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5 23:10:34

제1대 중화민국 입법위원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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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입법위원 선거
1948년 1월 21일~1월 23일 1991년 12월 19일
제1대 중화민국 입법위원 선거 제2대 중화민국 입법위원 선거

1. 개요2. 선거 과정3. 선거 이후

1. 개요

1948년 1월 21일부터 1월 23일까지 진행되었던 중화민국입법위원 선거이다. 현재까지 중국 대륙에서 실시된 마지막 자유 선거로 남아 있다.

중국 역사상 최초로 대륙에서 시행된 직접선거였으며, 지역구 622명, 몽골인 선거구 22명, 티베트인 선거구 15명[1], 기타 소수민족 6명, 해외 선거구 19명, 직능 선거구 89명으로 총 773명이 정원이었다. 실제로는 여러 문제로 신장성에 배정된 지역구 6명 중 1명과 시짱지방 몫으로 배정된 입법위원 5명 중 2명이 선출되지 못하고, 해외 선거구 몫으로 배정된 인원 중 11명도 선거가 이루어지지 못하여 당선자는 총 759명이었다. 당시 중화민국의 인구가 4억 6천만명 가까이 되었으므로 1명의 입법위원이 약 60만명의 국민을 대표하는 셈이었다. 실제 투표에 참여한 인원수는 약 2억 명 가량이었다.

지역구는 기본적으로 중선거구제로, 보통 한 선거구당 3~8명 내외의 입법위원을 선출하였고, 선거인은 후보자 중 1명에게만 투표하되 후보자는 선거구에 배정된 선출 인원만큼 득표율 순으로 당선되는 방식(단기비이양식투표제)을 사용하였다. 한 사람은 1가지 유형의 선거에만 투표가 가능했고, 소수민족 선거구나 직능 선거구에 투표하고자 하는 사람은 유권자 등록 때 투표할 선거 유형을 선택해야 했다. 인구가 적어 선출 인원이 적은 성이나 직할시는 전체를 단일 선거구로 편성하고, 인구가 많아 선출 인원이 10여 명 이상으로 많은 성은 복수의 선거구로 분구하여 선거를 실시하였다. 독특한 제도로 부녀위원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선출 인원이 10명 미만인 성은 1명, 10명 이상인 성은 10명당 1명의 여성 입법위원(부녀위원)을 선출하여야 했고 이들 부녀위원 후보자의 득표수는 별도로 집계되었다.[2] 최다 인원을 배정받은 성은 쓰촨성으로 53명의 인원을 배정받았고, 10개 선거구로 분구해 한 선거구당 4~5명을 선출하고 5명의 인원은 부녀위원 몫으로 배정되었다. 타이완성의 경우 8명의 인원을 배정받았고, 전체가 단일 선거구로 편성되었다.[3]

2. 선거 과정

선거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국공내전은 여전히 진행중이었으며 중국공산당은 당연히 선거를 거부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공산당이 점령한 지역에서는 정상적인 선거가 이루어지지 못했고 선거에 참여한 정당은 중국국민당, 중국 민주사회당, 중국청년당이 있었으며 그외 소수의 무소속 후보가 있었다. 만 20세 이상의 국민들에게만 투표권이 있었다. 특정 직업군에 속하거나 몇몇 소수 민족은 투표권이 없었기에 불완전한 보통선거로 평가된다. 선거는 총 3일 동안 치러졌다.

3. 선거 이후

1949년, 장제스국민정부는 국공내전에서 패배함에 따라 타이베이로 정부를 옮긴 상황이었다. 당선된 759명의 입법위원 중 380명은 국민당 정부를 따라 타이베이로 이동했다. 당시 중화민국 헌법에 따르면 입법위원의 임기는 3년으로 헌법대로라면 이들의 임기는 1951년 5월에 종료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미 대륙을 공산당에게 뺏긴 터라 대륙에서의 선거는 불가능한 상황. 결국 중화민국 사법원은 대륙에서의 선거가 불가능하여 의원직을 계속 유지한다는 유권 해석을 내놓았다. 정확하게는 국민대회의 개회지점이 중앙정부 소재지인데 당시 타이베이는 임시수도였지, 정식 수도가 아니었고 난징이 중화민국의 정식 수도였는데 난징이 이미 중국공산당에게 점령당한 상황이므로 국민대회가 정상적으로 개회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그러한 해석을 내린 것이다.

물론 중화민국이 난징을 수복하고 국민대회가 개회될 경우 이들의 임기는 즉시 종료되고 새로운 선거가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현재까지 중화민국은 난징을 수복한 적이 없다. 즉, 3년짜리 국회의원이 종신직이 되는 셈이었다.

결국 훗날 개헌을 하기 전까진 차기 입법위원 선거는 열리지 않았고 간간이 이루어지는 선거는 모두 증원선거, 즉 보궐선거만 열렸으며 그 보궐선거조차도 1969년에 시행되었으므로 20년 넘게 국민의 직접선거가 없었다. 결국 이들의 임기는 1991년에 종료되었고 이때까지 생존한 입법위원들은 무려 43년간 그 의원직을 유지하였다. 하도 장기간 의원직을 해먹는 바람에 이를 두고 만년국회라고 비꼬는 사람들도 있었다.

[1] 시짱지방에 5명, 칭하이성과 시캉성에 거주하는 티베트인 5명, 기타 지역에 거주하는 티베트인 몫으로 5명이 배정되었다.[2] 이는 각종 선거에서 여성의 당선 인원수를 규정할 것을 명시한 헌법 제134조의 규정에 따른 제도였다.[3] 당시 타이완성에서 당선된 입법위원과 득표수는 득표율 순으로 류밍자오(劉明朝, 382,486표, 총독부 관료 출신), 뤄완처(羅萬俥, 357,932표, 언론인 출신), 황궈수(黃國書, 352,891표, 국민혁명군 장성 출신, 1961-1972 입법원장 역임) 차이페이훠(蔡培火, 214,256표, 사회운동가 출신), 궈톈이(郭天乙, 150,519표, 국민정부 관료 출신), 셰어(謝娥, 140,203표, 여성, 의사 출신으로 항일활동), 린선(林慎, 107,433표, 여성, 사회운동가 출신), 정핀충(鄭品聰, 92,120표, 의사 출신)이었다. 이 가운데 정핀충은 푸젠성 출신의 외성인이었으나 1918년부터 1931년까지 대만에서 활동한 적이 있었고, 나머지 7명은 모두 대만 태생의 본성인이었다. 이 7명 중 황궈수, 궈톈이, 린선은 중국 대륙으로 건너가 활동하던 반산이었고, 나머지 4명은 대만에서 활동했다. 이후 1950년 4월에 차이페이훠가 행정원 정무위원으로 임명되면서 입법위원을 사직하자 9위로 낙선했던 허징랴오(何景寮, 42,994표, 본성인으로 언론인 출신)가 입법위원으로 보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