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00:38:25

즈데넥 제만

즈데넥 제만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folding ▼ 둘러보기 틀 모음
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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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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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대, 6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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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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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의 축구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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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 이름 <colbgcolor=#ffffff,#191919> 즈데네크 제만
Zdeněk Zeman
출생 1947년 5월 12일([age(1947-05-12)]세)
체코슬로바키아 제3공화국 프라하시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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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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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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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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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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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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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181cm
직업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 감독 치니시 (1966~1970)
바치갈루포 (1970~1973)
카리니 (1973~1976)
미실메리 (1976~1977)
에사칼사 (1977~1979)
US 팔레르모 유스 (1979~1983)
리카타 칼초 1931 (1983~1986)
포자 칼초 (1986~1987)
파르마 AC (1987)
ACR 메시나 (1988~1989)
포자 칼초 (1989~1994)
SS 라치오 (1994~1997)
AS 로마 (1997~1999)

페네르바흐체 SK (1999~2000)
SSC 나폴리 (2000)
US 살레르니타나 1919 (2001~2002)
US 아벨리노 1912 (2003~2004)
US 레체 (2004~2005)
브레시아 칼초 (2006)
US 레체 (2006)
FK 츠르베나 즈베즈다 (2008)
칼초 포자 1920 (2010~2011)
델피노 페스카라 1936 (2011~2012)
AS 로마 (2012~2013)
칼리아리 칼초 (2014)
칼리아리 칼초 (2015)
FC 루가노 (2015~2016)
델피노 페스카라 1936 (2017~2018)
칼초 포자 1920 (2021~2022)
델피노 페스카라 1936 (2023~2024)
국가대표 없음

1. 개요2. 감독 경력
2.1. 전성기2.2. 2000년대2.3. 2010년대2.4. 2020년대
3. 전술 : 공격축구의 장인4. 이야깃거리

[clearfix]

1. 개요

체코 국적의 축구 감독.

체코 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생의 대부분을 이탈리아에서 보냈다.[1] 이탈리아에 사는 외삼촌[2]을 만나기 위해 팔레르모를 방문했던 시기, 유명한 프라하의 봄 사태가 일어났고 그 이유로 이탈리아에 정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피지오 자격증을 가지고 있던 제만은 본격적으로 지도자수업을 받았고 1989년 포자를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유명세를 쌓았다.

2. 감독 경력

팔레르모 유스에서 약 4년간 감독직을 맡았고, 1983년 리카타 칼초에서 처음으로 성인 팀 감독직을 맡으며 커리어를 시작했다.

1986시즌에는 당시 3부 리그 소속이었던 칼초 포자의 감독으로 부임, 이후 세리에 B 소속이었던 파르마의 감독으로도 잠시 부임하는 등[3] 감독직을 이어가다가 세리에 B 메시나의 감독으로 부임해 1년 동안 리그 8위와 리그 최다득점을 기록한 후 1989-90 시즌을 앞두고 세리에 B로 승격한 포자의 감독으로 다시 부임하였다.

2.1. 전성기

포자 복귀 첫해는 리그 8위에 그쳤지만 두 번째 시즌에는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팀에게 1977-78 시즌 이후 약 12년만의 1부 리그 승격을 안겨주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세리에 A 승격 첫 해에는 그동안 수비가 우선시 되었던 이탈리아 축구계에서 4-3-3을 기반으로 한 극단적인 압박과 공격 전술을 보여주면서 리그 최다득점 2위, 최다 실점 2위를 동시에 기록하면서 승격 첫 해 리그 9위를 기록, 이탈리아 축구 팬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제만의 전술에는 제만란디아라는 별명도 붙으며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쌓기 시작한다.

약팀이었던 포자를 유에파컵 진출을 노리는 팀으로 만들며 주가를 높인 제만은 1994-95 시즌을 앞두고 당시 세리에 7공주의 일원이었던 SS 라치오의 감독으로 부임한다.

부임 첫 해 리그 준우승을 기록, 다음해에는 리그 3위를 기록하는 등 괜찮은 성적을 기록했고, 당시 유스였던 네스타를 1군에 적극 기용해 잠재력을 터트리고 프라하에서 신성으로 주목받던 파벨 네드베드를 영입하는 등 선수 육성과 영입 부분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 라치오가 원했던 리그 우승에는 실패했고 1996-97 시즌에는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1997년 1월에 경질되었다.

라치오에서 경질 된 후에는 직전시즌 리그 12위에 그쳤던 AS 로마에서 팀 재정비를 위해 제만에게 접근했고,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라치오 최대 라이벌 팀의 감독을 맡게 되었다.

로마 부임 후 팀을 재정비하며 팀 순위를 4위, 5위로 다시 끌어올렸고, 프란체스코 토티의 잠재력을 터트렸던 것이 가장 유명하다.[4] 후술할 유벤투스 금지약물 복용 의혹을 이 시기에 제기했다.

2.2. 2000년대

이후 1999년 10월에 UEFA컵에서 조기탈락 하는 등 팀 분위기가 좋지 못했던 페네르바체의 감독으로 시즌 도중 부임했다. 하지만 제만도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여론이 악화되던 중 컵대회에서 3부 리그 팀에게 패배하며 악화되던 여론에 쐐기를 박았고, 결국 2000년 1월 8일에 리그에서 거둔 2:2 무승부를 끝으로 3개월만에 경질 되었다.

페네르바체에서 경질된 후 SSC 나폴리의 감독으로 부임하며 2000-01 시즌을 준비했으나 개막 후 6경기에서 2무 4패라는 극심한 부진으로 광속으로 경질 당했고, 그 후에는 세리에 B로 내려갔지만 세리에 B에서도 실패를 전전하며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2004-05 시즌에는 세리에 A 소속이었던 US 레체에서 제만이 그동안 보여준 선수 육성 능력을 보고 감독직을 제안하는 도박수를 던지며 최상위 리그로 복귀했고, 젊은 선수들을 적극 기용하면서도 팀을 중위권으로 이끌며 어느 정도 반등에 성공했으나 시즌 종료 후 사임했다. 이때 아직 유망주였던 미르코 부치니치를 적극 기용했는데, 커리어 하이인 리그 19골을 득점하며 선수 육성 능력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보여주었고, 직전시즌 리그에서 43골을 득점했던 팀이 04-05시즌에는 66골을 득점해 유벤투스에 이은 리그 최다득점 2위를 기록하면서 제만 특유의 뛰어난 공격력도 보여주었으나 리그 최다 실점인 73골을 실점하며 불안한 수비력도 동시에 보였다.

이후 무적 신세로 시간을 보내다가 05-06시즌이 한창 진행되던 무렵 리그 3위 자리를 유지하며 세리에 A 승격을 노리던 브레시아에서 제만을 선임했으나 브레시아에서는 처참하게 실패하면서 팀은 제만 부임 전까지만 해도 유력해 보였던 승격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 제만 본인은 시즌 종료 후 사임했다.

브레시아에서의 실패 후 2년 전 괜찮은 성적을 기록했던 레체의 감독으로 재부임하며 06-07 시즌을 시작했으나, 이번에는 과거의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시즌 초반에 경질되었고 2년 뒤 세르비아 리그의 FK 츠르베나 즈베즈다의 감독으로 부임하며 2년만에 감독직을 이어갔으나 여기서도 처참하게 실패하며 경질되었다.

계속된 실패로 팀을 구하지 못하다가 2년 뒤인 2010년 7월 20일, 과거 유명세를 쌓았었던 세리에 C 소속 포자의 감독으로 선임되며 약 16년만에 포자로 돌아왔다. 하지만 승격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며 1년만에 팀을 떠나게 되었고, 세리에 C에서도 실패를 거두며 감독 커리어는 거의 끝나는 듯 했다.

2.3. 2010년대

11-12 시즌을 앞두고 세리에 B 소속이었던 델피노 페스카라 1936과 1년 계약을 맺으며 감독으로 부임했다.

임대로 데려왔던 로렌초 인시녜치로 임모빌레, 팀 유스였던 마르코 베라티의 잠재력을 터트리며 팀의 핵심자원으로 성장시켰고, 제만 특유의 닥공전술로 42경기 동안 90골을 기록하는 엄청난 공격력을 보여주며 세리에 B 우승을 차지했다.

11-12 시즌 종료 후 AS 로마에서 감독직을 제안, 수락하며 1999년 이후 13년만에 로마 감독으로 복귀했다.

오랜만에 돌아왔지만 여전한 닥공 전술과, 과거 토티의 잠재력을 터트렸던 것 처럼 이번에는 에릭 라멜라, 마티아 데스트로, 마르키뉴스, 알레산드로 플로렌치 등 많은 유망주들이 제만 밑에서 잠재력을 터트렸고, 엄청난 화력으로 리그 최다득점도 기록하며 좋은 모습도 있었지만.. 시즌 전 선수 방출로 센터백 뎁스가 얇아진 상황에서 제만의 닥공 전술이 수비에 엄청난 부하를 주면서 부진한 리그 성적과 리그 최다실점을 기록하며 결국 2013년 2월 2일에 경질되었다.

2014-15 시즌을 앞두고 칼리아리 칼초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인테르를 상대로 4골을 집어넣는 등 특유의 공격 전술로 16경기에서 21득점을 기록, 괜찮은 공격력을 보였으나 많은 실점으로 리그 순위는 18위에 그쳤고, 결국 12월 22일 시즌 도중 경질되었다. 그런데 후임으로 부임했던 지안프랑코 졸라도 이후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자 제만이 졸라의 후임으로 3달만에 다시 칼리아리로 복귀하는 상황이 벌어졌는데, 강등권이었던 팀의 상황을 반전시키지 못하며 결국 리그 7경기가 남은 상황에서 사임했다.

15-16 시즌에는 스위스 슈퍼 리그로 승격한 FC 루가노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리그 최다 실점을 기록했지만 FC 취리히를 승점 1점차로 제치고 리그 9위를 기록하며 잔류에는 성공했고, 시즌 종료 후 팀을 떠났다.

이후 약 1년간 무적신세로 지내다가 2017년 2월 18일에 마시모 오또의 후임을 구하던 페스카라의 감독으로 선임되며 11-12시즌 이후 약 5년만에 페스카라 감독직을 다시 맡게 되었다. 부임 후 2일 뒤에 치러진 제노아전에서 페스카라 복귀전을 치렀고, 본인의 장기인 엄청난 공격력을 보여주며 제노아를 5:0으로 완파하고 24경기 1승에 그쳤던 페스카라에게 두 번째 리그 승리를 안겨주었으나#, 남은 기간 동안 1승을 추가하는데 그치며 강등을 막지 못했다.

2.4. 2020년대

2021년 6월 20일에 포자 칼초의 감독으로 부임하며 약 4년만에 감독직에 복귀했고, 10년만에 다시 포자의 감독을 맡게 되었다.
파일:Zeman_Pescara_2023.png
델피노 페스카라 선임 오피셜
2023년 2월 27일, 75세의 고령임에도 현재 세리에 C-그룹 C에서 3위에 위치해 있어 승격 플레이오프를 바라보고 있으며 과거 베라티-임모빌레-인시녜 유망주 3인방의 포텐을 터뜨려주며 육성과 동시에 승격을 이끌었던 좋은 기억이 있는 델피노 페스카라의 감독으로 5년 만에 재부임하였다.#

2024년 2월 22일, 경동맥 수술 후 장기간의 휴식이 요구되어 델피노 페스카라 감독직에서 사임하였다.

3. 전술 : 공격축구의 장인

"피치에서 뛰는 선수는 항상 명심해야한다. 한 번 주도권을 놓아버리면 결과를 얻을 수 없다. 골을 넣더라도 템포를 조절하는 것 보다 항상 공격을 유지해야한다. 90분 동안 쉬지 않고 공격해야한다."
" 0-0은 지루하고, 차라리 4-5로 지는 게 낫다. 그건 최소한 약간의 재미는 줄 수 있다." 제만의 축구관을 보여주는 발언 #

AS 로마, SS 라치오를 제외하고 커리어의 대부분을 중하위권 팀을 지휘했기에 이렇다 할 우승경력은 없지만, 그가 명성을 쌓은 이유는 특유의 전술 스타일 때문이다. '제만란디아'라고 부르던 포자 시절 완성한 그의 축구철학은 닥치고 공격이다. 4-3-3 전형을 기본으로 90분 내내 지속적인 공격을 시도한다. 양 풀백은 지속적인 오버래핑으로 공격 기회를 창출하고 수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미드필더 대부분이 공격적으로 올라선다. 압도적으로 강한 전력의 팀을 만나면 수비적으로 나올법도 한데, 그렇지 않다. 오로지 공격이다. 크게 앞서가는 상황에서도 끝없이 공격 시도를 하다보니 제만이 맡는 팀에서는 타 구기에 비해 점수 나오기가 쉽지 않은 축구임에도 4골차, 5골차 이상 승리를 자주 볼 수 있을 정도. 하지만 뒤가 없는 공격 성향으로 인해 크게 앞서가는 상황에서도 공격을 시도하다 동점을 허용하거나, 강팀 상대로 리드를 잡아놓고 계속해서 공격하다가 역전을 허용하는 등 단점도 많았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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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남자의 전술, AS 로마 시절

흔히 2-0-8이라고 불리는 극단적인 공격전술로 그는 하위권 팀을 기적적으로 올려놓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러한 공격축구는 80년대 말 ~ 90년대 초반, 수비적인 전술이 우선시되는 이탈리아 축구에서 일대 혁명을 일으켰고 열성적인 제만 신봉자들을 낳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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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만 4-3-3 전술의 기본적 요점, 이는 페스카라 시절의 스쿼드를 예로 든 것이다. 모든 선수들이 미칠듯이 뛰어다니며 전방위적 압박을 통해 공을 따내면 센터백 두 명을 제외한 모든 선수들이 공격을 시도하며 수적 우세를 통해 득점을 노린다. 허나 이는 그만큼 빈틈을 드러내기 마련이며, 제만이 이끄는 팀의 득실차는 거의 0에 수렴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 점은 적어도 중하위권 팀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아서[6] 계속 명성을 쌓을 수 있던 것이다.

4. 이야깃거리

공격적인 전술에 묻히는 감이 있지만 선수 육성에 일가견이 있어 수많은 선수들을 스타로 키워냈다. 체코의 전설 파벨 네드베드를 비롯해 프란체스코 토티, 알레산드로 네스타, 루이지 디 비아조, 주세페 파발리 등의 아주리 선수들, 그리고 브라질의 월드컵 우승 수비수들인 카푸아우다이르 등이 그의 지휘 아래에서 세계적 선수로 발돋움했다. 위의 페스카라 시절 스쿼드에도 치로 임모빌레로렌초 인시녜, 마르코 베라티 등 대성한 선수들의 이름이 보인다. 망했다고 평가 받는 로마 2기 시절에도 미친 듯한 공격 축구를 통해 무명의 신예였던 수비수 마르퀴뉴스가 엄청난 경험치를 먹고 일약 유럽 최고의 수비 유망주로 떠오르기도 했다.

감독 경력 외적으로는 유벤투스 금지약물 복용 의혹이라는 큰 이슈의 핵심에 위치한 바 있다. "유벤투스가 금지 약물을 복용했다"는 의혹을 제기하여 약 7년 반 가량의 법정 공방이 펼쳐졌고, 결과적으로 무고로 판결남에 따라 유벤투스 구단 및 팬의 공적 1순위가 되었다. 2014년 뜬금없이 "난 유벤투스 팬이었다"라는 인터뷰 기사가 나와 유벤투스 팬들이 어이없어했다.[7]


[1] 이탈리아 국적은 1975년 취득.[2]유벤투스 선수이자 코치였던 체스트미르 빅팔렉. 그가 팔레르모의 유소년 코치가 될 수 있게 도와준 사람이기도 하다.[3] 이때 7경기만에 경질되었다(...)[4] 제만 부임 전부터 1군에서 자리를 잡아가긴 했지만 득점력은 다소 부족했었는데, 제만 부임 후 득점력까지 터지며 로마의 핵심 자원으로 자리 잡는다.[5] 대표적인 경기가 포자 재임 중이었던 91-92시즌 세리에 A 최종전으로 당대 최강팀이었던 AC 밀란을 상대로 전반전에 뛰어난 경기력을 보여주며 2:1로 리드를 잡았고, 밀란의 무패우승을 저지할 수 있을 듯 했으나, 후반전에도 계속해서 공격을 시도하다 무려 7골을 얻어맞고 2:8로 역전패 했다.[6] 중하위권 팀은 리그 득실차가 0보다 아래인 경우도 많다. 0에 수렴한다는 것은 최소 리그 중위권 정도는 만들어준다는 셈이다.[7] 다만 유벤투스의 전설적인 감독인 체스트미르 비츠팔레크가 즈데넥 제만의 삼촌이라 어릴적부터 팬이었다고 하면 말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