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28 21:24:10

지운영

파일:지운영 사진 지석영의 형 1882년쯤 추정 서울역사아카이브 수정2.jpg
池雲英
1852년(철종 3) ~ 1935년

1. 개요2. 생애

1. 개요

조선 말기의 서화가, 사진작가. 본관은 충주(忠州)[1], 자는 공남(公南), 호는 설봉(雪峰), 백련(白蓮)이다. 본명은 지운영(池運永).

의사이자 국어학자인 지석영의 셋째 형이기도 하며, 독립유공자 지청천은 그의 9촌 삼종질(三從姪)이다.

2. 생애

그는 1852년(철종 3) 한성부 중부 경행방 교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의 중인 가문에서 아버지 지익룡(池翼龍, 1812 ~ 1891. 11. 6)과 어머니 경주 이씨 이용철(李容哲)의 딸 사이의 4형제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지익룡은 남동생 지석영이 1883년(고종 20) 문과에 급제한 뒤 1884년 조사위장(曹司衛將:정3품), 1885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정3품)를 거쳐 1886년 관료로서 80세를 채웠다는 이유로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 문관의 품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종2품)에 제수되기도 했다.

한편 그가 생전에 남긴 여러 행적이나 일화를 보면, 기본적으로 호기심이 많고 새로운 것을 배우기를 좋아했던 인물이었던 듯하다. 다만 정치 성향은 근왕주의적이었으며 온건개화파적 행보를 보여주었다.

유학에 조예가 있었으나 불교 사상과[2] 역술, 도가, 무술 등에도 일찍부터 두루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1884년 통리기무아문의 주사가 되었고, 1886년 사대당 극비 지령을 받아 일본으로 밀입하여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 박영효 저격을 시도하려다가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조선으로 압송되어 영변으로 귀양살이를 하였다.

1889년 귀양에서 풀려난 후 이름을 운영(運永)에서 운영(雲英)으로 개명하였으며, 그 이후로는 세상과 단절하며 은둔 서화가로서 생활하였다. 1892년에는 청나라로 여행을 떠나 중국인 서화가들과 교류하며 다양한 화풍을 배우기도 했다. 1895년에는 조정에 상소를 올려 재기를 꿈꾸기도 했으나, 이를 거부당한 뒤로는 출세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고 이인(異人) 서화가 취급을 받는 것에 만족하며 살아갔다.

생전의 그와 만났던 윤치호의 기록에 따르면, 지운영은 자신이 서산대사의 환생이라고 진지하게 믿었다고 한다. 지운영은 당대의 개화 지식인이자 언어의 천재로 취급받던 윤치호를 매우 신기해해 여러 차례 종교(주로 불교 대 기독교) 관련 대담을 나누기도 했는데, 그는 윤치호의 아버지인 윤웅렬이 윤치호를 낳기 전에 신묘한 환약을 먹어서 그 약의 기운 덕분에 똑똑한 아들을 둔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한다. 이미 동아시아의 사대부들과 매우 가치관이 달라져 있던 윤치호는 이를 두고 우스워했다. 지운영은 윤치호에게 대승 불교의 교리를 몇 시간에 걸쳐 설명해 주기도 했는데, 윤치호는 그 교리를 허무맹랑하고 일관성이 없다고 여겨 불교를 '망할 종교(a doomed religion)'로 여겼다. 반대로 지운영은 기독교의 교리를 명료하지만 단순하고 얕고 편협하다고 여겼다.

오세창과 친분이 있었고, 경술국치 이후로는 오세창과의 인연으로 서화협회 정회원으로 몇 차례 작품을 출품하였다.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1923년 전람회의 심사위원 차별에 문제를 제기하고 이후에는 불참하였다. 1935년 사망하였다.

서화에 뛰어난 인물이면서[3] 사진학에도 관심있어서 한국의 역대 사진가로도 알려져 있는 인물로, 사진계에서도 사진학 대목에 그의 이름이 올려지기도 하였다. 1870년대에 일본에서 배워온 사진술로 1884년 당시 33세이던 고종과 11세이던 왕세자의 사진을 촬영했다[4][5]. 여담으로 그가 조선에 처음으로 세운 사진관은 1884년 갑신정변 당시 파괴되었는데, 이유는 가옥 구조가 조선의 한옥과는 달리 특이한 구조였기 때문에 일본인의 집으로 오해받아서였다고 한다.

[1] 경력공파 31세 영(永) 항렬.[2] 관세음보살도를 그려서 남기기도 했다.[3] 다만 중국풍을 그대로 답습했던 화풍 탓에, 21세기 한국 미술사에서는 그렇게까지 주목받지는 못하고 있다.[4] 거의 같은 시기에 퍼시벌 로웰도 고종과 왕세자의 사진을 찍었다.[5] 윤치호 일기에서 1884년 양력 3월 일기에 따르면, 윤치호가 은전 주조의 부당함을 고종과 왕후 민씨에게 아뢰던 중 왕후가 화제를 돌리려고 '너는 동궁 야야(爺爺)의 어진을 보았느냐'라고 묻는 대목이 있는데, 이 '어진'이 지운영이 찍은 초상사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