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삼국지 유비로 천하쟁패의 등장인물. 원 역사의 제갈량에게서 모티브를 따왔다.2. 작중 행적
유비군의 대전략인 융중대를 수립한 책사. 유비의 입촉을 뒤에서 계획한 인물이지만 빙의자의 기억을 얻은 유비는 이 융중대의 허점을 파악하고 고심 끝에 입촉을 미루고 한중 공략을 통해 서량의 마초를 아군으로 편입해 명분작에 더 신경을 쓴 다음에야 입촉을 시작한다.유비가 관우와 장비를 익주 원정군에 소환하면서 제갈량을 형남의 책임자로 임명해 30대 초반 나이에 형남 전체를 책임지게 된다. 방통은 제갈량의 형인 제갈근이 동오의 형주 관련 책임자라는 사실 탓에 제갈근이 형제의 정을 내세워 접근하면 제갈량이 흔들릴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나, 제갈량의 성품을 역사로 아는 유비는 일축하고 제갈량의 형남의 전권을 맡긴다. 경력도 입지도 그리 굳건하지 않은 상황에서 냅다 중책을 떠맡은 것 때문에 특유의 편집증적으로 꼼꼼한 성격까지 합쳐져서 아랫사람들을 미친 듯이 쪼아대며 일하고 있는데 이게 의도치 않게 전화위복이 되었다.
손권이 저지를 익양대치를 대비해서 유비가 임상현과 익양 사이 개울에 보루를 세우라는 지시를 내리자 이를 열성적으로 받아들여 보루를 2개를 나란히 세우고 최신 원융노를 비롯한 군수 물자를 풍족하게 보급했으며 인력도 수시로 교대케 하는 등 유비의 지시를 120% 이행했고, 그 결과 임상대치 작전의 일환으로 보루를 급습해 온 동오의 장군 감녕을 사살하는 성과를 올린다.
비록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지만 나름 고위 지휘관을 죽여버린 것이기에 제갈량은 자신 때문에 동오와의 협상이 어그러지는 게 아닌가 당황했지만 배신자 동오군을 상대로 이긴 영릉 사람들의 사기가 크게 오르고, 당한 것도 인성이 나쁜 것으로 유명한 데다 아직 제대로 중용받지 않던 감녕이라 유비는 크게 치하했다.[1]
유비의 명을 받아 대별산맥 인근의 반조조 군세를 지원하는 한편 서량으로 파견되는 관우에게 마초와 염행의 일화를 거론해 마초를 (관우가 싫어하는)호족 나부랭이가 아니라 조조에게 가족을 잃고 자기도 죽을 까봐 두려워하는 불쌍한 사내로 여기게 만들어 반목하는 일이 없도록 단도리한다. 미래의 기상이변을 예상할 수는 없으니 형남을 지키는 데는 문제 없다 자신하지만 219년의 집중 호우 때 북상하지 않을 수 없음을 잘 아는 유비에게 별도의 대비책으로 유사시 강에 내걸 수 있는 쇠사슬과 쇠막대를 제조해 둘 것을 당부받는다.
217년 서량 전투 와중에 조조 치하에서 도망치는 유민들을 받아들여 병력을 8천이나 늘리고, 조운을 파견해 양양성 인근을 찔러보는 등 북벌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양양을 치려면 육로와 수로를 다 동원해야 하는데 당장 양양을 지키는 게 그 조인인데다 양양으로 가는 한수 수로는 역시 명장인 문빙이 지키고 있어 정공법으론 뚫을 방도가 없어 고민하고 있다.[2]
서량 전쟁 결과 상용군이 유비에게 신종하면서 양양-번성 공방전에 상용군을 이용해 문빙의 한수 방어를 우회해 공세를 넣을 여지가 생겼다. 허도에서 궐기를 준비하던 경기, 위황의 입에서도 언급되는데, 만인지적으로 이름 높은 관우를 형남에서 빼고 제갈량이라는 젊은이를 넣은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는 등 아직은 무명에 가까운 인물임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후 여몽의 군사회의에서 한 번 언급되는데 아무리 동오군이 찔러봐도 일절 반격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정황을 상세히 적은 서신을 건업에 보내는 방식으로 항의해 동오측은 명분도 못 얻고 자국내 여론전에서 밀리고 있다고 언급된다.
218년 도독호군 겸 대홍려로 임명된다. 도독호군은 형주의 군권 전부를, 대홍려는 외교 총책임자의 관직으로 제갈량이 군사와 외교 어느 분야든 전력을 써서 오나라를 막으라는 의미다. 육손은 제갈량이 유비의 본군에 호응해 북진하겠지만, 분명 조조군의 방어를 뚫지 못할 것이라 판단하고 그렇게 고전하고 있을 때 원군이란 명목으로 강릉을 점령하려는 계획을 꾸민다.
북진 시점에서 후음의 난에 고무되어 당장 올라가서 호응하자는 휘하 무장 및 참모들을 진정시키느라 애쓰면서 유비가 만들라 지시한 쇠사슬의 의미를 고찰한다.[3] 형 제갈근을 통해 엿본 동오 내부의 결속은 쉽게 깨지지 않음을 고찰하고 전면공세 대신 정병 2만으로 양양을 견제하는 선에 머무른다.[4]
이후 동오의 태도를 보며 그들이 배신할 것임을 직감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형주를 비워야 하는 상황이 다가오는 탓에 출전할 채비를 한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형북의 유비가 신호하기 전까지는 빨리 움직이자는 휘하의 의견을 계속 억눌렀고, 가을 장마의 시작으로 한수 본류로 통하는 새로운 수로가 만들어지자[5] 주군이 말했던 때가 왔음을 깨닫고 직접 강릉의 모든 수군을 이끌고 북상한다.[6]
익주에서 보낸 수송선과 민간상선까지 더해서 무려 900척에 달하는 대함대를 이끌고 북상해 양번을 습격, 북쪽 등현을 경계하던 만총을 밀어붙인다. 만총이 지세의 유리함에 기대서 버티려 했으나, 조운과 진도에게 맡겨 우회시킨 별동대와의 협공으로 승리. 한수 물길을 장악하고 양번을 고립시킨다. 조인이 아슬아슬하게 돌아와 번성을 함락하진 못하나, 수적 우세와 한수 물길을 손에 쥔 이상 압도적으로 유리해져서 우금의 7만 대군이 남하해 조인과 만총에게 가세해도 버텨낼 동력을 확보한다. 이후에도 번성을 계속 몰아붙이며 무너트리기 직전까지 가지만 이번엔 우금이 타이밍 좋게 도착하며 또다시 분루를 삼키고 물러나야 했지만 홍수로 인해 한수가 넘치고 거기에 우금의 군대가 휩쓸리며 다시금 기회를 얻게 된다.
수공에 휩쓸린 우금을 포위하고 항복을 받아냈으나 투항병들을 먹이느라 군량이 가파르게 줄어들자 이들의 처우를 놓고 고심한다. 제장들의 분위기가 포로 몰살로 가는 듯 보이자 과거 서주 대학살의 PTSD가 다시 떠올라 차마 그 분위기를 따를 생각을 못하고 주군인 유비의 의견에 따라 결정하자며 분위기를 1차로 정리한다.
유비의 명령으로 포로들을 강릉으로 보낸 뒤 양번 공략에 대해 군의를 진행한 결과 고립된 번성은 방치하고 대신 원군으로 온 조조군을 격파해 번성의 조조군의 희망을 꺾기로 방향이 정해지고 유비가 조조군이 땅굴작전으로 번성에 연락을 해 올 것임을 예측하자 곧장 물 담은 항아리를 탐지기처럼 사용해 조조군의 땅굴을 모조리 발견해내는 활약을 한다.[7]
그외에도 봉수대가 무력화 될 것을 대비해 용 모양 풍등을 활용한 통신체계를 구축해 동오의 배신을 조기에 파악했고 그 결과 유비의 명으로 진도와 함께 병력 2만을 이끌고 강릉을 구원하러 이동한다. 이후 약국현에서 동오군과 대치하며 여몽이 죽을 때까지 시간을 끌다 타이밍 맞춰 내려온 유비와 함께 동오군을 격파한다. 이후 동오군이 문빙을 공격하자 저들이 싸우는 틈에 석양성을 점령해야한다 주장하나 유비가 잠시 기다려보자며 받아들이지 않는다.[8]
이후 석양 전투가 격렬해질 즈음에 동오군에게 하나의 계책을 푸는데 바로 전리품인 동오의 전선과 물자를 실수인 척 석양성 측으로 흘려보낸 것. 대도독도 없고 각자 자기재산 지키기에 바빴던 호족들에게 의심과 욕심을 퍼뜨리는 계책이었고 실제로 거기에 주연과 송겸이 제대로 걸리며 동오군 지휘부 내에 갈등을 조장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석양 전투 이후 문빙에게 항복 권유를 위해 파견할 세객으로 괴기를 고르는데, 유비는 이에 대해 불만을 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문빙의 항복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제갈량의 의도는 문빙과 괴기가 친분이 있기에 자연스레 문빙이 전황을 물어볼 수 있는 상대이며, 또한 괴기가 반유비파였기에 유비에게 유리한 쪽으로 얘기를 하지 않는다는 걸 문빙이 알기 때문에 오히려 전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괴기 본인은 문빙이 끝까지 결사항전하는 것을 바랐기에 조조가 친정했음을 설파했으나, 군사적 식견이 출중했던 문빙은 이를 듣고 조조의 친정에도 불구하고 유비가 형세를 유지하면서도 석양성까지 올 수 있음을 파악했고, 이는 석양성이 고립된 상태에서 촉한과 강동의 공세를 버텨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괴기의 의도와는 다르게 항복을 결심하게 되었다.
더불어 문빙이 자살할 작정임을 간파한 제갈량이 먼저 나서 조조는 당장 그대의 식솔을 해하지 않을 것이니 시간을 준다면 그들을 구할 방도를 찾겠다 설득해 문빙의 자살을 막아내면서 석양과 문빙의 전력을 고스란히 얻게 한 1등 공신이 되었다. 당장 문빙이 점유한 석양성은 유비 입장에서 엄청난 요지인데, 석양성을 장악해야 남군과 양번의 기존 수로를 촉한이 온전히 사용할 수 있고, 또한 강동이 추후 형남이나 양번에 대해 공세를 펼 때도 석양성이 최전방 방어선이 되어 남군이 오롯이 후방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문빙과 그의 전력 덕에 향후 오나라와의 수전에서도 크게 밀리지 않게 되었다.
이후 남양 결전에서도 참전하여 방통, 법정과 같이 유비에게 조언하며 군을 지휘했으며 정면승부에서 조조군을 압도하자 홍수라는 천화에 이어 인시에서도 촉한이 이기고 있다고 자부한다. 결전 후에는 허도로 가면서 헌제만 구출하면 위를 끝장낼 수 있다고 아까워하나 도저히 헌제만 빼낼 방법이 없었다. 허도를 점령하고 중원 각지를 접수하는 와중 법정과 황충이 죽자 큰 충격을 받는다.
유비가 강동정벌을 결정하면서 제갈량에게 허도에서 합비를 통해 동오를 치는 중원 수군의 지휘를 맡긴다. 단순히 전투를 맡기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장기간의 대치를 염두에 두고 맡긴 것으로 신중하면서 보급과 군기, 진지 구축에 빼어난 제갈량이라면 낯선 환경에 약해지기 쉬운 병사들을 잘 관리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
유비와 별개로 군단을 이끌고 원정을 지휘하는 것은 원역사에선 관우만이 허락받았던 특전으로 아직 30대인 제갈량을 군부와 조정의 정점으로 올려주겠다는 의미나 다름없기에 굉장히 감격해한다. 제갈량은 이미 형남도독 시절 형주군을 이끈 적이 있긴 하지만, 이 때는 유비의 북벌에 호응해 진군한 것이었고 유비군과 합류한 이후에는 참모의 역할을 했으므로 독자적인 지휘권이라 보기에는 애매했던 반면, 이번에는 아예 정식으로 독립적인 군대를 이끄는 역할을 맡은 것이다.
이런 막대한 권한에 비례해서 책임이 크다 보니, 원 역사의 오장원에서 그랬듯이 자신과 부하들을 혹사시키며 유수구 일대에 대규모의 군영을 쌓고 시장을 열어 백성들과 함께 어울리고 태형 이상의 사무를 모두 관장한다. 동오에서는 처음에는 저게 가능할 리가 없다고 무시했지만 얼마 안 가 제갈량이 진짜로 저 모든 일을 해내자 당황한다. 다른 사람들은 저렇게 무리해서 일을 해도 저만한 성과를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비도 제갈량의 이런 특성을 고려해서 제갈량을 유수구에 파견한 것이다. 심각한 과로 때문에 마량과 마속이 걱정했지만 조조가 중원에 쌓아놓은 물자 때문에 보급 부담이 적고 이끌고 온 군대도 3만 정도라서 원 역사의 악명 높은 과로보다는 덜하다고 한다.
이에 초조해진 손권은 제갈근 일가를 반역죄로 몰아 인질극을 펼쳐서 공세를 유도하려 하지만 당연히(?) 통하지 않는다. 물론 제갈량도 형과 친척들이 실시간으로 죽어가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기는 했으나, 손권의 의도를 이미 파악했고 유비가 전권을 맡겨준 만큼 어떤 일이 있어도 유도에 넘어가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설령 자신이 유비에게 의심을 사는 한이 있더라도 버틸 작정이다. 다행히 강하 전투에서 서성과 육손이 전사한 뒤 손권이 유비와 부랴부랴 협상하기 위해 제갈근을 풀어주면서 형이 죽는 비극은 피했다.
전후 손권이 유배지에서 호모 사케르가 되고 만취한 상태에서 유기를 죽이는 대형사고를 쳐서 손권의 부하들이 흩어지는 와중에도 제갈근이 끝까지 손권의 옆에 남자 형을 걱정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는데, 이를 안 유비가 제갈근을 따로 보호해도 된다고 허락하자 자신이 손을 쓰며 안도한다. 제갈량의 입장에서는 형의 안위가 걱정될 수밖에 없기는 하다.
221년 하북 정벌 이후 유비가 위나라 인물들 몇몇을 암살하자고 제안했을 때 '고작 걔들만 제거하자고요?'라고 반문했다가 100명 미만의 살생부를 받고 조용히 암살했으며,[9] 가후도 죽이려 했지만 후한 황족들의 옆에 붙어있는 걸 보고 포기한다. 이후 가후가 후한 황족들을 세뇌해서 유비를 황제로 추대하도록 상황을 유도하자 유비가 도망치려 했지만 제갈량이 유비의 부하들에게 눈짓해서 유비가 황제 자리를 받아들이도록 상황을 유도해서 유비가 황제에 오르게 만들었다.
유비가 황제가 된 후 사도의 자리에 올라서 떨떠름한 표정으로 가후에게 포상을 주는 조서를 발표한다. 가후가 그 직후 초자연적 현상으로(...) 사망해서 잘(?) 끝났지만. 유비가 고향에 방문할 때 자신도 동행했으며 유비가 옛 도원결의의 장소에서 사망하자 유선의 후견인 중 1명이 되고, 훗날 요동 공손씨에 대처하기 위한 계책이 적힌 비단주머니를 받는다. 유비가 사망하자 유비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울면서 유선에게 뒷수습을 요청한다.
비단주머니에 담긴 공손연을 경계하라는 경고를 늘 잊지 않고 있다가 공손연이 거병하자마자 탁군절도사 관평과 청주자사 전예를 파병. 겨우 20여일만에 진압군을 요동을 휩쓸고 공손연과 부하 200명에게 공손공의 심정을 느껴보라며 궁형을 내린다. 사형보다 궁형이 훨씬 지독한 형벌로 여겨지던 시대라 역적을 진압하고도 세간에선 지나치게 엄격하고 잔혹하다는 악평을 들어 매사 불평했으나 달라지는 건 없었다. 대신 세간의 두려움을 사게 되면서 제갈량이 하는 일에 걸고 넘어지는 사람이 없어서 일 하기는 편해졌다고. 건흥 12년. 사도를 역임하던 중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3. 능력
촉빠, 그 중에서도 특히 제갈량을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답게 매우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유비가 관우의 빈 자리를 제갈량이 충분히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해 도독호군에 임명했으며 실제로 빈틈없는 일처리로 관우가 있을 때와는 다른 식으로 무명을 떨친다.유비가 고평가하는 점은, 평소에는 신중하면서도 필요한 순간에는 과감하게 행동한다는 점이다. 원 역사에서도 말년까지 도박수를 걸지 않았고, 본작에서도 흔들릴 법 한데도 끝까지 기다리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나섰다. 그렇다고 때만 기다리는 성격은 아니고, 본인이 그 때를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수를 쓰고 준비하며, 다방면에 능통하여 평균 이상의 성과를 낸다.
연기력도 무척 좋다고 한다. 미래 지식이 있는 곽선호조차 긴가민가하게 할 정도의 연기력이라고. 물론 아무 데나 쓰는 건 아니고 정말 필요할 때만 쓰는 거지만, 자신을 (의도치 않게) 2번이나 튕긴 제갈량을 바로 군사로 채용하고 우대한 건 융중대뿐만 아니라 저 연기력도 있었을 거라고 평하기도 했다.
4. 기타
독자들에게 익숙한 간절히 작가의 전작인 아! 내가 마속이다에서 보여주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승상 제갈량이 아니라 까마득한 고참인 관우, 장비의 눈치를 보고 방통, 법정 등 비슷한 연배의 쟁쟁한 참모들과 성과 경쟁을 해야 하는 젊은 시절의 제갈량이라 신선하다는 평을 듣는다.[10] 전작에 나오는 악덕상사 제갈량과 달리 이제 막 신참을 벗어난 상황에서 냅다 큰 프로젝트를 떠맡아 고생하는 모습 때문에 '천하의 승상도 저런 시절이 있었구나'라며 직장인 독자들이 감개무량을 느끼기도 했다. 그와 별개로 프로젝트 성사를 위해서 부하를 착취하는 모습을 이때부터 보여서 악질 상사는 그냥 천성이구나(...)라는 평을 듣는다.제갈량은 서주 낭야에서 굴러들어와 황씨와의 혼맥을 통해 형주의 호족, 명사들과 줄을 만들었고, 방통은 남군 출신 토박이라 방통이 요절하지 않았다면 입촉 이전 유비의 인재풀의 다수를 차지한 남양, 양양 출신들 사이에서 제갈량이 우뚝 서기는 쉽지 않았다. 본작에서는 방통이 유비의 곁에서 계속 일하고 있는 만큼 제갈량 본인도 그만큼 고민이 많을 듯하다.[11] 물론 작중에선 주인공인 유비가 제갈량의 능력을 알기 때문에 알아서 잘 챙겨주겠지만.
어릴 적(10대 초반) 서주 대학살로 버려진 시체로 인해 사수가 막히는 기가 막힌 참사를 보고 기억하는 것으로 나온다. 제갈 가문의 형주 이사는 서주 대학살보다 조금 앞으로 추정되는데, 여기서는 이사가 약간 늦었거나, 아니면 모종의 일로 고향에 잠깐 왔든가 해서[12] 참사를 직접 본 것으로 추정되며 이것이 일종의 PTSD가 된 것으로 나온다. 이 때문에 3만 명의 포로를 파묻어 죽이자는 말을 듣고 PTSD가 도져서 질색하기도 했다.
평소에는 온화하고 사람 죽이는 걸 최소화하지만, 고향에 대학살을 벌인 조조 세력은 예외인지 업성에서 대숙청을 벌일 때는 굉장히 가차없는 모습을 보였다. 또 유비 개인에게 충성하기 때문에 후한 황실에 대해 적대감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원 역사와 전설에서 이런저런 물건을 개발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라 그런지 기물을 개발하고 개량하는 취미가 있어서 한창 과로하는 와중에도 취미로 이것저것 개발, 개량해서 전투에서 잘 써먹는다. 이 때문에 21세기에 태어났으면 발명가가 되었을 거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북벌 때 유비의 본진과 합류했을 때 잠깐을 제외하면 원 역사 관우처럼 독립 군세를 이끄는 도독 역할을 주로 수행한다. 유비의 직속 책사, 참모 포지션은 방통과 법정이 맡았다.
작가의 전작인 아! 내가 마속이다에서도 야망이 큰 인물이라 언급되는데, 본작에서는 그것이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특히 유비의 나라가 아닌 한나라는 의미가 없다던 내마속 시절의 암시가 더 노골적으로 나타나서 가후가 유비에게 유협 암살을 제의했을 때 찬성했고 유비가 유협을 황제로 옹립하려 하는 것을 알면서도 유비가 황제 자리에 오르기를 바라는 모습을 보이며 방통과 모종의 꿍꿍이속이 있는 듯이 묘사되더니 유협이 죽자 가후가 수작질을 부린 걸 짐작하면서도 신하들을 설득해서 유비가 황제에 오르게 만들기도 했다.
유비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계한 제국의 사도가 되었으며(승상 직은 다시 폐지된 듯)[13], 이후 전쟁터에 직접 나가지 않고 방통과 마량이 살아 각각 사공과 태위를 맡아주는 등 원 역사보다 도와줄 인재들이 많이 있지만 거대한 계한 제국의 실권자가 되어 원 역사보다 훨씬 많이 고생을 한 영향인지 원 역사와 같은 해에 죽고 말았다.
[1] 감녕이 항장 출신이란 딱지를 떼어내고 오에서 확고한 위상을 점유하는 건 합비에서 손권을 구하고, 유수구 전투에서의 특공으로 손권의 체면을 크게 올려준 다음부터고, 이때까지의 감녕은 쓸만한 돌격대장 정도의 위상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2] 기존 형남 수비군이 3만 가량이었는데 8천 정도 추가해도 4만이 채 안 된다. 이미 동오의 뒤통수에 당할 뻔한 이상 수비 병력을 제법 남겨야 하고 다시 육로와 수로로 가르면 조인과 문빙이란 당대의 명장들이 지키는 방어선에 정면으로 도전하기에는 너무 적은 병력만 남는다. 유비군은 증원 한 번 오려면 장강삼협을 건너야 하지만 조조군은 남양 쪽에서 신속한 원군 파견이 가능하니 더더욱.[3] 특히 경험이 부족한 마속이 하는, 동오는 절대 배신할 상황이 아니라며 막 지르는 말에 가장 골머리를 썩는다.[4] 동오가 엿본 바에 의하면 여전히 형주에 3만에 가까운 군마가 남았다고 한다. 215년 임상대치를 마친 유비가 형주를 떠날 때 남겨둔 군마가 3만 가량이었으니 반조조 투항병들을 기반으로 3년새 2만 가량이 늘었다.[5] 강릉성의 북부 40리에 있는 한수까지의 육로가 한수와 그 지류들의 범람으로 몇개월 동안 유지되는 새로운 수로로 바뀌었다. 문빙이 지키는 하수강의 물길을 쓰지 않고 바로 한수로 진입해 양양까지 갈 수 있게 되었다.[6] 손권이 텅 빈 형주를 칠 결심을 했다해도 홍수로 새로 생겨난 물길이 사리지기 전에는 힘들다. 수상한 움직임을 감지한 유비군이 그 물길을 타고 신속하게 귀환할 수 있으니까. 게다가 유비가 패하면 형주를 대신 지켜준다는 명목으로 진입할 예정인데 그전에 움직이면 깃털만한 명분조차 없어진다. 제갈량으로선 새로운 물길이 유지되는 몇달 안에 양번을 떨어 뜨리기 위해 전력을 쏟아부은 것이다.[7] 이를 위해 가히 수백 개의 항아리에 물을 담아 진열하고 장병들이 조를 짜 순찰을 도는 광기스런 행보를 보였다. 이때 병사들 기강을 잡으려 몰래 땅굴을 파 이걸 포착못한 병사들은 군법에 따라 매질을 했기 때문에 병사들은 딴 짓 할 생각도 못하고 땅굴 탐지에 집중해야 했다.[8] 유비는 문빙의 실 역사 전적을 아는만큼 동오군이 맹공을 퍼부어도 한번은 버틸 것을 알았기 때문.[9] 이 와중에 사마의를 암살하면서 원 역사의 악연을 대신(?) 갚는다.소원성취?[10] 작중 관우와의 위상 차이가 잘 드러나는 부분이 항장 처우. 관우는 서황에게 투항을 권고하며 유비군에 중용되도록 해주고 휘하 부곡의 안전까지 보장할 것을 유비에게 언질 한 번 없이 그 자리에서 확정지었지만 제갈량은 우금과 투항군을 죽이자는 쪽으로 흐르는 여론을 어떻게 할 수 없이 주군 유비에게 결정을 미뤘다.[11] 작가의 전작인 내마속에서 제갈량이 한 유언에 따르면 다른 이유도 있기는 했지만, 유비의 밑에 들어가면 더 출세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유비의 삼고초려를 받아들였다고 한다.[12] 실제로 역시 서주 출신인 노숙도 강동으로 이사하고 난 뒤 할머니의 제사 일로 잠시 서주로 돌아왔던 적이 있기에 제갈량도 이런 가족 관련 일로 잠시 서주에 왔을 수도 있다.[13] 승상 직위 자체가 전한 성제 때 삼공이 도입되며 사라졌다가 조조가 부활시킨 직위이므로 계한에서는 굳이 도입할 이유가 없다. 제갈량이 승상 직위에 올랐으면 더 심한 과로로 빨리 사망했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