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4 00:18:51

지안 고구려비

지안고구려비에서 넘어옴
파일:external/dimg.donga.com/52376433.1.jpg

1. 개요2. 내용3. 진위 여부

1. 개요

集安高句麗碑

중국 지린성 퉁화시 지안시 마셴향 마셴촌에서 발견된 고구려비문.

발견되기 전에는 뭔지 모르는 농민들에 의해 빨래판으로 쓰였다고 한다. 충주 고구려비도 빨래판으로 쓰였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것은 루머다.

광개토대왕 당시에 제작했다고 추정하는데[1] 이 때문에 언론들이 제2의 광개토대왕릉비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사실 '제2'라고 하기에는 광개토대왕릉비문에 비해 스케일이 턱없이 작지만, 사실 그만큼 고구려비가 드물기 때문이다.

지안 고구려비라는 이름도 지안에서 발견된(또는 발견될[2]) 다른 고구려비들을 생각하면 이상한 이름이다. 이걸 신라로 치면 '경주 신라비' 같은 작명인데, 경주에 신라 비석이 얼마나 많은지를 감안하면 지안 고구려비라는 이름은 좀 문제가 될 소지가 크다. 이는 그만큼 아직까지 별 특색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임시방편으로 붙인 이름이다. 학계의 연구결과가 나오는 대로 이름이 바뀔 가능성이 있다. 중국에서는 발견한 마을 이름을 따 마셴촌비라 부르는 모양인데 차라리 이쪽이 더 정확해보인다.

2. 내용

비문의 내용은, 아직 판독도 완전히 되지 않아 완전한 내용의 파악이 어렵지만 대강 파악된 바로는 광개토대왕릉비문에서 수묘인 규정 부분만 복사하듯 떼어다가 다루고 있는 모양새이다. 제작시기는 4~5세기로 파악되고 있다. 대강의 해석은 링크에서 볼수 있다. 공교롭게도 광개토대왕릉비의 수묘인 규정에 역대 왕들의 묘에 수묘인 규정에 관한 비석을 세웠다는 내용이 있기는 하다.

판독문 전문은 아래의 링크를 참조.
파일:external/i2.media.daumcdn.net/20130411110813511.jpg

3. 진위 여부

위작이라는 주장이 심심지 않게 나온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과거에 고구려 비문이 우루루 쏟아져 나왔는데 죄다 위작으로 판명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동천왕 비문. 지안 고구려비가 위작이란 의심을 받는 이유는 내용 자체가 광개토대왕릉비의 수묘인 부분을 그대로 복붙했고 문장도 평이한 데다, 서체도 고구려의 다른 비문과 달리 요상하고 비문의 보존상태가 이상할 정도로 좋으며[3] 발견경위도 뜬끔없다는 점 등이다. 무엇보다 중국이 발해 순목황후 묘지명은 공개하지 않으면서 이건 칼같이 공개하는 태도도 이상하다.

그런데 이 비석은 중국의 위작이라기엔 딱히 동북공정에 유리한 내용도 없다는게 함정. 당대 사료를 무시하고 <요사> 지리지 같은 정확성이 바닥을 치는 사료를 들고 난리치는 유사역사학계 일부 인사들을 제외하면 지안이 고구려 수도라는 것을 부정하는 이는 없다.[4] 여기서 새로운 비문이 나왔다고 그 위치가 딱히 중요하지도 않다. 중국 측에서는 비문의 문구 일부가 중국 고전과 비슷한 점을 들어 중국 고대 비문이라고 강조한다.


[1] "지안 고구려비, 광개토왕때 세워진듯…最古"[2] 지안 고구려비를 포함할 경우 비교적 온전히 비로서 남은 것은 현재까지 달랑 3개뿐인데, 광개토대왕릉비(지안), 충주 고구려비(충주), 지안 고구려비(지안). 그 외에 관구검 기공비의 파편이 발견된 것도 지안이다. 여기에 더해 지안이 고구려의 옛 수도이므로 앞으로도 비문이 발견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3] 빨래판으로 쓰였다는데 저정도의 문장 판독이 가능하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마을 주민들이 신성하게 여기며 보존해오던 충주 고구려비는 이것과 비교할수도 없을 정도로 마모가 심하다.[4] 멀리 가지 않고, 광개토대왕릉비에서 광개토대왕을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으로 지칭하는데 이 중 '국강상(國岡上)'이 '수도(國) 인근의 언덕(岡) 위(上)'에 매장되었음을 말한다. 곧 광개토대왕이 매장된 곳이 고구려의 수도임을 말하는데, 알다시피 광개토대왕릉비가 위치한 곳은 지안. <요사> 지리지 같은 것이나 들고 와서 광개토대왕릉비와 같은 A급의 당대 사료를 무시하며 지안이 고구려의 수도가 아니라고 말하는 이들이 얼마나 무지한지 알 수 있다. 물론 이 사람들은 "광개토대왕릉비를 일본인들이 몰래 반출하려다가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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