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1 03:25:21

조선전역해전도


파일:attachment/josun_watergun.jpg

1. 개요2. 정말 그림처럼 입었나?
2.1. 부정론2.2. 찬성론

1. 개요

오타 덴요(太田天洋)가 일본 해군의 하청을 받고 그린 그림. 본래 일본 해군 부대 건물에 걸려있다가 현재는 일본 도쿄 긴자에 있는 아오키 화랑에 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임란 당시나 직후에 일본측에서 그렸다는 주장이 퍼졌었는데, 사실은 20세기에 이르러 그린 그림이다.

그림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조선군 전부가 두정갑을 입고 있는데, 결국 이 그림으로 인하여 〈불멸의 이순신〉의 고증이 대차게 까였다. 바로 이 그림에서는 조선군이 전부 두정갑을 입고 있는 것 때문이다.

영화 명량에서 주요 참고자료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2. 정말 그림처럼 입었나?

2.1. 부정론

조선군이 상당히 잘 무장하고 꽤 멋있게 그려져서 이 그림을 맹신하는 경우가 있지만,[1] 그림의 제작시기가 이미 임란이 지난지 300여년을 훌쩍 지나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 그림이 정확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좁은 배 위에서 중갑을 입고 활동하기는 굉장히 불편하며, 물에 빠지면 바로 용궁으로 직행하는 것이고 무엇보다 바닷바람 맞는 환경에서 철제 갑옷을 하나하나 유지관리하는 것은 지극히 번거롭기 때문이다. 두정갑보다는 차라리 가죽찰갑이 더 현실성있다.[2] 이른바 칠천량 해전에서의 승리를 극대화하기 위한 표현에 가까울 것이다. "우리가 저렇게 짱짱 쎈 조선 수군을 개발랐다" 라는 자뻑이 들어가 있는 셈. 애초에 임란 당시에는 두정갑보다는 찰갑이나 쇄자갑, 경번갑 등이 주류 갑옷이었을 것으로 보는 게 정설이다.

이 그림에 나오는 일본 전투함이 대포를 대들보에 밧줄로 매달고 쏘는 묘사 때문에 한동안 일본 배는 구조강도가 약해서 포를 갑판에 설치할 수 없다!라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었는데, 최근 신재호의 주장에 따르면 이것은 화가가 사료를 오독해서 잘못 그린 것이고, 판옥선에 비해 약하다는 평을 받기는 해도 일본 배의 구조강도가 대포 한두 문의 반동도 못 견딜 정도로 약하지는 않았으며, 대포도 정상적으로 갑판에 거치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고증적으로는 깔려면 끝도 없이 깔 수 있는 그림이다. 당시 조선군에는 거의 쓰이지 않은 무기(불랑기포, 수노기 등)이 대표 무기로 그려진 점, 조선군 배의 목재 연결방식이 일본식으로 그려진 점, 화살집이나 저고리가 18~19세기의 방식인 점, 조선군이 신기전을 활로 쏘는 점, 육군 병종인 팽배수수군에 있고 환도가 아닌 을 들고 싸우는 점 등등.[3]
조선에서 군대의 장비 조달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결정권자는 최종적으로 임금이고, 그 과정에서 영향을 주는 사람은 임금과 논의하는 대신들이다. 조선 정부는 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등 다양한 정부 기록을 남겼고, 이를 통해 임금과 대신이 논한 일들도 상세히 알 수 있다.
최종 결정권자인 임금과, 임금에 조언하는 대신들이 ‘조선수군에 대한 갑주 보급’에 대해 논한 내용을 살펴보겠다.


1) ‘인조 27년 1649년 03월19일(음)’ 당시의 비변사등록 기사와
2) ‘효종 1년 1650년 04월17일(음)’ 당시의 비변사등록 기사를 보겠다.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bb&levelId=bb_013r_001_03_0240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bb&levelId=bb_014r_001_04_0360

전문을 확인하고 싶으면 각각 링크를 참조하라.

먼저 ‘인조 27년 1649년 03월19일(음)’ 당시의 비변사등록 기사의 일부를 발췌하였다.

또 지난번 통제사의 장계에 따라 전선(戰船)의 군졸에게 모두 갑옷과 투구를 입히게 하였으며, 지금 또 거듭 밝혀 제조하도록 하였습니다. 배 1척에 90 사람이 승선하는 것이 예이니, 철갑(鐵甲) 90벌이 제조되어야 합니다. 비록 해마다 점진적으로 제조하더라도, 한 읍의 공역(工役)으로는 치러낼 방법이 없습니다. 할 수 없는 일을 강요하다가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찌 나라의 체면이 손상되지 않겠습니까? 또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수군과 육군은 모두 적을 막는 군병입니다. 전선에는 그래도 참나무으로 된 방패가 있어 한 배의 사람들을 보위하고 있으므로, 육군의 경우처럼 막아줄 수단 없이 직접 화살과 돌을 맞는 일은 없습니다. 만약 수륙의 병사로 하여금 모두 견고한 갑옷과 투구를 입게 한다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국가의 물력이 부족하여 고르게 입히기는 어려운 형편입니다. 만약 이 두 가지 군병 가운데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면 육군이 마땅히 먼저여야 하고 수군은 뒤에 해야 합니다. 모두들 이 일을 말할 때 마땅히 변통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단지 선상의 장령(將領)이라 칭호하는 자에게만 갑옷과 투구를 입히도록 하면, 마련하는데 어려운 일이 없을 것이고 거행하는 실효도 있을 것입니다.

해당 기사에서는 전선에는 방패가 있어 수군의 군졸에게 육군보다 갑주 보급을 우선할 필요가 없고, 장령(군관=장교)에게만 갑옷과 투구를 입히도록 하자고 한다.
지난번 통제사의 장계에 따라 수졸 모두에게 갑옷과 투구를 입히게 하였는데, 이에 따라 배 한 척마다 90벌의 철갑이 필요한데, 해마다 점진적으로 제조하더라도, 한 읍에서 조달할 수가 없다. 물론 육군과 수군의 병사 모두가 갑주를 갖추면 좋은 것은 알고 있으나, 나라의 물력이 부족하여 고르게 입히기 어렵다고 하고 있다.
이상의 내용을 풀이하면 수군 병졸에게 갑옷을 입히는 것은 중요하거나 급하지 않은 일이고, 나라의 경제적 여건이 부족하여 수군은 우선 장교에게만 갑옷과 투구를 입히도록 하자고 하고 있다. 또한 ‘지난번 통제사의 장계에 따라 입히게 하였다’는 문구를 통해, 이전에는 수졸에게 갑옷을 입히지는 않았는데 지금은 입히도록 제도를 바꿨으며, 갑옷을 제조하도록 시켰으나 아직 수졸이 입을 갑옷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기사가 쓰여진 시기가 임진왜란이 끝난 지 50여년이 지났다는 것에도 유의해야 한다.
만약 임진왜란 중에도 계속 갑옷을 제조했다고 가정하더라도 양대 왜란이 끝난 지 50년이 지났는데도 수군에게 입힐 갑옷은 부족하다는 것으로, 갑자기 갑옷의 대량 손망실 또는 폐기가 이루어지지 않았고서야, 수졸 모두에게도 완전히 갖출 수 있던 갑옷이 갑자기 부족해진 것은 아닐 것이다.

다음은 효종 1년 1650년 04월17일(음)의 기사이다.

아뢰기를 "각진 갑주의 경감에 관한 비변사의 초기에 대해 전교로 '경감한 이 숫자는 영원히 경감시키는 것인가, 아니면 1년에 제조할 수를 경감하는 것일지라도 결국에는 이를 기준수로 삼게 하려는 것인가'라고 하셨습니다. 갑주는 말 위에서 필요로 하는 것으로써, 배위에 방패를 벌려놓고 몸을 가린 병졸로 하여금 모두 갑주를 입게 하면, 실로 제승(制勝)을 위한 급무가 아니며 단지 수군에게 유지하기 어려운 폐단만을 줄 뿐입니다. 더구나 전선은 덩치가 크고 위에 누로(樓櫓)註 001 를 설치하므로 그 바탕이 무거워 움직이기 어려움이 걱정인데, 이에 또 갑주를 입힌 군졸을 태우면 곱이나 되는 무게를 더하는 것입니다. 해상에서 군졸을 연습시켜 본 자는 대부분 불편함을 말합니다. 옛날 수군을 용병하는 지혜와 기계 제조의 정밀함은 고 통제사 신 이순신 만한 사람이 없어 그 바다를 횡행한 공렬(功烈)은 지금까지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그 때에도 갑주를 입고 배에 오른 제도가 없었으니, 어찌 그 지혜가 지금의 사람들에 미치지 못해서 그러했겠습니까? 갑주를 입도록 한 뒤부터 크고 부유한 주읍(州邑)에서도 관에서 자력으로 준비하지 못하고 민결에까지 침범하니 그 폐단이 적지 않으며 연해의 주현에서는 하나의 크나큰 역으로 되어 있습니다. 각포의 경우에 있어서는 전선의 수졸(守卒)은 바람이 잔잔할 때는 1백명 혹은 80명이요, 바람이 거셀 때는 40명 혹은 30여 명으로서 모두 선제(船制)의 대소에 따라 가감합니다. 이 밖에 전곡(錢穀)과 인민이 없는 변장(邊將)이 먹는 것은 제방군(除防軍) 약간 명에게 의존하고 있으며, 무릇 책응(策應)이 있을 경우 모두 수군에게 책임을 지웁니다. 수영은 각포에 배정하고 각포에서는 수졸로부터 무명을 징수하니, 착취하는 상황은 차마 말할 수 없는 바가 있습니다. 변장이 어찌 모두 탐학을 부리겠습니까마는 그 사정이 자연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변(三邊) 수군의 역은 다른 곳보다 10배나 더하여 군사가 연이어 흩어져 달아나고 피해가 인족(隣族)에까지 미침은 곧 이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지금 만약 갑주에 대한 역을 간신히 유지하는 가난한 포에 해마다 요구하여 수에 따라 준비하여 바치게 한다면, 각포의 수졸은 견디어 갈 형편이 되지 못합니다. 신 등이 본래 아뢰어 변통하려 하였는데, 지금 전남 우수사 윤창구(尹昌耉)의 장계로 인하여 그 폐단을 대략 진달하고 감히 참작하여 경감하시기를 앙청하는 바입니다. 갑주는 전선에서 절대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요, 그 폐단은 이루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이 경감하는 수를 여러 해를 두고 계산하면 이도 적지 않을 듯합니다. 신 등의 뜻은 이렇게 경감하는 수를 해마다 있는 것으로 하는 경우 과연 편의한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 하교를 받들고 아울러 그 이해관계를 진달하고 앞서의 계사를 도로 들이며 엎드려 성상의 결재를 기다립니다." 하니, 답하기를 "알았다. 대체로 이 일은 어떤 사람의 건의로 설립한 것인가? 그 전말을 알지 못하니 본래의 문서를 찾아 들이라." 하였다.
본 기사에서도 마찬가지로 수졸에게는 판옥선에 세워둔 방패가 있으니 갑주를 입히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으며, ‘수졸에게 갑옷을 입혔더니 훈련 때마다 불편하다’ 현장 지휘관의 의견을 전달하고 있다. 아예 “갑주를 입도록 한 뒤부터”라는 언급으로 제도를 이전과는 다르게 바꿨다는 것을 알리고 있으며, 바꿨더니 불편해 한다는 것에서 이전에는 불편하지 않아 지금과는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통제사 이순신 시절에도 수졸에게 갑주를 입히는 제도가 없었다’고 아예 언급하고 있다.
경제적인 사정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크고 부유한 주읍에서도 관이 자력으로 조달하지 못하여 민간에 크나큰 역이 더해지는 폐단이 있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수군의 역은 다른 곳의 10배에 달하도록 고되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으니 수졸 개인에게 스스로 입을 갑옷을 조달할 경제적 능력이 있을리도 만무하다. 이로 보아 경제적으로도 조선수군이 수졸에게까지 입힐 갑옷은 충분치 못했을 것을 알 수 있다.
쉽게 말하자면, 군대가 예산도 부족한데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것을 먼저 장만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2.2. 찬성론

임란 5년 전인 1587년 3월 2일 정해왜변 직후에 경상도 암행어사 이정립이 ‘병력은 출동준비를 갖췄고 궁시, 총통도 확보했고 철갑과 철환이 부족하나 현재 만들고 있다’고 보고하는 실록 기사도 있고, 조선 전후기를 통틀어 두정갑 등 갑옷을 대량으로 제작한 기록이 종종 나오니 임란 당시 장수나 군관이 아닌 일반 수졸들도 상당수가 갑옷을 입었다고 볼 수 있다.

결정적으로 난중일기의 기록을 보면 이순신 장군이 한 진의 병사를 점검했고 그 갑옷을 봐서 헐거나 한 것을 보고 벌 주거나 하였다.
19일(무신) 맑음. 품방(品防)에 해자 파고 쇠사슬 구멍 뚫는 일로 아침에 군관을 정 해 보내고, 나도 일찍 아침을 먹은 뒤에 동문 위로 나가 품방 역사를 직접 독려했 다. 오후에 상격대(上隔臺)를 순시했다. 이날 분부군(奔赴軍) 7 백 명이 역사에 점고를 맞았다.
이순신 <난중일기>
6일(병인) 맑음. 아침 먹은 뒤에 나가 앉아 무기를 검열해 보니 활, 갑옷, 투구, 전 통, 환도 등도 깨어지고 헐어서 볼꼴 없이 된 것이 많았으므로 색리(色吏)와 궁장 (弓匠), 감고(監考) 등을 처벌했다.
이순신 <난중일기 임진년 2월~3월 6일>

일본측 기록인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서도 조선군은 갑옷을 착용했다고 적었기에 교차검증을 하여 갑옷을 입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병사들은 단단한 가죽 갑옷을 착용하였고, 유럽인의 모자와 같은 철모를 쓰고 있었다. 그것들 중 어떤 것은 강철로 되어 있었고 그 밖에는 무쇠로 되어 있었다. 그들은 터키인의 활과 같은 작은 활을 매우 잘 다루고, 독을 바른 화살을 사용한다고 한다.
루이스 프로이스 <일본사>

그리고 당대의 실록과 비변사 기록을 보면 마찬가지로 병사들의 갑옷을 생산하도록 하는것과 갑옷을 입고 싸울 수 없음을 확실히 기록해두었다.실록 내용
"지금 마땅히 민간에 있는 장인(匠人)을 널리 모아 방어가 요긴한 곳에 나누어 보내어 화살을 만들도록 하고 또 호남에 있는 전죽(箭竹)을 많이 베어 배에 실어 운반하여 시일을 정해 놓고 일을 하되 새로 만드는 갑주나 창칼은 정예롭게 만들도록 하여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데에 민첩하고 옮기고 실어나르는 데에 편리하게 하도록 해야 합니다."
조선왕조실록

이후 왜란시기에도 갑옷을 계속적으로 만들고 병사들에게 입혔음을 알 수 있다.

https://sillok.history.go.kr/id/koa_11007006_010
○備邊司啓曰: "戰用之具, 莫切於甲冑, 而武庫所儲, 其數不敷, 西北邊上留置之數, 亦甚零星。 當此調兵守禦之日, 許多軍士, 不可赤身赴戰。 頃間各道兵、水營及各官, 有月課措備之令, 想已准數措備, 今依別定差使員, 及今月晦日內, 沒數上送, 以備軍前之用, 爲當。" 傳曰: "依啓。"
"전쟁의 용구는 갑주(甲胄)보다 절실한 것이 없는데 무고(武庫)에 저장된 것이 그 수가 많지 않고 서북 변방에 남겨 놓은 것도 심히 적습니다. 군사를 조련하고 지키고 방어하는 때를 당하여 허다한 군사가 맨몸으로 싸움에 나갈 수 없습니다. 지난번에 각도 병영·수영 및 각 고을에 월과(月課)로 조치하여 갖추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이미 수효대로 맞추어 조치하여 갖추었을 것이니, 지금 별정 차사원(別定差使員)을 보내서 이달 그믐 안에 전부를 올려와서 군용에 대비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비변사 기록

이러한 기록들을 보면 확실하게 군사가 맨몸으로 싸움에 나갈 수 없다고 적혀있다.

조선 후기 전선 1척과 사후선 1척을 운영했을 당시에 작성된 함평현 읍지에서 <수군기물 목록>에는 함평현이 수군용으로 철갑과 투구 50벌씩을 보유했다고 적혀 있다. <영암읍지> 진보鎭堡 편에는 당시 영암현 관할구역에 위치한 이진진과 어란진에 각각 철갑과 철 투구 47벌씩 비치돼 있다고 기록됐다. 어란만호진은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을 운영하고, 이진만호진은 여기에 방선 1척이 더해졌는데도 철갑과 투구 보유량은 함평현보다 오히려 더 적다. 그런데 어란진은 피갑주皮甲, 즉 가죽찰갑으로 만든 갑옷과 투구 20벌을 추가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진도군은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을 운영했는데 철갑과 철 투구 69벌에 종이로 만든 엄두, 엄심갑 각 4벌을 보유했다.

병선의 승무원은 17명이며 이 중 격군은 12명이며,사후선은 5명 승무원 전원이 격군이다. 판옥선은 총원 130~200명 중 대선의 격군은 100여명이다. 판옥선은 격군의 수가 가장 작은배는 80여명인 경우도 있다.[4]

철갑 47벌에서 69벌이라면 판옥선 상장에서 전투를 수행하는 수졸이나 병선 등 소형 함선, 혹은 사후선에서 노를 젓는 격군 대부분이 입을 수 있는 수량이다. 여기에 피갑주 20벌이나 엄심갑 등이 추가되면 기라졸과 사공 등 비전투원을 빼면 거의 100% 착용 가능한 셈이다. 참고로 판옥선 상장 안에서 충분히 보호받으며 노를 젓는 격군 같으면 갑옷을 입을 필요가 없다.

각 진과 보에 약 47~69벌의 철갑과 20벌의 피갑을 보유했다고 할 시, 판옥선의 승무원은 대략 130~200여명인데, 격군이 작은배일시 80여명이며 큰 배는 120여명인데, 그럼 나머지 인원은 대부분 갑옷을 입었다고 할 수 있다. 갑옷을 입고도 활동이 무리없이 가능한 것은 판금갑옷이라도 가능한데 무겁다고 활동이 힘들다고 전투에 갑옷을 입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된다.당장 왜란시기 왜병들은 갑옷을 그럼 왜 입었는지 설명이 안된다.

또한 당시엔 물에 빠지면 어차피 죽는 것과 다름없었기에 갑옷을 입던 안입던 어차피 죽는다면 갑옷을 입는게 더 안전하다는건 당연한 이치다. 동시기 타 국가들은 1명에게만 무기류를 구비하도록 하여 그 무장이 상당히 빈약하였다고 주장하나, 조선은 애초에 땅을 가진 농민, 즉 정민을 군사로 모았고 그 정민도 다른 농민 3명이 경제적으로 보조하여 무장을 갖추게 하였으므로 그건 말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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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의 원칙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2정을 1보로 한다. 둘째 토지 5결을 1정에 준하도록 한다. 셋째, 노자(奴子)도 봉족수로 계산한다. 넷째, 각 병종별 급보 단위는 갑사(甲士) 4보, 기정병(騎正兵)·취라적(吹螺赤) 3보, 평노위(平虜衛)·파적위(破敵衛)·근장(近仗)·별군(別軍)·보정병(步正兵)·대평소(大平簫)·기선군(騎船軍) 2보, 봉수군(烽燧軍)·방패(防牌)·섭육십(攝六十) 1보이다. 다섯째, 누정·누호에 대한 벌칙을 강화하도록 되어 있다.

애초에 경국대전으로 조선 초기 국법부터 병사들이 갑옷 다 갖춰입게 하게끔 하는게 조선이었다. 이유는 타 국가에 비해 인구가 부족하여 병사의 무구나 질적우위를 통해서 이를 보완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일각에서는 일반 병사들 전군이 두정갑을 걸치고 있다고 트집을 잡으나 이는 일본측이 임진왜란 당시 그린 그림으로 반박 가능하다.
  • #: 朝鮮蔚山合戦之図
    일본에서 그린 울산성 전투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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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朝鮮蔚山合戦之図」は前田育徳会尊経閣文庫が所蔵する淡色彩の絵図[45]。大きさは69.5cm×68.5cm[45]。この絵図の作成時期は、関ケ原の戦い後に紀伊国和歌山に入部した浅野幸長を「紀伊守」と記していることから江戸時代初頭とみられている[45]。なお、尊経閣文庫には「朝鮮蔚山合戦之図」とは別に「蔚山図」というほぼ同じ構図の絵図もある[45]。

세키가하라 전투 직후에 그려진 그림이다. 왜란 끝난지 3년지나고 작성된 그림이라는 뜻이다. 보통 왜란 그림들이 거의 대부분 18세기에 그려져서 조선쪽 그림은 갑옷을 안 입고있는걸로 그려지기도 하고 일본군이 조선이나 명나라 무기를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건 당대에 그려진 그림이며, 모든 병사가 갑옷을 입었다는 점에서 실록 및 일본측 기록과도 일치한다. 병사들이 입고 있는 것은 두정갑이다. 그리고 조선전역 해전도는 이러한 그림을 보고 참고하여 그렸을 것이다.

그리고 위의 실록기록도 보면 생산을 감해달라고 하는 것이고, 그마저도 결국 철갑을 모두 입혔다. 당시 조선이 갑옷을 전면 폐지한것도 아니고, 임진왜란 시기 가장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였다고 공인받는 난중일기에는 이순신 장군이 병사들의 갑옷을 점검하였다고 적어놓았다. 더욱이 그러한 점검이 많았으며 한 진의 갑옷 수를 구체적으로 적어놓아 거의 모든 병사가 갑옷을 입었음을 증명한다. 이것으로 해당 비변사 등록을 인용하며 조선군은 갑옷을 입지 않았다 라는 주장하는 것은 바로 반박된다. 비변사 등록에서 안 입었다고 적혀있는데 현장의 이순신 본인은 아닌것을 적어놓았다. 교차검증을 위해 일본의 임진왜란 기록인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를 살펴보아도 분명히 조선군은 갑옷을 입고있다 고 적혀있다.

그리고 생산 증감에 대한 부정측 주장은 자료를 입맛대로 해석한 오류이다.#
효종 1년 1650년 04월17일(음)
啓曰, 昨因全南右道水使尹昌耉各浦甲冑量減事狀啓, 本司粘目, 各官與鎭浦, 殘盛有異, 依狀啓量減宜當, 大鎭則十二部內減四部, 中鎭則減六部, 殘鎭則減九部, 自本營參酌, 分等減定後啓聞事, 入啓蒙允矣, 慶尙·洪淸道及全南, 左道各鎭, 亦當一體施行, 以此竝爲知會于三道監司及水使處何如, 答曰, 依啓。
아뢰기를
"어제 전남 우도수사 윤창구(尹昌耉)가 각포(各浦) 갑주(甲胄)의 경감문제에 관해 올린 장계의 본사 점목(粘目)에 '각 고을은 진·포(鎭浦)와 형편이 다르므로 장계에 의하여 경감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대진(大鎭)은 12부(部) 안에서 4부를 경감하고 중진(中鎭)은 6부를 경감하며 잔진(殘鎭)은 9부를 경감하는 문제는 본영에서 참작하여 등급을 나누어 경감할 것을 결정한 뒤 아뢰어야 합니다'라고 입계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경상·홍청도 및 전남 좌도의 각진도 다같이 시행하라고 아울러 3도 감사 및 수사에게 통보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각 도의 형편에 따라 그해 년도의 생산을 경감을 시켜주었다고 하였지 생산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리고 흉년이 들어도 갑옷과 무기를 마련하게 한 게 조선이다.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1709001_004
○兵曹啓: "近因凶荒, 諸道民生可慮。 今考雜色軍丁甲冑兵仗, 一時盡點, 非徒騷擾, 盡賣田産, 必致失業, 姑令每一戶備冑一、甲一、劍一, 其弓箭及槍, 不必皆備。 每一牌內五分之三備弓箭, 五分之二備槍, 以爲定數, 漸次而備。 每隔一年, 加備一物, 隨備隨點, 勿令監司都節制使差使員巡, 行點考, 只使其官守令點考, 以待都巡檢使下界。" 從之。
병조에서 아뢰기를,
"요사이 흉년으로 인하여 여러 도(道)의 백성의 생계가 염려스러우니, 지금 잡색 군정(雜色軍丁)의 갑주(甲胄)와 병장기(兵仗器)를 상고하되, 한꺼번에 다 점검(點檢)한다면 소요를 일으킬 뿐만 아니라, 토지와 재산을 다 팔아서 반드시 직업을 잃게 될 것이니, 잠정적으로 매 1호(戶)마다 투구 한 개, 갑옷 한 벌, 칼 한 자루만 준비하도록 하고, 그 활·화살과 창은 반드시 다 준비하지 아니하여도 되며, 매 1패(牌)내에 5분의 3은 활과 화살을 준비하고 5분의 2는 창을 준비하게 하여 정수(定數)로 삼아 점차 준비하도록 하되, 매양 1년씩 걸러 한 가지 물건을 더 준비하게 하고 준비하면 곧 점검하도록 하되, 감사·도절제사·차사원(差使員)으로 하여금 순행 점고(點考)하지 말도록 하고, 다만 그 고을의 수령으로 하여금 점고하도록 하여 도순검사(都巡檢使)가 지경에 내려가기를 기다리도록 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를 보면 흉년이라도 갑옷과 투구, 칼은 반드시 준비하도록 한 것이 조선이다.
[1] 우리나라의 사극에서 나오는 군복이 죄다 포졸복인 점 때문에 이 그림을 보고 그림처럼 군복을 모두 바꿔야 한다는 의견이 튀어나오고 있다.[2] 실제로 비변사등록에도 "충무공의 군대도 갑옷을 다 입지 않았다."라는 문구가 있을 정도.[3] 근데 이 부분은 참작이 가능한 면도 있다. 애초에 조선은 개인 무장에 표준이 없는 시대였고, 무관들은 육군과 수군의 구분 없이 돌아가면서 구분했다. 수군에 부임하기 전에 북방에서 근무했던 무관이 손에 익은 팽배+검의 조합을 들고 싸웠다고 하면 딱히 고증 오류는 아니다.[4] 김재근 저 우리배의 역사에서의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