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조윤호(曺潤鎬) |
본관 | 창녕 조씨[1] |
생몰 | 1888년 7월 9일 ~ 1950년 5월 13일 |
출생지 | 경상도 창원대도호부 북면 이운 중방리 (現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북면 감계리 중방마을[2] 648번지) |
상훈 | 대통령표창 추서 |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88년 7월 9일 경상도 창원대도호부 북면 이운 중방리(現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북면 감계리 중방마을 648번지)에서 태어났다.1919년 전국적으로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 창원군 창원면에서는 3월 23일에 앞서 만세시위가 있었으며 이때 주동 인물 31명이 검거되었다. 이에 분을 참지 못한 조윤호 등의 청년 15명은 4월 2일 장날을 재거사일로 정하고 비밀리에 동지를 규합하면서 주변 지방에도 비밀리에 연락을 취했다.
4월 2일[3] 오후 3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자 조윤호 등의 청년 주도자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장으로 뛰어들었다. 이에 군중들도 열광적으로 호응하여 다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이에 창원면 주재 일본군 헌병 9명은 마산의 일본군 헌병분견소의 지원을 받아 주동 인물 1명을 검거하고 총검으로 군중들을 위협하여 만세시위를 중단하고자 했다. 그러자 일본군의 만행을 보고 분노한 상인들은 노점과 상점의 문을 닫고 다시 만세를 외쳤다. 또 다시 6,000~7,000명이 호응하여 만세시위는 3월 23일에 있었던 1차 의거보다 강력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후 조윤호를 비롯해 설관수(薛灌洙)·공도수(孔道守)·구재균(具在均)·김호원(金浩元)·조희순 등 주동 인물 20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조윤호는 이들과 함께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의 형을 언도받아 마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조용히 지내다가 1950년 5월 13일 별세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