회복했다. 이로써 파트리아 비에자 시대는 종결되었다.왕당파가 승리하면서 칠레에 구 체제가 복원되고, '복구시기'가 시작되었다. 1814년 10월 2일, 마리아노 오소리오가 칠레의 총독에 임명되었고, 그는 '구 독립군'의 지도자들을 퀴리키나 섬과 후안 페르난데스 제도에 유배시키고, 모든 독립정부 기관을 해체했다. 그러나 오소리오는 양측의 화해를 위해 자비로운 태도를 취하고, 병력을 안데스를 넘지 않기로 하여 리오플라텐세 독립군에 대한 공격을 피했다. 한편, 칠레의 망명자들은 700명의 병력을 포함한 2,000~3,000명의 민간인들이 멘도사로 이주했고, 호세 미겔 카레라는 이곳에서 자신을 칠레의 합법적 정부로 인정받기 위해 시도했다. 하지만 그는 산 마르틴의 압박을 받고 멘도사에서 쫓겨난 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향했고, 결국 그는 미국에서 지원을 받아 전쟁 물자를 확보했지만, 다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체포되어 칠레로 돌아가지 못했다. 1815년 6월, 칠레 망명자들은 태평양 연안으로 코르사리 원정을 시작했으며, 이들은 과야킬과 카야오를 공격한 후 귀환했다. 또한 마누엘 로드리게스는 호세 데산 마르틴의 지휘 하에 스파이와 게릴라 활동을 통해 왕당파 군을 약화시키고, 칠레 내에서 민중의 지지를 얻었다. 1816년, 그는 칠레로 다시 돌아와 왕당파 군을 분열시키고, 산 마르틴과 오히긴스가 안데스를 넘어 왕당파와 맞서도록 지원했다. 이 전략은 성공적이었고, 1817년 2월 12일, 차카부코 전투에서 승리하여 칠레의 절반을 되찾았고, 오히긴스가 새로운 독립 정부를 세웠다.
호세 데 산 마르틴은 남미 독립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장군으로, 칠레와 페루의 독립을 이끌었다. 그는 고립된 쿠요 지방의 총독이 되어, 남미 내에서 스페인 제국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적 기반을 마련했다. 산 마르틴은 칠레를 통해 해상으로 페루에 접근하는 계획을 세웠으며, 이를 '대륙 계획'이라 불렀다. 1815년, 그는 '안데스 군'을 조직하여 병력과 자원을 모은 후, 1816년부터 칠레를 재정복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군대는 주로 리오플라텐세와 망명한 칠레인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를 위해 다수의 민병대와 흑인 및 인디오들도 포함되었다. 산 마르틴은 ‘Zapa 전쟁’이라 불리는 비정규전 전략을 통해, 실질적인 전투 전에 이미 실질적인 압박을 가하며, 군사적 준비를 갖추었다. 산 마르틴은 결국 1817년 1월, 5000명 이상의 병력을 이끌고 안데스를 넘으며, 여러 경로를 통해 적군을 혼란시키고 본격적으로 칠레 독립을 위한 전투를 시작했다.
마르코 델 폰트는 군을 모으기 어려워 결국 1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라파엘 마로토에게 지휘를 맡겼다. 산 마르틴은 두 개의 군단으로 병력을 나누어 서쪽과 동쪽에서 동시에 공격하는 전략을 취했다. 1817년 2월 12일, 차카부코 전투에서 산 마르틴의 전략은 실패하였지만, 후속 공격으로 결국 승리했다. 전투에서 600명의 스페인 군인이 사망하고 500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칠레군은 130명이 사망하고 180명이 부상을 입었다. 전투 후, 산 마르틴은 전투 결과를 보고하며 "24일 만에 캠페인을 마쳤고, 칠레를 자유롭게 했다"고 밝혔다. 이어서 2월 14일, 안데스 군은 산티아고에 입성했고, 칠레 의회는 산 마르틴을 칠레 총독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그는 이를 거부하고 오히긴스를 총독으로 선출했다. 오히긴스는 2월 17일 칠레 국민에게 공개 발언을 하며, 국민들의 단합과 국가 건설을 촉구했다. 이후 오히긴스는 산 마르틴에게 칠레 독립군을 조직하도록 맡겼고, 빠르게 남쪽으로의 군사 진격이 시작되었다.
산 마르틴은 차카부코 전투 후 적군을 추격하지 않고 재편성할 시간을 주어 1600명의 스페인 군이 페루로 퇴각할 수 있게 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를 통해 차카부코가 칠레 독립 전쟁의 결정적 전투가 되지 못했다고 본다. 또한, 산 마르틴은 오히긴스의 조언을 무시하고 곧바로 콘셉시온으로 진격하지 않아, 현실적으로 스페인 군은 탈카우아노에서 재편성하고 남부에서 게릴라 활동을 강화했다. 1818년 4월 4일, 라스 에라스는 콘셉시온 근처에서 스페인군에 의해 공격을 받았고, 이후 오히긴스와 함께 스페인군을 물리쳤다. 그러나 탈카우아노 포위전은 실패로 끝났고, 이후 스페인은 마리아노 오소리 지휘 하에 재차 군을 증강해 칠레를 재침공했다. 스페인군은 5000여 명으로 추정되며, 오히긴스와 산 마르틴은 대응하여 9000명의 병력을 모았다. 1818년 3월 19일, 캉차 라야다 전투에서 스페인군이 승리해 병력을 완전히 흩어 놓았다. 그러나 패배 후에도 대다수 병력은 질서 있게 퇴각했으며, 이후 15일 만에 다시 전투 준비를 마친 후 재정비했다.
1818년 4월 5일, 마이푸 전투에서 산 마르틴은 5000명의 독립군을 이끌고 5000명의 스페인군과 싸웠다. 전투는 독립군이 승리하면서 끝났고, 스페인군은 2000명이 사망하고 2463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 승리로 칠레 독립은 크게 진전되었지만, 스페인은 1818년 5월 새로운 원정대를 준비했으나 자원 부족으로 실패했다. 같은 해, 4월 8일, 후안 호세와 루이스 카레라 형제는 스페인과 연합해 오히긴스와 산 마르틴을 체포하려다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마누엘 로드리게스는 5월 26일 살해되었다. 이후, 스페인군은 몇몇 부대를 재조직해 1818년 5월 18일 칸디스에서 원정대를 출발시키지만, 이는 이미 늦었고, 칠레 독립군은 이를 차단했다. 또한, 10월 26일, 블랑코 엔칼라다 지휘의 칠레 해군은 스페인 원정대를 분산시켜 격파했다. 결국, 스페인의 칠레 내 주도권은 약화되었고, 이들 군대는 점차 게릴라 전투로 이어졌다.
칠레 독립군은 '죽음의 전쟁'이라 불리는 전투에서 스페인의 비정규군과 싸웠다. 이 전쟁은 대규모 전투보다는 산적과 게릴라 전투, 약탈, 매복 등으로 특징지어졌고, 스페인 측은 원주민들을 포함한 불규칙한 군사 집단을 활용했다. 원주민들 중 많은 이들이 왕을 지지하며 스페인 측에 협력했다. 반면, 독립군은 원주민들과의 협력도 시도했다. 1818년 후반, 베나비데스는 분산된 스페인군을 재편성하고 반격을 시작했다. 그는 800명의 기병을 이끌고 독립군을 압박하며, 때로는 극단적인 잔혹행위를 벌이기도 했다. 독립군은 힘겨운 상황에 처해 있었고, 특히 내부 분열과 군대 부족이 문제였다. 베나비데스는 페루에서 지원을 받아 재정비하고, 새로운 전투를 시작했다. 이를 위해 그는 부하들에게 보상을 약속하며 원주민과 산적들을 모집했다. 독립군은 병력 부족과 분열로 어려움을 겪었고, 프레이레는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산티아고로 갔지만, 소규모 병력만 받았다.
프레이리는 벤아비데스가 로스 앙헬레스 근처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그 지역의 수비를 강화하고 추가 군을 파견했다. 하지만 9월 22일, 벤아비데스의 기습을 받아 라하 강에서 매복당하고, 오카롤 대령이 포로로 잡혀 처형되었다. 보급이 부족하고, 벤아비데스의 포위망에 갇힌 알카사르 대령은 결국 로스 앙헬레스 주민들과 군을 이끌고 칠란으로 퇴각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벤아비데스는 다시 매복을 하여, 민간인을 학살하고 알카사르에게 항복을 강요했다. 그 후, 벤아비데스는 라 프론테라 전역을 장악하며 1,800명의 정규군, 3,000명의 민병대, 2,000명의 아라우카니아의 기병을 모집했다. 이후 그는 콘셉시온을 점령하고, 프레이리가 있는 탈카우아노를 포위했다. 프레이리는 상기한 상황에서 급히 지원군을 보냈고, 11월 25일 탈카우아노에서 벤아비데스를 기습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알카사르의 군이 다시 독립군에 합류하면서 전투는 결정적 승리로 끝났다.
한편, 칠레 해군은 처음에는 무질서했으나, 1818년에 해군 지휘관 토마스 코크레인에 의해 재편성되었다. 1819년 코크레인은 칠레 해군을 이끌고 북쪽으로 향하여 칼라오 항을 공격했고, 이후 다시 남쪽으로 돌아와 1820년 2월 발디비아를 점령했다. 발디비아를 점령한 후, 코크레인은 발디비아 남쪽의 여러 도시를 차지하고, 발디비아에서 도망친 스페인 군을 추격했다. 코크레인은 안쿠드 공격에서 실패했으나, 그 이후 칠레는 발디비아를 포함한 남부 지역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1822년 '엘 토로 전투' 이후, 칠레는 오손오 지역을 최종적으로 병합하며, 칠레의 남부 지역에서 스페인의 영향력을 완전히 축소시켰다.
어쨌든, 산 마르틴과 오이긴스는 페루 부왕령 자체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할 때까지 위험이 지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따라서 산 마르틴과 코크란은 페루로 출발했다. 하지만 코크란의 대담하고 과감한 성격은 산 마르틴의 지나친 신중함과 충돌해 산 마르틴은 부왕에게 결정타를 날릴 수 있는 여러 기회를 놓쳤고, 결국 콜롬비아 에서 내려온 후 최후의 공세를 시작한 것은 시몬 볼리바르 였다. 이로 인해 칠레의 독립은 확고해졌다. 그러나 칠레의 마지막 스페인 영토였던 칠로에 섬은 오이긴스 의 후임자인 라몬 프레이레 정부 시절인 1826년에야 정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