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5:16:42

짐 크레이튼

파일:Jim-Creighton-NBL.png
이름 짐 크레이튼
James "Jim" Creighton Jr.
출생 1841년 4월 15일
뉴욕주 뉴욕시 맨해튼
사망 1862년 10월 18일 (향년 21세)
뉴욕주 뉴욕시 브루클린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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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 투수/2루수
투타 우투우타
소속 팀 영 아메리카 (1857)
브루클린 나이아가라스 (1858~1859)
뉴욕 스타 클럽(1859)
브루클린 엑셀시어스(1859~1862)

1. 개요2. NABBP 참가 이전3. 슈퍼스타의 등장과 죽음4. 경기 스타일5. 영향과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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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전 야구선수로, 미국 야구 최초의 슈퍼스타이다.

야구 역사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이며 그를 시작으로 미국 야구는 점점 프로화로 접어들게 된다.

2. NABBP 참가 이전

짐 크레이튼은 1841년 맨해튼에서 태어났다. 16살 때 브루클린으로 이주한 뒤 야구, 크리켓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는 브루클린에서 사귄 친구들과 함께 동네 팀인 영 아메리카를 만들었다. 동네 팀이었던 영 아메리카는 얼마 가지 못해 해체되었지만 크레이튼은 브루클린 나이아가라스에 스카우트되어 2루수로 자리잡았고, 마지막까지 키스톤 콤비를 이루는 조지 플랜리와 만나게 된다.

그러던 중 나이아가라스는 같은 뉴욕에 있던 뉴욕 스타 클럽과 대결하게 되었고 크게 지고 있는 상황에서 투수를 크레이튼으로 교체한다. 크레이튼은 이 경기에서 압도적인 투구를 보이면서 단연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나이아가라스는 그해에 해체되었고 크레이튼은 플랜리와 함께 스타 클럽으로 이적한다.

그리고 1859년 말에는 엑셀시어스의 에이스이자 클럽의 임원이었던 에이사 브레이나드[1]는 그를 팀으로 데려오기 위해 선수에게 뒷돈을 줬다는 의혹을 받으면서까지 크레이튼과 플랜리를 엑셀시어스로 데려오게 된다. 이 뒷돈 월간 500달러는 그가 바로 최초의 직업 야구 선수라는 것을 나타낸다. 실제로 그는 계속 크리켓과 야구만 했지만 생활에는 지장이 없는 뉴욕의 유명인사였다.

3. 슈퍼스타의 등장과 죽음

엑셀시어스로 이적한 짐 크레이튼은 1860 시즌 자신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드러내며 최초의 야구 스타가 된다. 그는 타자로서는 비시즌 포함 20경기 동안 47점을 득점했다고 하며, 투수로서 최초로 삼중살완봉승을 기록했다. 엑셀시어스는 브루클린 애틀래틱스와의 챔피언 결정전 2승 2패 상황에서 벌어진 결승전에서 소요 사태가 벌어지면서 퇴장한 뒤 다시 참여하지 않아 챔피언이 되지는 못했지만[2] 리그 최다 승 팀으로 기록되었다. 1861 시즌, 남북 전쟁이 발발하면서 엑셀시어스는 리그에 참가하지 않았고, 1862년에는 다시 리그에 참여한다.

그는 1862년 4번만 아웃되었을 정도로 대활약을 보였으나, 10월 18일 모리사니아[3] 유니온스와의 경기 중 원인을 알 수 없는 복통을 호소하였으며, 4일 뒤에 숨을 거두었다. 당시에는 수많은 설이 떠돌았는데 비거리가 엄청난 홈런을 치는 과정에서 비장이나 방광이 파열되면서 사망했다는 설이 대세가 되긴 했다. 해당 홈런 때 그가 스윙을 하자 뭔가 찢어지는 소리가 크게 났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나 현대에 기록을 확인해본 결과 크레이턴이 그날 홈런을 기록하지 못했음이 밝혀졌다.[4] 현대에 추측하기로는 스포츠 탈장, 비장 파열 등을 의심하고 있다. 크리켓과 야구의 투잡을 뛰던 크레이턴의 운동량으로 볼 때 스포츠 탈장일 거라는 의견이 우세한 편.

4. 경기 스타일

타자로서의 크레이튼 또한 최고 수준의 선수였다. 플랜리와의 키스톤 콤비는 수비적으로도 매우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가 야구를 영원히 바꿔놓은 분야는 역시 투수. 당시 야구 규칙으로는 오버핸드 투구가 금지되어 있었고, 투수는 단순히 직구를 던져주며 타자가 공을 칠 수 있도록 던지는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하지만 크레이턴은 빠른 공을 던졌고, 완급 조절을 하는 느린 공까지 던졌다. 손목 스냅을 활용하는 반칙성 변화구[5]까지 던졌기 때문에 타자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타자들은 항의했지만 관중들이 이런 공에 열광하면서 심판의 제재를 피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반작용으로 1860 시즌 이후 타자들은 좋은 공이 아니면 휘두르지 않는 방법으로 일관했고, 제구가 그렇게까지 뛰어난 편이 아니던 크레이턴은 매 경기마다 300개 가량의 공을 던졌다고 한다. 사이드암으로 속구, 변화구 등을 매 경기 300개 정도의 공을 던진다면 몸에 이상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 결국 그가 죽음으로 이른 것은 이런 경기 스타일과 크리켓 투잡의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

5. 영향과 여담

  • 그의 사망 후 손목 스냅을 이용한 투구는 공식화되었다.
  • 그는 브루클린의 그린 우드 묘지에 묻혔는데 그의 묘지를 장식하던 대리석 야구공은 도난당했다고 한다.
  • 사실 1860년의 크레이튼은 명실상부한 팀의 슈퍼스타이자 에이스였지만 1862년의 그는 혹사로 인해 그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젊어서 죽은 것이 동정을 사서 과대평가되었다는 평도 있다.

[1] 최초의 10인 중 한 사람이다.[2] 기록은 무승부로 남았지만 챔피언은 애틀래틱스로 인정되었다.[3] 지금의 브롱스.[4] 야구라는 운동이 건강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소문을 막기 위해 드라마틱하게 그의 죽음을 포장했을 가능성이 있다.[5] 당시 손목 스냅을 이용하여 투구하면 반칙이었다. 이렇게 던진 구질을 Dew-Drop이라고 불렀는데 추측건대 약간의 변화를 주는 슬라이더성 구질이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