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그레이브즈와 트위스티드 페이트, 미스 포츈이 등장하는 단편 소설이다. 작중 화자는 그레이브즈. 출처2. 본문
아, 빌지워터. 살인과 음모, 악취가 들끓는 지긋지긋한 시궁창... 하. 돌아오니 좋군. 빌지워터 만을 향해 노를 저었다. 등 뒤로는 망망대해가 펼쳐져 있고, 눈앞에는 항구도시의 불빛이 보기 좋게 빛났다. 발로란 대륙에서는 진보의 도시와 그보다 더러운 아랫동네에서 여러 건수를 올렸지만 상황이 점점 위험해졌다. 게다가 프린스가 제안한 일거리는 거절하기에 보수가 너무 좋았다. 헛수고나 마찬가지인 일이었지만, 터무니없이 큰돈이었다. 구린 냄새가 났어도 말했다시피 보수가 너무 짭짤했다. 우리가 돌아왔다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상황이 화끈하게 흘러갔다. 사라 포츈은 나와 트위스티드 페이트, 갱플랭크를 완전히 가지고 놀았다. 그 정신병자한테 맞선 사람은 그 여자가 처음이었다. 빌지워터 사람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놈과 배를 산산조각 냈다. 트위스티드 페이트와 나는 그 모습을 눈앞에서 바라봤다. 죽지 않은 것도 기적 같은 일이었다. 물론 그 여자한테는 나도 갚아야 할 빚이 있지만, 갱플랭크를 날려 버린 작전은 기가 막혔다. 듣기로는 빌지워터의 주인이 됐단다. 아직 선장 몇몇이 남아 있긴 하나, 그 여자한테 고개를 조아리거나 빌지워터 만 바닥으로 가라앉거나 둘 중 하나일 터였다. 오직 극소수만이 사라 포츈에게 맞서고 있다. 우리의 오랜 친구, 프린스도 그중 하나다. "집중하는 시늉이라도 할 수 없어? 경로를 벗어났잖아." 난 트위스티드 페이트를 노려봤다. 내가 땀을 뻘뻘 흘리며 힘을 쓰는 동안, 저 뺀질이는 앉아서 카드만 만졌다. 어차피 비쩍 말라서 노를 맡겨도 도움이 안 되겠지만, 데마시아 귀족이라도 된 듯이 나한테 이래라저래라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부아가 뒤집혔다. 사실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더 뚜껑이 열렸다. 물에 떠밀려서 남쪽으로 약 200미터 벗어났기 때문에 목적지로 가려면 더 열심히 노를 저어야 했다. "그럼 직접 하시지요, 나리." 나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안 돼." 트위스티드 페이트는 나무통 위에 카드 세 장을 뒤집어 두며 말했다. "난 바빠." 난 우거지상을 하고 어깨 너머로 위치를 확인했다. 바닷물 위로 마치 칼날처럼 튀어나온 뾰족한 바위가 보였다. 수면 위로 보이는 바위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늘 그렇듯, 보이지 않는 것들이 훨씬 위험하니까. 오랫동안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이곳은 '과부 바위'로 불렸다. 주위로 좌초되어 파괴된 배들의 잔해가 보였다. 바위 사이에 낀 돛대, 소용돌이를 따라 회전하는 판자, 썩은 채로 뾰족한 바위 위에 걸린 그물이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 선장들이 부흐루 파도 달램이에게 줄 돈을 아끼려다가 난 사고였다.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 아닐 수 없다. 다행히 우리가 탄 배는 3미터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이 낡아빠진 배의 이름은 '인트레피드호'. 한 시간 전에 처음 만났지만, 갈수록 마음에 들었다. 조잡하고 칠이 벗겨졌어도 아직 잘 버텨 주었다. 내 노 젓기 실력을 두고 불평하지도 않았다. 트위스티드 페이트는 카드 세 장을 차례로 뒤집더니 인상을 썼다. 그리고 다시 섞어 넣었다. 백색 선착장에서 출발한 뒤로 계속 똑같은 짓거리다. 카드를 보고 겁에 질린 듯하지만, 난 신경 쓰지 않았다. 야밤의 뱃놀이로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겠지만, 시도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난 그저 보수의 절반을 크라켄 주화로 미리 받아서 기쁠 뿐이었다. 나머지 절반은 받지 못하겠지만, 상관없었다. 거의 공돈이나 다름없으니까. 노를 젓다가 그의 얼굴로 바닷물이 튀었다. 녀석은 카드를 섞다가 멈칫하더니, 날 노려봤다. "조심 좀 하지?" 그래, 내가 조심해야지. "미안하군." 난 어깨를 으쓱하고 계속 노를 저었다. 그는 모자를 벗어 얼굴을 닦았다. 그리고 다시 날 노려보더니 모자를 썼다. 신비로워 보이기 위해 앞부분을 푹 눌러쓴 꼴이 나는 그저 우스웠다. 난 웃음을 참으면서 노로 수면을 때렸다. '철썩'하며 옆통수로 제대로 물이 튀었다. "거참." 그가 째려보며 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후벼 팠다. "일부러 그러는 거지?" "어쩔 수 없었어. 그렇게 차려입은 네놈 잘못이지. 근사한 코트를 걸치고 일주일에 한 번 목욕한다? 두고 볼 수가 있어야지." 나는 한 번 더 물을 튀겼다. 생각보다 많이 튄 탓에 그는 흠뻑 젖고 말았다. 뚜껑이 열린 녀석이 일어나서 내게 삿대질하자 배가 크게 흔들렸다. 겁에 질린 그는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하며 주저앉더니 배를 붙잡았다. 온갖 폼은 다 잡고 앉아 있더니 순식간에 물에 젖은 쥐 꼴이 됐다. 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강 유랑민 출신으로 인생의 절반을 빌지워터에서 살았는데도, 녀석은 '여전히' 수영을 못 했다. 그가 나를 노려보았다. 향수와 기름으로 정리한 머리는 해초처럼 늘어져 있었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모자란 자식." 그가 말했다. 나는 계속 노를 저었다. 세 번째 종소리가 빌지워터 항구에서 들려왔다. "여기야." 그가 카드를 확인하더니 말했다. 어깨너머로 울퉁불퉁한 바위가 보였다. 작은 섬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큰 바위였지만, 특별한 점은 전혀 없었다. "확실해?" "그래." 물에 젖어서 짜증이 났는지 날카롭게 대답했다. "몇 번이고 확인했어. 카드에 따르면 여기가 맞아." 트위스티드 페이트는 카드로 여러 재주를 부릴 줄 알았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장소에 드나들기도 했다. 도둑질에 매우 적합한 기술이었다. 카드를 마차에 던지자 마치 화약처럼 폭발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 밤에는 강 유랑민들 사이에서 옛날부터 전해지던 기술을 썼다. 결과는 대개 정확했다. 그의 지시에 따라 나는 바람이 향하는 방향으로 인트레피드호를 돌려 바위 가까이 댔다. 배가 마구 흔들렸지만, 나는 최대한 균형을 잡았다. 그리고 그의 신호에 맞춰 닻을 내렸다. 머리 위로 바위가 높이 솟아 있었다. "어떻게 올라가지?" "안 올라가도 돼. 카드에 따르면 성소는 '내부'에 있어." "입구가 안 보이는데." 그때 그가 웃으며 물속을 가리켰다. 나는 심장이 덜컹했다. "농담이지?" 지난번 빌지워터에 왔을 때, 난 대포에 몸이 묶인 채 바다로 떨어져 익사할 뻔했다.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구해주긴 했지만, 그날의 아찔한 경험을 되풀이하기는 싫었다. "농담 아니야. 싫으면 나 혼자 들어가고." "물건을 차지해 혼자서 잔금을 다 챙기려고? 그렇게는 안 되지." 이 더러운 자식은 전에도 돈만 챙겨서 혼자 내뺀 적이 있었다. 덕분에 나는 감옥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성소 같은 건 안 믿는다더니. '헛수고'라고 하지 않았나?" "그래, 말도 안 되는 미신이지. 하지만 만에 하나 진짜라면 내 몫을 받아야 하잖아?" 내가 코트와 신발을 벗는 동안 그는 실실 웃었다. 나는 총알과 시가가 물에 젖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 필트오버에서 새롭게 개조한 이중 총열 산탄총 '운명'을 방수포에 싸서 등에 동여맸다. 난 소매를 걷어 올리며 말했다. "그래서 입구가 어딘데?" 나는 칼날고기 떼가 없기를 바라며 잠수했다. 물속은 지독하게 춥고 어두웠지만, 나는 더 깊이 내려갔다. 물고기와 정체를 알 수 없는 형체들이 눈앞을 스쳤다. '저기로군.' 사방이 깜깜했지만, 그중에서도 '더 깜깜한' 부분이 보였다. 굴 입구였다.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카드로 확인한 내용이 맞았다. 굴 안으로 들어가자 바깥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훨씬 어두워졌다. 눈앞에 있는 내 손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좁았다. 팔을 휘저을 때마다 부드러운 돌벽이 양손 끝에 닿았다. 뒤를 돌아보자 푸른색 원이 보였다. 굴 입구였다. 남은 숨으로 수면까지 올라가려면 지금 돌아서야 했다. 더 들어갔다가는 되돌아갈 수 없었다. 난 그를 믿고 앞으로 나아갔다. 여기서 죽으면 다음 해로윙 때 네놈 앞에 나타나 주마. 눈앞에 빛이 보였다. 나는 바닥을 발로 차서 빛이 있는 쪽으로 헤엄쳤다. 출구인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예선용 밧줄 같은 촉수를 늘어뜨린 해파리였다. 가까이 가면 호되게 당할 수 있었다. 계속해서 헤엄쳤다. 핏빛 달이 떴을 때의 조수처럼 불안감이 점점 차오르기 시작했다. 벽이 앞을 가로막았을 때 막다른 길인 줄 알고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위로 솟구쳤지만, 바위에 머리를 찧을 뿐이었다. '단단하군.' 물이 차가워서 고통은 덜했으나 피가 나기 시작했다. 좋지 않았다. 포악한 상어 떼는 수 킬로미터 떨어진 피 냄새도 맡을 수 있었다. 독 안에 든 쥐가 된 기분이었다. 이번에야말로 꼼짝없이 물귀신이 될 것 같았다. 분명히 나갈 길이 있을 터였다. 나는 절박하게 주변을 더듬거렸다. 바위 표면에 나선형 무늬가 새겨져 있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폐가 오그라들고 힘이 빠질 때쯤, 마침내 틈을 찾았다. 틈을 통과하자 위에서 달빛이 쏟아졌다. 나는 헤엄쳐 올라가서 수면 밖으로 나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살았다!' 헤엄을 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곳은 동굴이었다. 뚫린 천장으로는 달빛이 비쳤다. 헤엄쳐서 밖으로 기어 나왔다. 사람 머리만 한 게들이 이리저리 달아났다. 불청객이 못마땅한 듯이 푸른색의 커다란 한쪽 집게발을 흔들었다. 상관없다. 나 역시 게를 싫어했으니까. 다리가 너무 많아서 징그러웠다. 먼저 방수포를 풀고 달빛 아래에서 운명의 상태를 확인했다. 장전 장치와 방아쇠, 모두 괜찮았다. 총알을 두 발 장전하고 나니, 훨씬 안심되었다. 장전된 운명을 손에 쥐고 있으면 두려울 게 없었다. "오래도 걸렸군."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무심한 표정으로 바위에 기댄 트위스티드 페이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카드 마술로 편하게 들어온 탓에 녀석은 보송보송했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이 자식아." "피가 나는데." 머리를 만지자 피가 묻어났다. "괜찮아. 안 죽어." 난 그러길 바라며 대답했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려고 하지만, 그는 걱정이 되는지 내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너무 좋아하진 마. 멀쩡하니까!" 주위를 둘러보니 벽에 구불구불한 무늬가 가득했다. 부흐루 인각이었다. 나는 한참 뒤에야 무슨 그림인지 알 수 있었다. "뱀이 잔뜩 있군." 난 굳이 안 해도 될 설명을 덧붙였다. 아무래도 완전히 헛수고는 아닌 모양이었다. "아직도 미신이라고 생각해?" 난 대답하는 대신 툴툴거렸다. 놈의 말이 맞는다고 하더라도 쉽게 인정할 수는 없었다. 우리가 의뢰받은 물건은 빌지워터에서 전설로 내려오던 것이었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대양의 말썽꾸러기나 소환사의 전설처럼 헛소리로 치부했으리라. 바로 '심해의 왕관'이었다. 누구든 이 왕관만 있으면 심해의 괴물들을 부릴 수 있다고 했다. 심해의 괴물과 함께라면 바다뱀 군도 주변의 해상 패권과 빌지워터를 장악할 수 있었다. 프린스가 탐내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심해의 왕관만 있으면 천하의 미스 포츈도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성소는 어디 있지?" "안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어." 그가 동굴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마 저기인가 봐." "더는 헤엄칠 일이 없으면 좋겠군." 나는 중얼거렸다. '통로'? 오히려 바위틈에 가까웠다. 비쩍 마른 녀석은 미꾸라지처럼 잘 통과했지만, 좀 더 다부지고 근사한 육체를 갖춘 나는 단추가 몇 개 떨어지고 나서야 겨우 몸을 밀어 넣었다. 출발 직전에 곱빼기로 먹었던 수프를 떠올리며, 나는 낮은 소리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트위스티드 페이트는 조용히 하라는 듯이 손가락을 들어 입술에 갖다 댔다. 마침내 통로를 빠져나온 나는 쓰러지며 하마터면 바닥에 얼굴을 부딪칠 뻔했다. 그때 강한 악취가 콧구멍을 때렸다. 학살의 부두에서 맡을 수 있는 생선 내장 냄새와 비슷했다. 눈이 따끔거리며 끔찍했던 옛 기억이 떠올랐다. 천장에서 달빛이 새어 나오긴 했지만, 동굴 안은 여전히 어두웠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주변에 쌓인 쓰레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온갖 종류의 잡동사니가 사방에 가득했다. 크기는 처음 동굴보다 넓었고, 쓰레기 더미 틈새로 부흐루 인각이 보였다. 마찬가지로 뱀 모양이었다. 한쪽 구석에는 시커먼 웅덩이가 있었다. 아마 조금 전에 익사할 뻔했던 통로로 이어지는 듯했다. 다만 이 쓰레기들은 자연적으로 밀려온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수집품이 분명했다. 게다가 기이한 방식으로 정돈돼 있었다. 비록 밧줄의 매듭처럼 정신이 꼬여 버린 사람의 솜씨 같긴 했지만. 나무통과 상자, 궤짝, 그물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낚시 도구와 녹슨 작살, 썩어 버린 밧줄도 보였다. 조개껍데기와 돌멩이가 탑을 이루었고, 악취가 진동하는 항아리가 유목으로 만든 선반을 장식했다. 벽에는 녹슨 닻과 따개비로 뒤덮인 선수상이 세워져 있었다. 풍만한 몸매의 인어 모양을 한 선수상은 바위 사이에 낀 채로, 마치 피부가 벗겨지듯 칠이 일어나고 있었다. 머리 위로는 열십자 모양으로 놓인 부러진 돛대가 보였다. 마치 서까래와 같은 돛대에는 해초가 길게 늘어져 있었고, 그 옆에는 노끈과 머리카락, 돛으로 묶은 생선 뼈와 나뭇가지가 느리게 회전했다. 그리고 반대편 벽의 그림자 속에서, 장식품들 사이에 반쯤 파묻힌 기이한 뭔가가 눈에 들어왔다. "저건가?" 내가 속삭였다. 돌벽을 깎아서 만든 그 제단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바다뱀 무리 같았다. 붉은지느러미뱀, 쓸개즙뱀, 검은목가시뱀 등 종류도 다양했다. 주위로는 수백 개의 불 꺼진 양초와 바닥을 뒤덮은 촛농, 여러 가지 동물의 두개골이 보였다. 사람의 두개골도 몇몇 있었다. "심해의 성소야." 트위스티드 페이트는 감탄한 듯이 말했다. 강 유랑민 출신인 녀석은 예전부터 미신을 맹신했다. "확실해." 그가 성소 쪽으로 조심해서 걷기 시작했다. 나도 그림자 방향을 주시하며 천천히 뒤를 따랐다. 보통 이쯤 되면 사고가 터지기 마련이었다. 우리 둘이 함께하면 늘 그랬다. 물론 녀석에게서도 눈을 떼면 안 됐다. "왕관을 혼자 꿀꺽했다가는 죽을 줄 알아." 내가 으름장을 놓자 그는 대답도 하지 않고 눈을 부라렸다. 그때 뭔가 눈에 들어왔고, 내 심장은 멎는 듯했다. 무릎 높이의 돌선반에 한 노파가 누워 있었다. 제대로 보지 않았으면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젠장." 나는 참았던 숨을 다시 쉬었다. 심장은 녹서스 군악대의 북소리처럼 뛰기 시작했다. 노파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양손을 앞으로 모은 채로 누워 있었다. 겉모습만 봐서는 죽은 게 맞는 듯 보였다. 옷은 다 떨어져 있었고 피부색은 죽은 물고기와 비슷했다. 빛 때문인지, 아니면 오히려 어두워서인지 몰라도 투명한 피부 아래로 비치는 혈관은 검은색이었다. "저기, 웬 할멈이 있는데." 트위스티드 페이트는 성소를 살피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뭐?" "저기 웬 할멈이 누워 있다고." 나는 노파를 바라보며 조금 더 크게 대답했다. 움직임은 전혀 없었다. 그가 돌아봤다. "뭐지?" "몰라. 자는지 죽었는지." 나는 냄새를 맡아 보았다. "구린내가 나는 걸 보니 죽었나 보군." 트위스티드 페이트는 미간을 찌푸렸다. 걱정할 때면 으레 짓는 표정이었다. 형편없는 카드패가 손에 잡히거나, 필트오버에서 바가지 쓰고 산 맞춤 재킷에 얼룩이 졌을 때 봤던 얼굴이었다. "그럼... 그냥 둘까?" 좋은 생각이었다. 난 말을 돌렸다. "왕관은?" "안 보여. 여기 있어야 하는데..." 그가 성소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함께 왕관을 찾으려고 앞으로 다가간 순간, 뒤에서 노파의 콧방귀 소리가 들렸다. 나는 산탄총을 들고 재빠르게 돌아섰지만, 노파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살아 있었군.' 나는 정신을 차리고 총구를 위로 올렸다. 잠들어 있는 노파를 총으로 쏠 수는 없었다. 냄새가 아무리 지독하더라도 그런 짓을 했다간 천벌을 받을 것이 뻔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나는 노파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몸을 돌렸다. 그때 무언가 발에 밟혔다. 발에 밟힌 그 물체는 움직이며 비명을 질렀다. 썩어가는 돛천 아래에 또 다른 사람이 파묻혀 있었다. 남자는 겁에 질린 개처럼 허우적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옷차림이나 금귀걸이로 봤을 때 선원처럼 보였지만, 오랫동안 굶주린 것 같았다. 그때 다리에 걸린 족쇄가 보였다. 족쇄는 사슬로 벽에 고정돼 있었다. 위험하지 않다고 판단한 나는 총구를 위로 올렸다. 그리고 번쩍이는 카드를 손에 쥔 트위스티드 페이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정해. 해칠 생각은 없으니까." 나는 손을 들어 보이며 남자에게 말했다. "나 좀 살려줘." 남자는 나와 잠자는 노파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난 왕관을 찾으러 왔지, 제물이 될 생각은 없었다고! 제발 나 좀 여기서 구해줘!" 공포에 사로잡힌 남자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얼마나 여기에 갇혀 있었을까? 그리고 대체 왜? "이봐, 진정해." 나는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여기서 나가게 해 줘, 제발 나 좀—" "입 좀 다물게 해 봐."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낮게 말했다. "자꾸 나한테 이래라저래라할래?" 나는 삿대질을 하며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때처럼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말하자면 트위스티드 페이트에게 배운 간단한 속임수였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으로 상대의 이목을 끈 다음, 원하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고, 눈치채지 못하게 공격하는 방법이었다. 의도한 대로 남자의 시선이 트위스티드 페이트를 향했을 때, 나는 가까이 접근해 개머리판으로 얼굴을 강타했다. 죽이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오랫동안 정신을 잃기만 하면 충분했다. 나는 어깨너머로 노파를 바라봤지만, 귀가 완전히 먹었는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듯했다. 선원은 완전히 나가떨어졌다. 슬슬 노파한테 큰 문제가 생긴 게 아닌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잘했어."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무릎을 꿇어 남자를 살펴봤다. 어딘가 눈에 익었다. "이놈 누군지 알아." 옷깃을 잡아당기자 단추가 떨어지며 작은 문신이 드러났다. 겹쳐진 권총 두 자루였다. "역시 미스 포츈 패거리였어. 그것도 꽤 높은 놈이야. 데리고 가면 큰돈을 받을 수 있겠는데?" "프린스만 왕관을 노린 게 아니었군." 그가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 그 여자라면 돈을 더 쳐주려나?" "일단 찾기나 하자고." "그런데 제물이라니, 무슨 뜻이었을까?" 노파는 미스 포츈의 심복을 제압할 만큼 강해 보이진 않았다. 근처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았거나, 힘을 숨겨 두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시간을 끌어서 좋을 건 없었다. "나가자. 예감이 안 좋아." 내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조금만 기다려 봐, 거의 다 됐어." 내가 그에게 도망가자고 조르자니 어색했다. 보통은 반대였으니까. 난 노파를 한 번 더 바라보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대신 서둘러." 그는 바닥에 앉더니 대칭 형태로 카드를 뒤집어서 놓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발밑을 조심하며 총구로 동굴 여기저기를 들쑤셨다. 변색된 주화가 눈에 보였다. 그중에는 크라켄 주화도 있었다. 나는 몰래 주화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왕관이 정말 여기 있는 거야?" 내가 물었다. 그가 카드를 들어 보였다. 카드에는 뱀 모양의 황금색 왕관이 그려져 있었다. "그 카드는 처음 보는데." "나도 그래. 방금 생긴 카드야. 왕관은 분명히 이 근처에 있어." 어떻게 생겨 먹은 카드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동굴 내부를 계속 수색하다가, 누군가 우리를 감시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결코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어두운 동굴 내부를 이리저리 살폈다. 시야 가장자리에서 어렴풋이 움직임이 보이다가, 눈을 돌려 초점을 맞추면 사라졌다. 불길한 예감을 떨치려고 했다. 게를 보고 과민 반응한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한시라도 빨리 나가는 편이 나을 듯했다. 트위스티드 페이트는 혼자서 중얼거리더니 카드를 들었다. 그리고 얼굴을 찌푸리며 날 돌아봤다. "누군가 지켜보는 거 같지 않아?"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었다. 좋게 생각해야 할지, 아니면 나쁘게 생각해야 할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나는 또다시 움직임을 포착하고, 뒤집어진 채 바닥에 놓인 양동이를 본능적으로 바라봤다. 방금... 양동이가 움직였나? 계속 주시하자 양동이가 조금씩 움직이더니 다시 멈췄다. 그동안 별 이상한 꼴을 다 보면서 살아왔지만, 살금살금 움직이는 양동이는 생전 처음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몸을 숙여 양동이를 살펴봤다. 양동이에 난 구멍으로 눈이 보였다. 크고 노란 눈이 나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찾았다, 이 자식." 나는 총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러자 녀석은 양동이를 뒤집더니 달아났다. 나는 방아쇠를 당길 뻔했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그 정체는 문어였다.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깔깔대며 웃는 동안 문어는 놀라운 속도로 바닥을 기었다. 눈알이 하나뿐인 문어는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뒤로 물러섰다. "저런 건... 처음 보는데?"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말했다. 초록색 문어는 몸을 흐느적거리며 노파가 잠들어 있는 돌선반으로 향하더니, 촉수를 뻗어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냥 둘 거야? 깨우면 어쩌려고!"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소리쳤다. "그럼 총으로 쏘라고? 저 할멈이 총소리는 못 들을 거라 생각해?" 그는 카드를 쥐고 있었지만, 노파를 맞출까 봐 걱정됐는지 던지지는 않았다. "손으로 잡기라도 하든가!" "외눈박이 문어를? 난 죽었다 깨어나도 못 해, 토비아스." 본명을 부르자 그가 인상을 썼다.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이제 '트위스티드 페이트'라니까." "유치하고 허세 가득한 그 이름은 절대로—" 그 순간, 노파가 몸을 떨며 콧바람을 뿜었고, 우리는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문어는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마치 기괴한 보닛 모자처럼 촉수로 노파의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커다랗고 노란 눈은 계속해서 껌벅였다. "이거 좋지 않은데." 난 중얼거렸다. 그때 노파가 벌떡 일어섰다. 평정심을 되찾고, 노파가 일어났을 때 내가 낸 비명을 돌이켜 보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트위스티드 페이트의 비명은 더 민망한 수준이었다. 노파의 눈이 떠졌다. 눈동자가 없는 흐릿한 눈이었다. 앞을 못 보는지는 몰라도, 노파는 우리 쪽으로 몸을 돌렸다. "또 쥐새끼들이 기어들어 와서 도둑질을 해?" 노파가 말했다. 딱 머리에 문어를 뒤집어쓴 바다 마녀가 낼 법한 그런 목소리였다. "더러운 쥐새끼들, 네놈들한테 줄 건 없어." "할멈, 잠깐만." 노파의 맨발이 바닥에 닿는 동안 내가 말했다. 총을 조준한 상태였지만, 노파는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우리는 쥐새끼도 아니고 도둑도 아니야. 아니, 도둑은 맞지만—" 나는 트위스티드 페이트를 바라봤다. "뭐라고 말 좀 해 봐." "우린 심해의 왕관을 찾고 있다. 순순히 넘기는 편이 좋을 거야." 마녀의 손에는 뱀 모양의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아까는 못 봤던 물건이었다. 마녀는 지팡이를 짚으며 몸을 일으키더니, 흐릿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웃었다. 이가 전부 빠져 버린 잇몸이 드러나며 침이 밖으로 흘렀다. "멍청한 쥐새끼들. 이미 심해의 괴물에게 잡아먹힐 신세가 됐는데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군." 마녀가 지팡이로 지면을 때리자 진동이 동굴 전체와 시커먼 수면을 타고 퍼져 나갔다. 잠시 후,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변을 둘러싼 어둠 속에서 '뭔가'가 떨어져 나왔다. 크기도 어마어마했다. "게였군. 하필이면 게라니." 보통 게가 아니었다. 난 다리가 여럿 달렸다고 뭐든 무서워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것들은 달랐다. 일단 크기부터 작은 마차 수준이었다. 잘못 걸렸다간 뼈도 못 추릴 듯했다. 게들은 푸른색의 거대한 집게발을 휘저으며 우리 쪽으로 접근했다. 확실히 크기가 작았을 때와는 위압감이 비교되지 않았다. 물속에서도 여러 마리가 솟아나더니, 집게발을 딸깍이며 게걸음으로 다가왔다. "이거나 먹어라!" 나는 소리를 지르며 이중 총열의 탄환을 발사했다. 귀가 먹을 듯한 총성과 함께 거대한 게가 뒤로 밀려나며 붉은빛이 번쩍였다.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카드를 날리자 폭발이 일어나며 게들이 불타올랐다. 나는 총을 재장전한 다음 집게발을 산산조각 냈다. 게 껍데기와 질척한 게살이 사방으로 튀더니, 거대한 게가 휘청거렸다. 눈자루와 턱 쪽으로 두 번째 총알을 날리자 게가 뒤집어졌다. 역시 운명의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한 놈이 트위스티드 페이트의 옆구리를 노리며 달려들었다. 내가 소리치자, 그는 몸을 숙여 집게발을 피하면서 카드를 날렸다. 카드가 명중하는 순간 황금색 빛이 번쩍이더니, 게가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나는 재장전한 운명으로 그 녀석을 물속으로 다시 돌려보냈다. "여기서 나가야 돼!" "왕관 없이는 못 가!"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집게발을 피하며 대답했다. 달라진 모습을 보여 주려는 것일까? 예전의 그는 상황이 나빠지면 내게 뒤처리를 맡기고 도망치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제는 변했다고 하더니,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 약속을 지킬 생각인 듯했다. 정성은 갸륵하지만,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러다 뒈지면 왕관이 무슨 소용이야?" 내가 소리쳤다. 한 번 더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집게발 하나가 총을 잡아채면서 조준이 흔들렸다. 총알은 심해의 성소를 박살 냈다. 미친 듯이 낄낄거리며 웃던 바다 마녀가 갑자기 화를 내며 비명을 질렀다. 나는 총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집게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놔, 이 자식—" 그때 카드 두 장이 날아와 눈자루를 날려 버렸다. 그제야 게는 비틀거리며 멀어졌고, 총을 쥐고 있던 집게발에도 힘이 풀렸다. 나는 트위스티드 페이트에게 고개를 까닥였지만, 그는 성소가 있던 곳을 바라봤다. 처음부터 속이 비었던 것인지, 내 오발탄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돌무더기만 남아 있었다. "저게 뭐야." 내가 말했다. 누군가의 무덤이었는지, 말라비틀어진 유골이 돌무더기 사이로 삐져나왔다. 두개골 위에는 색이 바랜 왕관이 얹혀 있었다. 황금빛을 내는 그 왕관의 형태는 마치 뱀과 같았다... 나는 마녀를 바라봤다. 마녀는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무섭게 우리 쪽을 쏘아보더니,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머리를 다쳐서 헛것이 보인다고 생각했던 나는 몇 번이고 눈을 껌벅였다. 하지만 헛것이 아니었다. 마녀는 약 두 뼘 정도 바닥에서 떨어져 있었다. "이런." 마녀가 소리를 지르며 지팡이를 우리 쪽으로 뻗자, 공중에 '구멍'이 나타났다. 분명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다른 단어로는 표현하기 어렵다. 처음에는 대포알만 했지만, 선체의 균열처럼 빠르게 커지더니 얼음장 같은 바닷물이 쏟아졌다. 발이 미끄러진 나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구멍 안에서는 무언가 움직이고 있었다. 무지막지한 크기의 노란색 눈이었다. 구멍 너머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동안 눈의 홍채가 수축했다. 마녀의 머리에 달라붙은 문어의 눈보다 백 배, 아니 천 배는 커 보였다. 까마득한 심해의 존재가 마치 낚싯줄 끝에 달린 미끼인 양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잠시 후, 눈이 멀어지더니 거대한 촉수 두 개가 구멍을 통해 밀고 들어왔다. 이중 총열의 총알을 동시에 발사하자, 촉수 하나가 파란색 액체를 뿜으며 바닥에 떨어졌다. 촉수는 절단된 뒤에도 계속 꿈틀거렸다. 다른 촉수는 거대한 게를 집어 들어 구멍 안으로 던져 넣었다. 마녀는 공중에 뜬 채로 사악한 미소를 띠었다. 괴물이 우리를 끝장내는 광경을 즐겁게 지켜보는 듯했다. "왕관을 챙겨!" 나는 몸을 일으키며 산탄총 탄약 두 개를 집었다. 또다시 거대한 눈알이 구멍 너머에서 나타나 트위스티드 페이트를 바라봤다. 내가 소리를 지르며 팔을 휘젓자 시선을 돌렸다. 그때 촉수 하나가 튀어나와 내 몸을 휘감았다. 갈비뼈를 부술 기세로 옥죄어 오는 촉수는 나를 공중으로 들어 올리더니 구멍 안으로 끌고 갔다. 나는 늦기 전에 총을 들어 눈알을 조준했다. 눈알의 주인은 보통 바다 괴물과 다르게 지능이 있는지, 총구를 보고 위험을 알아차린 듯 뒤로 빠르게 물러섰다. 하지만 총탄을 피하지는 못했다. 괴물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나는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그리고 계속해서 밀려드는 바닷물에 휩쓸려 벽에 정통으로 충돌했다. 다행히 총을 쥔 손은 풀지 않았다. 물을 조금 먹긴 했지만, 다시 필트오버로 돌아가 새 총을 의뢰하지는 않아도 될 듯했다. 나는 캑캑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빌지워터 만의 바닷물 중 절반은 마신 듯한 기분이었다. 그때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두개골에서 왕관을 벗겨내더니 내 쪽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 뜨자고." 나는 재빨리 일어났다. 잠깐이지만, 구멍 너머의 괴물은 물러난 듯 보였다. 바닷물은 계속 흘러들어 동굴 안은 무릎까지 물이 차올랐다. 온갖 쓰레기들이 떠다니는 상황에서 거대한 게들은 어쩔 줄 모른 채 서성거렸다. 마녀에게 붙잡혔던 선원은 정신을 차렸는지, 바위 위에 올라가서 겁에 질린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그럴 만했다. 여전히 사슬에 묶인 상태에서 물이 차올랐으니 당황할 수밖에. 나는 남자를 풀어 줄 요량으로 쇠사슬을 조준해 방아쇠를 당겼지만, 총알은 발사되지 않았다. 물 때문에 고장이 난 게 분명했다. "미안하네, 친구."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마녀는 왕관을 챙긴 트위스티드 페이트를 보더니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리고 발끝을 얼음장 같은 바닷물에 담근 채로 우리 앞으로 날아왔다. 그때 그가 내 쪽으로 왕관을 던졌다. "왜 나한테 줘?" 물소리로 시끄러웠기에 나는 크게 소리쳐 물었다. "나한테 맡기면 네가 불안해할까 봐!" 잠시나마 곰곰이 생각했다. 그의 대답은 의외였다.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이대로라면 녀석을 다시 믿어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덕분에 마녀는 이쪽을 노려보며 사악한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난 미신을 믿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멍청한 편도 아니었다. 난 다시 왕관을 그에게 던졌다. "이제 믿어. 어느 정도는 말이지." 나는 다시 마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뒤로 생겨난 구멍에서 거대한 노란 눈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총에 맞아서인지 눈에 상처가 보였다. 나는 잠시나마 마음이 흡족했다.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불타는 카드 세 장을 날렸다. 하지만 마녀는 무심한 손짓으로 카드를 튕겨 내 버리더니, 우리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가 없이 썩어 버린 잇몸을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우리를 끝장낼 생각인 듯했다. "어서 도망쳐!" 나는 총을 어깨에 메며 소리쳤다. 방수포로 쌀 겨를 따위는 없었다. 이 난리가 끝나고 다시 손보면 될 것이다. "밖에서 보자고." 그가 윙크하며 대답했다. 난 녀석이 기다리리라 믿었다.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쥐새끼들을 잡아!" 그때 마녀가 소리쳤다. 마녀가 지팡이를 들자 거대 괴수가 구멍을 뚫고 나오려는 듯이 앞으로 돌진했다. 거대한 촉수들이 우리를 향해 뻗어 나왔다. 이제 퇴장할 시간이었다. 트위스티드 페이트는 카드로 수작을 부리더니 왕관과 함께 사라졌다. 이제 내 차례였다. 나는 촉수를 피해 시커먼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올 때 지났던 통로와 연결되지 않는다면, 아주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 있었다. 나는 잠수해서 헤엄치기 시작했다. 눈앞이 캄캄했지만, 한시가 급했다. 벽에 부딪힌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더 끔찍한 존재가 뒤를 쫓고 있었으니까. 다행히 내 예감은 적중했다. 바위 아래로 헤엄쳐서 반대편으로 건너오자 첫 동굴이 나왔다. 그때 격노한 바다 마녀의 비명이 들려왔다. 당장이라도 거대한 촉수가 나를 낚아챌 것 같았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나는 다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수면 밖으로 나와 급하게 숨을 쉬었다. 돌아올 때는 조금 더 쉬울 줄 알았는데, 이번에도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그때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나를 붙잡아 배 위로 끌어 올렸다. 한참을 애쓴 끝에, 그와 나는 인트레피드호에 다시 오를 수 있었다. "왜 이렇게 무거워?" "그러는 너는 왜 이렇게 비실비실해?" 바다 마녀나 거대 괴물이 계속 쫓아오는지 확실하지 않았지만, 뭉그적거려 봐야 좋을 건 없었다. 나는 노를 젓기 시작했다. 과부 바위 너머에서 배 한 척이 우리를 맞이했다. '어센디드 임프레스호'라는 이름의 잘빠진 쾌속정이었다. 갑판은 금박으로 장식했고, 선수상은 초월의 여제를 상징하는 듯이 고양이 머리를 한 여자 형태였다. "프린스가 왕관을 손에 넣고 싶어 안달이 났나 보군." 쾌속정이 다가오자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말했다. "그러게." 잠시 후, 어센디드 임프레스호가 옆에 나란히 서더니 승선용 그물이 내려왔다. 선원들은 우리를 급하게 끌어올렸다. 배에 오르자 프린스와 부하들이 우리를 환영했다. 프린스는 특이한 인간이었다. 슈리마 제국 황제의 후손을 자처하며 늘 얼굴에 황금색 칠을 하고 다닌 그의 보수는 늘 짭짤했다. "물건은?" 프린스가 물었다. 안달이 났는지 황금색 입술을 번뜩이며 입맛을 다셨다. "보수는?" 내가 대답했다. 그때 크라켄 주화가 담긴 주머니 두 개가 발치에 떨어졌다. 나는 몸을 숙여 확인했다. 주머니는 묵직했다. 역시 보수 하나는 잘 쳐주는 인간이다.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왕관을 건네자 프린스가 경외하며 낮게 속삭였다. "심해의 왕관." 그리고 잠시 바라보더니, 황금색 머리 위에 왕관을 올렸다. 얼굴이 활짝 핀 프린스는 감사의 표시로 우리에게 고개를 까딱한 후에, 앞 갑판으로 가더니 대양 쪽을 바라보며 양팔을 높이 들었다. "일어나라!" 프린스가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심해의 괴물들이여, 일어나 내 명령에 복종하라!" 부하들이 기대에 찬 눈으로 프린스를 바라보는 동안, 나는 트위스티드 페이트에게 우리 배로 내려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왕관이 정말로 심해의 괴물을 불러 내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그러니 가짜로 판명되기 전에 자리를 뜨는 것이 상책이었다. 하지만 오늘 밤 그 난리를 겪고 나니, 진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진짜라면, 더더욱 멀리 벗어나야 했다. 바다 마녀도 자기 물건을 함부로 다루는 이 상황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터였다. 역시나, 생전 처음 보는 크기의 바다 괴물이 어센디드 임프레스호 우현에서 솟아났을 때,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항구로 미친 듯이 노를 저으며 이미 2킬로미터 넘게 거리를 벌린 상태였지만, 트위스티드 페이트와 나는 괴물의 크기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런." 내가 중얼거렸다. 그는 말문이 막힌 듯했다. 바다에 빠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녀석은 입을 떡 벌린 채로 서서 멀리 보이는 바다 괴물을 넋 놓고 바라봤다. 어센디드 임프레스호 갑판 위로 여전히 양팔을 위로 뻗은 프린스가 어렴풋이 보였다. 바다 괴물은 계속해서 솟아났다. 자그마한 섬으로 착각할 정도로 컸다. 물론 섬에서는 볼 수 없는 사냥용 발광 미끼와 배의 용골과 맞먹는 이빨, 거대한 촉수, 달과 비슷한 크기의 창백한 눈알이 달려 있긴 했지만. 거대 괴수가 느릿느릿하게 촉수를 뻗어 어센디드 임프레스호를 감싸자, 배가 기울어지더니 대포와 선원들이 바다로 빠졌다. 프린스는 여전히 앞 갑판에 매달려 있지만, 괴수가 거대한 턱으로 선두를 베어 물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다섯 번째 종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어센디드 임프레스호와 거대 괴수는 자취를 감추었다. "이런." 나는 또다시 중얼거렸다. 우리의 예상을 벗어난 전개였다. 잠시 후, 나는 다시 노를 저었다. 백색 선착장에 배를 묶고 땅을 다시 밟은 뒤에야, 우리는 말을 할 수 있었다. "그것참... 대단했어." 내가 입을 열었다. "대단했지." "이제 바다 마녀한테 쫓기는 신세가 된 건가?" "그렇겠지." 우리는 말없이 빌지워터 만 너머를 바라봤다. "한잔할까?" 한참 뒤에 그가 정적을 깼다. 그 순간 마녀의 동굴에서 슬쩍한 크라켄 주화가 떠올랐다. 빨리 써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지." 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내가 살게." 탁자 위에 발을 올린 채, 사라 포츈은 뒤로 몸을 기댔다. 화려한 모양의 술잔을 홀짝이며 아무렇지 않은 듯 연기했지만, 다른 한 손은 코트 주머니에 숨겨 둔 권총을 움켜쥐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옛 주화와 유물, 귀한 보석이 잔뜩 쌓여 있었다. 녹청과 따개비, 말라붙은 해초가 표면을 장식했다. 학살 함대 절반을 사고도 남을 수준이었지만, 사라 포츈은 짐짓 무심한 표정을 지었다. "내 부하를 돌려주고 이 보물까지 넘기시겠다." 포츈은 보물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조건은?" 바다 마녀는 흐릿한 눈으로 사라 포츈을 응시했다. 하지만 머리에 달라붙은 생명체의 노란 눈은 깜빡였다. "심해의 괴물들에게 약속했던 쥐새끼 두 마리. 그것들만 잡아 오면 더 많은 보물을 안겨 주지..." |
3. 룬테라 이야기: 빌지워터 | '이중 배신'[1]
[1] 해당 영상에서는 소설 이후의 내용이 전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