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8:43:46

조무령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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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趙) 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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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169E1> 조(趙)나라 초대 왕
무령왕
武靈王
영(嬴)
조(趙)
옹(雍)
아버지 조숙후(趙肅侯) 조어(趙語)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340년 ~ 기원전 295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325년 ~ 기원전 299년

1. 개요2. 생애
2.1. 즉위 이전2.2. 치세
3. 평가4. 기타5.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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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전국시대 조(趙)나라의 6대 국군, 초대 왕, 조씨 20대 종주. 본인은 죽을 때까지 왕을 칭하지 않았고 무령왕이라는 시호는 아들인 혜문왕(惠文王)이 추증한 것이다. 본명은 조옹(趙雍).

호복(胡服)을 채택하고[1] 기마 전술을 도입하여 군사개혁을 시도해, 변방을 개척해 나간 조나라의 중흥 군주였다. 호복을 입고 말 타기와 활쏘기를 시행한 덕분에 강화된 군사력으로 조나라 한복판에 있던 중산국을 정복하고 임호와 누번을 격파하는 등 국세를 크게 신장시켰다.

2. 생애

2.1. 즉위 이전

조숙후 24년(기원전 326년), 선후인 숙후(肅侯)가 승하하고, 조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주변 나라에서 조나라의 정치를 안정시킨다는 명목으로 조나라를 공격하여서 땅을 나눠 가지려 했지만, 당시 14세도 안 된 어린 나이였던 조옹이 나서서 정국을 안정시키기고, 혜문왕(惠文王)의 도움을 받아 조나라의 왕위에 올랐다.

이 인연 덕분인지 나중에 혜문왕의 아들인 무왕이 죽고, 진나라 정국이 불안할 때 연나라에 인질로 잡혀있던 소양왕이 진나라의 왕위에 오를 수 있게 도와준다.

2.2. 치세

조무령왕 원년(기원전 325년), 위(魏)나라혜왕(惠王)은 조나라를 치다가 실패하여 조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훗날 위양왕(魏襄王)이 되는 태자 위사(魏嗣)를 보내 조무령왕의 즉위를 축하했다. 이때 양문군 조표가 상국이 되고, 한(韓)나라의 왕인 선혜왕(宣惠王)의 태자 (倉)이 축하하러 왔다. 이때 조무령왕이 어려서 정사는 대신 3명이 했고 사과(司過)들이 대신 3명을 도왔다.

조무령왕 3년(기원전 323년), 중산국(中山國)이 접경지역인 호 땅을 치니 호 땅에 성을 쌓았다. 위나라의 상국 공손연(公孫衍)[2]이 소진의 합종책을 지지하자 진나라의 상국 장의는 연횡책으로 합종책을 분쇄하려고 했다. 그 결과 초나라는 진나라에게 영토를 많이 빼앗겼다.

조무령왕 4년(기원전 322년), 선혜왕과 회맹했다. 그리고는 정략 결혼을 해 우호를 다졌다.

조무령왕 5년(기원전 321년), 조무령왕은 한나라의 공주와 결혼했다.

조무령왕 8년(기원전 318년), 한나라가 진나라를 쳤으나 실패했다. 그 이유는 5개 나라가 참여하지 않아서이다.

조무령왕 9년(기원전 317년), 조무령왕은 한나라, 위나라와 함께 진나라를 쳐서 8만명이 죽었다. 이에 제나라(齊)가 관택에서 조나라를 이겼다.

조무령왕 10년(기원전 316년), 진나라가 조나라의 중도와 서양을 빼앗았다.

조무령왕 11년(기원전 315년), 연나라에서 혼란이 일어나 제나라가 연나라를 속국으로 만들 때 조무령왕은 공자 직을 한나라에서 조나라로 불렀다.

조무령왕 13년(기원전 313년), 진나라가 조나라의 인 땅을 함락시키고 조장을 포로로 잡았다. 초나라와 위나라의 왕이 한단을 방문했다.

조무령왕 14년(기원전 312년), 진혜문왕이 제나라를 치자 조나라가 연나라와 함께 제나라를 도왔다. 그리고 진나라와 우호를 다졌다. 그의 아들 조하(趙何)가 위나라를 쳤다.

조무령왕 15년(기원전 311년), 조무령왕은 공자 직(公子職)을 연나라로 보내 왕이 되게 하니 그가 바로 연소왕(燕昭王)이다.

조무령왕 16년(기원전 310년), 맹요를 왕비로 맞으니 그녀가 바로 혜후다.

조무령왕 17년(기원전 309년), 조무령왕이 구문을 나와 야대를 쌓아 제나라와 중산 국경을 감시했다.

조무령왕 18년(기원전 308년), 진무왕(秦武王)이 구정을 들다 구정에 발을 찧어 죽자, 연나라에 인질로 간 진무왕의 아우인 영직(嬴稷)이 진나라로 가서 왕이 되니 진소양왕(秦昭襄王)이다.

조무령왕 19년(기원전 307년), 조무령왕은 호복기사를 도입해 국력을 신장시켰다. 그러나 공자 성(成)[3]이 그것에 복종하는 척 했으나 속으로는 불만이 많았다.

조무령왕 20년(기원전 306년), 조무령왕은 중산의 도성 영가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흉노를 쳐서 유중에 이르고 임호왕이 말을 바쳤다.

조무령왕 21년(기원전 305년), 다시 중산국의 단구, 화양, 치, 호, 석읍, 봉룡, 동원을 치려하니 중산국이 강화를 청했다.

조무령왕 23년(기원전 303년), 중산국을 다시 쳤다.

조무령왕 24년(기원전 302년), 구원과 원양을 호복기사의 식읍으로 삼았다.

조무령왕 25년(기원전 301년), 혜후가 죽었다. 그러자 주소에게 호복을 입고 조하를 가르치게 했다.

조무령왕 26년(기원전 300년), 조무령왕이 중산국을 쳐서 땅이 북으로는 연나라, 서로는 운중 지역에 이르렀다.

조무령왕 27년(기원전 299년), 맏아들 장(章)을 안양군(安陽君)으로 책봉하고, 아들인 조하에게 양위하며 자신은 주보(主父)[4]를 칭하니, 그가 바로 조혜문왕이다. 그런데 이것이 분란의 씨앗이 되었다.

이후로도 주보라는 명목으로 정사에 계속 관여했다. 맏아들 조장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하고 도망오자 숨겨주었다가 혜문왕의 군대에게 포위당해 끝내 굶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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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가

무령왕은 아들인 혜문왕과 더불어 조나라의 전성기를 일궈낸 뛰어난 군주로 평가받는다. 그의 업적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은 뭐니뭐니 해도 호복기사(胡服騎射), 즉 북방 유목민의 복식과 기마술을 도입하여 조나라의 군사력을 혁신적으로 강화시킨 점을 들 수 있다. 물론 오랑캐로 멸시받던 유목민의 풍습을 모방한다는 점에 있어서 "야만인의 옷을 입을 수는 없다"며 당시 재상, 왕족과 신하와 같은 많은 이들의 반대를 샀으나 조 무령왕은 호복령을 반대하던 태자를 폐위하는 등의 강한 뚝심을 발휘하여 군사개혁을 완수하는데 성공한다.

무령왕의 군사개혁은 곧바로 조나라의 국력확장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무령왕의 재위초기에는 진나라가 수차례 조나라를 침탈하여 손해를 보았으나, 재위후반에 이르러 동쪽으로는 중산국을 수차례 정벌하여 영역을 확장했고, 서쪽으로는 이민족들을 무력으로 복속시켜 그 병력을 징발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무령왕 후반기의 꾸준한 중산국 정벌전 덕분에 그가 주보로 물러난 후 중산국은 완전히 멸망하여 조나라에 흡수된다.

이처럼 무령왕은 안목과 결단력이 뛰어났으나 자의식이 강하다 못해 괴짜같은 면모가 있었고 무모한 행동도 쉽사리 저질렀다. 특히 그가 아들인 혜문왕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자신은 물러나 주보가 된 일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깔끔하게 완전히 은퇴를 한 것조차 아니고, 내정은 아들에게 떠맡긴채 자신은 그저 외정에만 전념하고 싶어서였다고 하니 그야말로 범인의 상식을 초월한 파격적인 일이었다.

또한 무령왕은 전국시대의 군주로서는 드물게 친정을 즐겨서 자신이 군주였던 시절에는 몸소 총사령관으로 출전하여 중산국을 격파했고, 주보가 된 후에도 직접 대부들과 군대를 거느리고 서북쪽 이민족들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전국시대에 왕족들이라고 해서 전선에 나가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이처럼 군주가 몸소 군대를 지휘하는 일은 희귀한 케이스였다.

특히 무령왕이 주보가 된 후 몸소 진나라의 지형을 살피고 소양왕의 인물됨을 염탐하기 위해 사신으로 위장하고 진나라까지 갔다던 유명한 일화는 그야말로 도박에 가까운 일이었다. 비록 형식상으로나마 군주가 아닌 주보의 지위에 있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무령왕 자신이 국가의 전권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진나라에 갔다가 그 정체가 들통나기라도 했더라면 조나라는 매우 큰 위기에 처했을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도 소양왕은 사신으로 위장한 무령왕의 행동거지가 어딘가 심상찮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곧바로 그를 붙잡으려 했으나 무령왕이 말을 몰아 관문 밖으로 도망쳐서 간신히 위기를 모면했다.[5]

무령왕의 죽음은 그의 위명에 비해 허망한 것이었다. 생전에 보여준 파격적인 결단력과 숱한 업적이 무색하게도 그는 정작 후계문제에 있어서는 우유부단하고 분별력없는 모습만 보여주다가 결국 아들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덕분에 시호에도 긍정적 의미인 '무'와 부정적 의미인 '령(靈)'[6]이 동시에 들어갔는데 이는 상당히 드문 케이스이다.

4. 기타

참고로 허생전에서 나라를 강성하게 만들기 위해서 오랑캐의 옷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고 언급되는 무령왕이 바로 이 무령왕이다.

5. 미디어 믹스

파일:external/san.nobuwiki.org/1048.jpg
삼국지 12,13

삼국지 시리즈에서 고대무장으로 등장. '조옹'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일러스트는 '호복기사'를 표현한 것.

[1] 여기서 말하는 호복은 북방의 기마민족들의 패션으로 바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즉 무령왕의 정책 이전에는 조나라 남자들은 바지를 입지 않았다는 것으로, 허벅지 부근까지 덮는 셔츠 비슷한 옷이나 짤막한 치마를 입었다. 속옷도 없었기에 현대의 관점에서 보자면 굉장히 대담한 패션이다. 무령왕의 호복령 이후 고대 중국의 한푸에도 바지가 도입되었다.[2] 삼국지에 나오는 공손연이 아니다.[3] 보통 조 무령왕의 숙부로 알려져있지만, 열국지 강의 같은 곳에서는 동생으로 나오기도 한다.[4] 군주아버지라는 뜻으로 훗날 진시황이 아버지 장양왕을 태상황으로 추존하면서 태상황의 기원이 되었다.[5] 진 소양왕은 초나라의 초회왕을 회담을 나눈다는 명목으로 불러내놓고는 그를 사로잡아 죽을 때까지 진나라 땅에 억류하기까지 하였다. 무령왕이 진나라에 갔다가 그 정체가 발각되었더라면 그와 비슷한 꼴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6] 삼국지의 인트로가 바로 후한 영제 시대인데 같은 靈자를 쓴다. 백제 무령왕의 령 자는 寧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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