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0-23 23:32:53

조한유


<colbgcolor=#c00d45><colcolor=#fff> 조한유
曺漢儒
출생 1696년 (숙종 22년)
경상남도 합천군 묘산면 도옥리
(慶南 陜川郡 妙山面 陶沃里)
사망 1752년 (영조 28년)
본관 창녕(昌寧)
미보(美甫)
양진당(養眞堂)
저서 양진당실기(養眞堂實記)
일기 무신일기(戊申日記)[1]

1. 개요2. 상세3. 저술4. 사료(史料)5. 외부 링크

1. 개요

조선 숙종·영조 시기의 유학자.

2. 상세

조한유는 조선 숙종·영조 시기의 유학자로, 자(字)는 미보(美甫), 호(號)는 양진당(養眞堂)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영조 4년(1728)에 있었던 무신난(戊申亂)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무신일기(戊申日記)」를 저술하였는데, 이 기록은 해당 시기의 사회상과 역사적 정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 주요 저작으로는 『양진당실기(養眞堂實記)』가 있다.

조한유는 조정생(曺挺生, 홍문관 교리 역임)의 현손으로, 1696년(숙종 22년) 경상남도 합천군 묘산면 도옥리(陶沃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썼으며, 효성과 덕행으로 지역 유림들 사이에서 신망을 얻었다.

1728년(영조 4년)에 무신난이 발생했을 때 반란군에 가담한 친족 조성좌(曺聖佐)의 회유와 협박을 받았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 등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말을 베어 충절을 보였다고 한다. 이 일로 당시 순찰사 황선(黃璿)과 어사 박문수(朴文秀)로부터 절개를 지킨 인물로 평가받았으며, 이후 ‘이중금(泥中金)’과 ‘일엽청(一葉靑)’ 등의 별호가 붙게 되었다.

그는 무신난 당시에 반란군을 피해 숨어 지내며 「무신일기」를 작성하였다. 이 기록은 난의 전개와 당시의 정황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한유의 충절은 후대에도 기려졌으며, 성주(星州)의 유학자 여팔거(呂八擧)가 「의검가(義劒歌)」를 지어 이를 찬양하였고, 벽진(碧珍) 사람 이주대(李柱大)가 그의 묘지명을 남겼다. 그의 행적은 『영남인물고』 외에 『합천읍지(陜川邑誌)』, 『교남지(嶠南誌)』 등에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3. 저술

  • 양진당실기(養眞堂實記)
    1935년 후손 조상권(曺相權)과 조상희(曺相熙)가 2권 1책으로 간행한 유고집이다.
    권상(卷上)에는 「양진당팔경시」, 「무신일기서」 및 「무신일기」가 수록되어 있으며, 부록에는 「양진당기」, 「의검가」, 만사(挽詞), 행장(行狀), 묘지명병서(墓誌銘幷序), 유사(遺事) 등이 포함되어 있다.
    권하(卷下)에는 향장(鄕狀), 도장(道狀), 수의장(繡衣狀), 척실(摭實), 발문(跋文) 등이 수록되어 있다.
  • 양진당실기국역본(養眞堂實記國譯本)
    문학박사 강성위(姜聲尉)가 완역한 『양진당실기』를 후손 조기종(曺企鍾)이 2008년 도서출판 한림원(대구)을 통해 출판하였다.
  • 양진당후손추원록(養眞堂後孫追遠錄)
    『양진당실기』의 주요 내용인 「무신일기」 전문을 비롯하여 관련 논문과 추모문을 수록한 자료집이다.
    2025년 조기종 주편, 강성위 주역으로 대보사(大譜社)에서 간행되었으며, 조한유와 관련된 문헌 및 후대 기록을 집대성한 저작으로 평가된다.

4. 사료(史料)

파일:양진당실기.jpg 파일:무신일기.jpg
<rowcolor=#fff> 양진당실기 (養眞堂實記) 무신일기 (戊申日記)
파일:양진당실기국역본.jpg 파일:양진당후손추원록.jpg
<rowcolor=#fff> 양진당실기국역본 (養眞堂實記國譯本) 양진당후손추원록 (養眞堂後孫追遠錄)
파일:양진당재실.jpg
<rowcolor=#fff> 양진당재실

5. 외부 링크

  • 『양진당실기(養眞堂實記)』#
  • 『양진당실기국역본(養眞堂實記國譯本)』#
  • 『양진당후손추원록(養眞堂後孫追遠錄)』#

[1] 『양진당실기(養眞堂實記)』 내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