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3-28 11:22:20

서량 전쟁

서량 전쟁
장소
서량 전역
기간
215년 ~ 217년
교전세력 유비군 조조군
지휘관 유비
관우
장비
황충
위연
법정
방통
황권
장임
조조
조홍
하후연
염행
장합
곽회
서황
노석
가후
병력 3만 이상[5만] 3만 이상[8만]
피해 규모 피해 불명 2만 이상
결과
유비군의 승리
영향
유비 세력의 서량과 상용 장악
장로와 신탐의 유비 신종 선언

1. 개요2. 전력
2.1. 유비군2.2. 조조군
3. 배경
3.1. 염행의 서량 귀환
4. 진행
4.1. 유비의 출병4.2. 오환족4.3. 염행의 불만 표출4.4. 진창성으로4.5. 진창 공방전4.6. 조조군의 철수4.7. 북원-오장원 대치
5. 결과


1. 개요

간절히의 대체역사소설 삼국지 유비로 천하쟁패에 등장하는 가공의 전쟁. 위수를 기준으로 해 서량 북부와 남부를 차지한 조조와 유비 진영이 사실상 서량 전역에서 맞붙은 전쟁이다.

사실상 2년 빠른 정군산 전투, 그리고 추가적인 증원과 확전으로 인해 한중 공방전의 포지션을 대체했다.

2. 전력

2.1. 유비군

  • 유비군 2만명 : 본군 1만+한중군 5천+익주군(장임) 5천[3]
  • 황권군 1만명
  • 마초+관우 : 1만명.
  • 최종 병력 합산 5만

2.2. 조조군

  • 오환족 5천명 추정.[4]
  • 염행군[한수군] : 8천~1만명 추정.[6]
  • 하후연군 : 8천명
  • 조홍군 : 1만 이상.
  • 최종 병력 합산 : 7~8만

3. 배경

3.1. 염행의 서량 귀환

215년. 유비와 손권의 임상대치가 벌어지고 있을 때, 조조는 서량군벌 한수가 노환으로 죽어간다는 정보를 듣게 되고, 이를 서량 회복의 기회로 여겨 과거 서량의 유력군벌이자 한수의 사위인 염행을 파견한다. 염행은 장안에 주둔하는 하후연의 지원을 받아 위수 이북에서 빠르게 한수의 세력을 흡수했고 이에 마초가 급히 유비에게 지원을 청하자, 당시 임상대치를 이어가고 있던 유비와 제갈량은 손권과 협상해 대치를 마무리짓고 곧장 관우를 파병해 상규와 기성을 거점으로 삼아 염행을 막게 한다.

염행도 뛰어난 무장이고 장안의 하후연도 그를 지원했으나, 유비와의 동맹으로 친조조 파벌을 거의 다 정리하고 관우가 합세한 마초는 만만치 않은 상대가 된지 오래였고 마초와 관우가 천수군과 상규성 일대의 민심을 붙들고 저항하자 서량 전선은 대치 상태에 빠진다. 그러기를 일 년이 지난 216년 초, 지리한 전황에 질린 조조 측에서 이민족 기병을 대거 동원해 염행을 지원하자 위수 남쪽의 조조 지지세력이 재차 거병하면서 마초와 관우도 남북을 모두 막긴 버거워진다. 마침 1년의 시간 동안 입촉을 마무리한 유비 측에서도 황권과 새로이 훈련시킨 익주병들을 북상시켜 관우와 마초를 돕게 하면서 전장은 급격히 확대된다.

4. 진행

4.1. 유비의 출병

황권의 선발대가 출발한지 몇개월이 지난 216년 초겨울이 되자 유비는 1만의 병력을 이끌고 한중으로 출진한다.

한중에서 서량-관중으로 나가는 길은 총 다섯개가 있었지만 이 길들은 대부분 조조군이 이민족 기병을 대거 동원해서 막아버린 상태였고 어떤 길을 써서 서량에 간다 해도 당장 위수를 넘거나 조조군을 공격할 방법이 전무했다.

한중에 도착한 유비군은 추후 진군로를 두고 천수군에 합류하는 기산도,[7] 조조의 친족인 하후연이 주둔한 진창성으로 가는 진창도,[8] 장안으로 가는 자오도[9] 중에서 어디로 향할지 논쟁을 벌인다. 어느 길도 명확한 해답이라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장수들은 유비에게 판단을 맡겼고 유비는 원역사에 제갈량이 철저한 계획을 세우고, 성과를 거둔 오장원으로 가는 야곡도를 선택해 한중군 5천까지 동원해서 1만 5천의 병력으로 전장에 나아간다.

야곡도를 지나서 오장원에 도착한 유비군은 원역사의 제갈량이 그랬듯 오장원에 주둔한다. 오장원은 수만 대군이 주둔하기 충분할 정도로 넓고 지키기 쉬운 요충지로 바로 앞에 위수와 미현으로 이어지는 평야가 내려다 보여 조조군 동향 감시에도 용이했다. 그러나 조조군도 멍청이는 아니라 기동력이 뛰어난 오환족 기병 수천기를 미현에 배치해 위수 일대를 철저히 순찰하고 있었고 그런 오환 기병을 뚫기엔 1만 5천의 병력으론 부족해서 유비군은 위수를 넘을 수 없었다.

4.2. 오환족

위수를 넘지 못하면 그냥 수천 단위의 피해를 각오하고 강을 건너거나, 무력하게 퇴각해야 했다. 이에 위수를 넘을 방안을 세우느라 모사인 방통과 법정도 고민하는 와중에 삼국시대의 미시사에도 지식이 많던 유비는 오환왕 노석이 원역사에서 신혼인 아내를 만나기 위해 전장을 이탈했다가 처형 당하는 황당한 비사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이를 활용하고자 한다.

유비는 이 미래 지식을 바탕으로 반드시 오환족은 허점을 보일 것이라 주장하며 매일 오환족을 관찰하게 했다. 그러기를 몇 주가 지나자 위수의 오환족 정찰병이 갑자기 배로 늘어난 것이 관측되고 유비는 결국 노석이 일을 저질렀음을 깨닫고 도하를 시도하라고 명령한다.

유비가 선택한 도하지는 오장원에서 북서쪽에 위치한 언덕인 북원으로, 이곳은 수비에 유리해서 점거만 하면 장안에서 진창성, 현친현으로 통하는 길목을 위협해 적의 보급을 끊어버릴 수 있는 천혜의 요충지로 유비군 입장에선 반드시 장악해야 할 곳이었다.

곧 장비가 반대쪽인 양수 일대에서 도하를 시도하는 척 하면서 오환족 주력을 끌어낸 사이 위연이 이끄는 보병들이 도하에 성공, 달려온 오환 정찰대를 격파하고 왕이 부재한 오환족이 주력을 동원하지 못하는 사이 그대로 진지를 설치해버린다. 오환족의 감시를 피해 위수를 도하하는데 성공한 유비군 정병 4천명은 그대로 북원을 점령, 서쪽에 있는 조조군의 보급로를 끊는다. 유비군 주력이 건너오자, 미현의 오환족 수천은 가족이 인질로 잡힌 이상 유비한테 의탁하기도 어려웠던지라 그대로 양군을 피해서 도망쳐 버린다.

진창성의 하후연, 현친현의 조홍 등 조조군은 당연히 상식적으로는 쉽게 뚫릴 수 없는 곳이 뚫려버렸다는 소식에 경악했고, 오환족이 배신했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 시간 병주 태원군에 간 오환왕 노석은 당연히 반란 생각은 전혀 없었고 아내만 데려오려했을 뿐이며 일단 아내를 챙겨서 그 다음에 조조군과 협상하면 된다는, 사실상 탈영을 한 상황에서도 이런 속편한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오해를 사놓고도[10] 태원군 진양성 밖에다가 호위 500기를 대기시키고 소수로만 진양성에 들어갔다가 양습이 보낸 선비족 기병에게 쫓기게 되어 죽을 위기에 놓인다.

노석이 선비족 기병에게 잡히기 직전, 장비의 촉군기병 300기가 개입해 선비족 기병대를 급습하면서 노석 일행은 가까스로 살아난다. 유비는 이 황당한 사태에 대한 미래 지식과 서량 호족인 마초에게 얻은 정보를 통해 서량에서 병주 사이에 오랜 학정과 난세로 인한 인구공백지대가 있단 사실을 깨닫고 그 곳을 루트로 삼아 장비를 보내 노석을 구한 것이다.[11] 그러나 그 과정에서 조조군 도위를 죽여버리면서 노석은 유비에게 망명할 수밖에 없게 되고 그가 데려온 오환 기병도 고스란히 장비가 흡수한다. 이후 병주와 관중은 배신한 오환족이 장비의 촉한군과 연합해 남하하면서 장안까지 위협당한다는 소문이 퍼지며 비상이 걸린다.

4.3. 염행의 불만 표출

서량에서는 유비군의 북원 점령으로 분위기가 뒤집힌다. 대세력인 조조가 보증하기에 염행을 따른 위수 북쪽의 호족들은 다시 줄을 갈아탈 수도 있는 분위기를 점차 드러냈고, 염행은 겁에 질려 서량병을 믿지 못하고 조조군을 호위로 달라고 청한다.

그러나 열후라고 한들 조위에서는 항장에 공적도 없는 염행의 입지는 낮았다.[12] 그나마 조홍이 염행에게 설득돼서 병력을 내주려던 때에 곽회가 나서서 서량인인 염행이 동향인을 불신하면 신망을 잃어 얼굴마담의 가치를 잃는다고 주장하며 훼방을 놓자 염행은 격노한다. 멱살잡이까지 간 상황에서 조홍과 장합이 뜯어말려 간신히 상황이 진정되자 곽회가 침착히 대처하면 서량인의 이반을 막을 수 있다고 염행을 설득한다.

그 이유는 첫번째로 북원에 있는 유비군 4천으로는 장안과의 연결을 완전히 끊을 수 없으며, 두번째는 조조의 원군이 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는 점을 들었는데, 당시 장강을 사이에 두고 동오군과 대치하는 조조군 주력이 관중의 급보를 들으면 강을 타고 예주까지 와서 관중에 40일 내외로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조조군이 불리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그 상황을 버틸 시간은 생각보다 짧을 것이라는 말을 하면서 예주와 유수구 일대의 수로를 그린 지도를 건네주자 염행도 진정할 수 있었다.

4.4. 진창성으로

염행이 설득되자 곽회는 이후 대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유비가 직접 출정한 만큼 유비군이 자신들의 주군이 위험해질 수 있는 길인 장안을 치는 모험을 할 수 없을테니 진창성을 공략할 것이 분명하다며 현친현의 조위군 주력도 진창성으로 가서 유비군을 막자고 주장한다.

이런 곽회의 판단은 정확했다. 법정과 방통은 무공현을 통해 장안을 향해 진격하는 동정과, 서쪽 진창성을 정벌해 서량을 완전히 장악하는 두가지 선택지가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전자는 평야에 가까운 무공현을 지나서 장안에 가야 하는데, 유비군은 위연과 장비에게 각자 정예 보병과 기병을 대부분 내준 상황이라 남은 병력으로 조조가 복속시킨 흉노 기병들이 지키는 무공현을 뚫고 장안까지 공략하기는 어려웠고, 하후연과 서황이 있는 진창성을 공격해 서량을 완전히 장악해 조조를 막을 방어선을 만드는 게 현실적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쉬운 길은 아니었는데 조조라면 관중에 대군을 급파하는데 6주의 시간이면 충분한지라, 진창성에서 시간을 낭비하면 좁은 분지 지형의 특성상 양측에 포위당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비는 미래 지식으로 남은 시간을 재계산 할 수 있었고, 진창성 공략을 결정한다.

그 미래 지식은 바로 유비가 진창성 공략을 결심한 그 때, 유수구에 역병이 퍼져서 조조군과 손권군을 가릴 것 없이 곡소리가 끊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당장 조조군만 해도 이전, 사마랑이 역병으로 죽었고 진림도 골골대다 사망했으며, 악진 같은 이들도 병색을 보이기 시작했다.[13]

지휘부가 이럴진데 병사들의 상황은 더 심각해서 감염된 병사만 수천에 달했고 이런 병사들을 데리고 관중으로 갔다간 중원에도 역병이 퍼질 판이라 조조는 당장 관중에 지원군을 보낼수가 없었다. 관중의 친족들이 위태하다는 소식을 들으면서도 조조에겐 어찌 할 방법이 없었고 자신이 유비를 괜히 키웠고 화타를 죽여선 안됐다며 한탄할 뿐이었다. 사실 화타가 있어도 역병은 못 막겠지만 거기다 관중의 장안성에 배치된 병력들도 상술된 오환 반란 소문 때문에 관중 호군 조엄의 지휘 아래 병력을 결집해 장비와 오환 반란군을 막을 준비를 하느라 서량의 조조군을 지원할 여력이 없었다.

결국 조조군은 서량에 있는 전력만으로 유비군에 맞서야하는 형편이었고 그 결과 유비군 1만과 황권, 마초, 관우의 거점 수비병력을 제외한 전 병력, 하후연과 서황의 병력과 현친현의 조홍이 짜낸 지원군까지 더해진 유비군과 조조군 양측은 진창성에서 결전을 벌이게 된다.

4.5. 진창 공방전

유비는 우연히도 본군의 장비와 위연이 각자 역할을 수행하는 사이 원역사에서 하후연을 상대한 황충이 남아있자 그에게 주장을 맡기고 법정과 같이 진창 공략을 명한다. 위수를 사이에 두고서 대치하는 유비군과 조조군도 모두 진창이 서량 전역의 결과를 결정지을 곳이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대치중인 마초와 관우, 염행과 조홍이 정말로 거점을 비우고 달려오기는 쉽지 않았다.

유비는 위수 일대에서 병력이 더 움직이는 건 어려우리라 판단하고 전투를 준비한다. 당시 하후연과 서황의 군은 8천, 유비군은 1만 1천 정도였는데 진창성은 2~3천명의 병력만으로 충분한 작은 성이기에 하후연은 성 밖에 목책을 세우고 그 곳에 주력군을 배치했다. 본래 법정은 손해를 보더라도 즉시 목책에 대한 공세에 들어갈 계획이었으나, 유비는 천천히 보루와 참호를 파면서 정석적으로 공략하라고 명한다. 정석적인 공략을 내놓는 유비에게 방통이 나서서 정석대로 가면 3주는 날리게 되어 시간이 부족하다고 간언하나, 유비는 그래도 신병인 익주군을 위해선 이런 시설들이 필요하다고 명하자 이를 따른다.

그렇게 2~3주간 공성전 준비를 하던 유비군에 장임과 익주군 5천명이 추가로 합류한다. 군재가 있는 장임은 앞으로 벌어질 진창성 공방이 서량 전역의 결과를 정한다는 걸 익주에서부터 간파하고 강행군을 해서 예상보다 훨씬 빨리 도착한 것이다. 이에 방통은 지금 온 익주군이 휴식할 이틀의 시간 뒤에 총공세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전했고 유비는 이를 따라 이틀 후 결전을 벌이기로 한다.

이틀이 지나자 유비군은 진창을 향해 공세를 개시한다. 유비군은 1만 6천으로 두배에 달했기에 수적 우세를 기반으로 조조군을 밀어붙이지만 하후연과 서황은 이를 능숙하게 막으면서, 서황이 나서서 익주군에게 역공까지 감행할 정도로 잘 싸웠다. 그러나 유비군도 미리 익주군에게 적군의 반격을 방비하기 위해 화공을 준비시키는 등 약점을 보완한 상태였기에 어느 쪽도 밀리지 않았다. 그러던 중 유수구 역병 소식이 유비군에 도착하면서 책사와 장수들의 사기는 오르고, 유비는 이를 진창성의 하후연에게도 알려준다.

유수구 역병 소식이 조조군에 전해지는 동시에, 조조의 밀서도 하후연에게 도착하는데 내용 자체는 내가 30만 대군을 이끌고 올테니 식사를 준비하라는 긍정적 내용이지만 하후연과 서황은 그 서한의 진의를 깨닫고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다.[14] 그래도 더 버틸 수밖에 없던 서황과 하후연은 밀서를 진영에 돌려서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고 끈질기게 버틴다.

이후 공방전이 계속 이어지던 와중에 조홍과 대치중이던 관우와 황권이 위수를 타고 진창성에 도착하면서 승부의 추는 유비군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다.[15] 황권과 관우의 병력이 합류하자 유비군은 즉각 조조군을 몰아 붙였고 이에 하후연이 맞서는 과정에서 법정이 세운 유인책에 걸려 목책을 부순 유비군에게 포위당한다. 뒤늦게 서황이 하후연을 구하려 했으나 법정이 짜놓은 판에 걸려 정반대 위치에 있었던지라 타이밍 맞게 올 수가 없었고 체력을 온존한 황충이 돌격해 체력이 다한 하후연을 급습해 베면서, 하후연은 2년 빠른 죽음을 맞는다.

4.6. 조조군의 철수

한편[16] 현친현의 조조군은 강족, 저족의 배까지 징발해 맞섰음에도 유비군의 수군에게 패해 징발한 배마저 전부 잃어버린 뒤였다. 조홍과 곽회, 장합은 좌절하는 와중에도 지난 과도한 징발로 인한 현지인들의 원한을 걱정하고 있었고 그때 조조의 서한이 이들에게 도착한다.

조조의 서한을 확인한 뒤 곽회는 서량의 유력자인 국연과 장석 등의 호족들을 돈으로 포섭한 뒤[17] 저녁에 연회를 열 것이니 와달라 요청했고 이에 연회에 온 두 사람을 향해 조홍은 도부수들을 내보내는 것으로 응대한다. 이들이 확인한 조조의 밀서 내용은 바로 이제 서량은 지킬 수 없으니 유비의 손에 그 호구가 들어가는 일이 없게 하라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18]

한편 진창성에서는 하후연이 죽은 뒤 조조군이 궤주하자 법정은 서쪽의 퇴로를 열어주어 조조군이 그쪽으로 몰리도록 유도한다. 그 와중에 서황이 다시금 진창성으로 들어가고자 역습을 시도하나 황충이 이를 간파해 막아서는 바람에 무위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런 조조군을 관우와 황권이 추격하기 시작하고 지친 조조군이 도저히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판단한 서황이 스스로의 도주를 포기하고 후위를 막아선다. 서황과 친분이 있던 관우가 나서서 그를 회유하고자 하지만 서황은 이를 거절하면서 오히려 유비가 황제를 모시면 황제가 더 위험해지지 않겠냐고 역으로 질문을 던진다. 조조에게 완벽히 충성심이 굳은 서황을 본 관우는 설득을 포기, 일기토에 돌입한다.

서황은 완전히 지친 몸상태로도 놀라운 무예를 보여주며 무려 50합을 버텼으나 그 이상은 무리였고 관우에게 목을 내놓으며 원역사보다 10년이나 이른 죽음을 맞는다. 오랫동안 서황을 따르온 노병들도 투항을 거부하고 주군의 뒤를 따르자 진창 일대에 남은 위군은 즉시 항복한다.

장래 큰 우환이 될 적장을 잡은 것에 안심하는 유비였으나 조조가 위수 이북의 호족들을 참살하고 백성들을 강제 이주시켰다는 소식과 조조군 본대가 동관 진입을 앞두고 있다는 급보가 전해진다.

4.7. 북원-오장원 대치

조조는 장안에서 위수 북쪽의 주민들을 최대한 병주로 빼내는 것을 지휘하다가 하후연과 서황의 전사 소식을 전해듣는다. 서황의 전사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책사들이 동요하는 와중에도 강제 이주 절차가 어느정도 진행된 것을 확인하자, 조조는 수습한 서량 병력과 유수구에서 몰고 온 본대 병력을 합쳐서 서량으로 서진한다.

이에 맞서는 유비군도 다시 동진해서 이미 차지한 위수 북쪽 북원, 위수 남쪽 오장원으로 집결한다. 당연히 겨우 2~3만의 병력으로는 조조의 본대 상대로 두 요충지를 완전히 막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서량에 배치된 마초군과 익주군을 합류시키고 익주 본토에서도 계속 증원병을 보충해 5만명으로 병력을 불린 상태에서 북원에 도착하고, 그 중 1만의 병력을 황충과 법정에게 맡겨 위수 남쪽 오장원을 막게 한다.

유비가 방어 준비를 마친 뒤, 조조는 8만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북원 앞에 도착했고 조창과 가후에게 명해 오장원 쪽 유비군 방어선을 순찰하게 하는 한편 본인도 직접 북원 쪽 유비군 방어선 순찰에 나선다. 그러나 50리에 이르는 넓은 방어선은[19] 과거와는 달리[20] 상당히 정교하고 철저해 조조도 함부로 공격할 수 없었고 유비의 성장을 애써 부정하려 하지만 정욱 역시 유비가 방어선을 잘 짰다고 인정하자 결국은 이를 간다.

한편 조조가 순찰하는 모습은 유비군에게도 뻔히 보였기에, 유비는 조조가 자신을 만만히 보고 직접 순찰을 하는 행태를 막기 위해 유비군에서도 최고의 무장으로 손꼽히는 장비와 마초를 출격시킨다.[21]

갑작스런 습격에 정욱을 비롯한 모든 책사들이 당황하는 와중에도 이를 예상하고 있던 조조는 태연하게 허저와 조진을 출격시켜 장비와 마초를 막아선다. 조진이 몰고 오는 철갑 전기들을 정면 대결에서 당해내긴 역부족이라 본 장비와 마초는 그들을 언덕으로 유인해 그곳에서 들이쳤고 아직 경험이 부족했던 조진은 철갑 전기들의 피해가 늘어나는 걸 지켜봐야 했지만 조조의 용인하에 안정을 되찾고 다시금 힘으로 밀어붙인다. 이런 상황에서 관우가 지원을 자청하지만 서막과 관구흥이 원군을 이끌고 달려오는 상황에서 피해가 누적될 것을 우려한 유비는 아직 이기고 있는 시점에 마초와 장비를 물리는 한편 관우가 이들을 엄호하게 한다.

한편 오장원에서는 법정과 가후가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법정은 미현 출신으로, 과거 가후가 끌어들인 이각, 곽사가 관중을 엉망으로 만드는 바람에 일족을 여럿 잃고 본인도 굶어죽을 뻔한 과거가 있었다. 가후에 대한 원한이 큰 법정은 이제는 서량인들을 강제이주시키는 조조를 돕는 가후를 격하게 비난하나 가후는 그 시절은 정당방위였고, 지금은 유비가 전쟁을 벌인 탓이라고 태연히 대꾸한다. 그렇게 설전을 벌이는 와중에도 오장원의 방어 상태를 살피던 가후는 법정이 군을 움직일 기미가 없고 황충도 수비 강화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고는 지금은 오장원을 쳐봤자 의미가 없다고 판단해 같이 온 조창에게 대치만 이어갈 것을 조언한다.

유비군의 방어가 견실한 덕에 대치는 장기화되었고 그런 상황 속에서 유비는 218년에 있을 경기, 위황의 난을 활용할 방도를 고심하는데 거리라는 근본적인 문제 때문에 도무지 이들을 직접 활용할 방안을 찾지 못했고 결국 이들이 당장은 반란 계획을 접게 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 풍등을 이용한 여론전을 다시 벌이기로 한다.

유비가 기획한 여론전은 원역사의 조만전을 기반으로 여기선 아직 벌어지지 않은 경기, 위황의 난과 이후 조조가 저지른 데스 게임을 내용으로 삼는, 맹덕전이라 불리는 일종의 도참서를 만들어 위군 진영에 퍼뜨리는 것으로 방통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로 이리 쓰면 효과가 있겠냐 우려를 표하지만 유비는 이것이 조조를 물리치리라 확신하며 작전을 진행한다.

잠시 후 순식간에 퍼진 맹덕전에 책사들이 열폭하는 와중에도[22] 조조는 자기 취향과 계획에 딱 맞는 이야기라며 놀라워 한다. 그러나 사마의가 이러면 시선이 반란에 집중되어 유비의 편이 되어줄 내부 반란 세력이 일어나지 못할텐데 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의문을 품자 적당한 반란을 빌미 삼아 허도의 중신들을 학살할 계획이 실패할 위기임을 깨닫는다.

결국 조조는 철수를 결심하고 이에 오장원에 있던 조창은 반발하지만 결국 이는 왕자들을 위한 결단이라며 따라야 한다는 가후의 조언이 있었고 본대가 이미 철수를 시작한 상황이라 뭘 할 수도 없었기에 결국 본대를 따라 철수한다.

그렇게 서량 전쟁은 마무리되고 유비군 장병들은 모두 환호하지만 유비는 이게 진짜 전쟁의 시작이라며 속으로 씁쓸해한다. 그와 동시에 상용의 장로와 신탐이 신속하겠다는 서신을 전해오며 한중에서 형북으로 뻗아나갈 길목이 확보된다.

5. 결과

유비의 승리
조조의 서량 포기
동삼군의 유비 투항

유비는 처음으로 군주vs군주의 싸움으로 조조에게 대항해 승리를 거두었고 황권, 장임 등의 익주 숙장들과 오란, 뇌동, 진식 같은 신진 익주군 지휘관들에게 대군을 지휘하는 경험과, 승리를 안겨줘서 유장과는 다르다는 인식을 주어 그들의 충성도를 올리는 데도 성공한다. 이로서 유비는 적벽에서 이긴 손권처럼 사천 호족들의 인정을 받는 군주가 되었다.

서량에서 조조의 영향을 축출해내면서 온전하게 국경을 형성하는 것에 성공했다. 이번 전쟁에서 마초를 산하에 두고 부리면서도 어느 반감도 사지 않아 서량군 역시 유비 산하에 들어왔음을 천하에 알릴 수 있었다. 이로서 유비는 서량-익주-남형주 3군을 차지해 동오보다 강한 국력을 가지게 되었다. 다만 서량 북부의 민호를 적잖이 빼앗기면서 본래 기대한 량주 방면의 장안 공세는 시간이나 규모를 맞추기 어려워졌다. 또한 동오의 촉오 동맹 지지자인 대도독 노숙이 사망하고, 손권이 강해진 유비를 적대할 것을 결정하면서 동맹도 결렬이 확실시되었다.

조조는 판정패로 적잖은 손해를 보았다. 물론 마지막 대군의 대치에서 제대로 진 것도 아니고, 기존 서량 전역에서 병력 손실이 치명적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조조 정권의 핵심인 하후씨 일족의 상장 하후연이 죽었고, 오자양장으로 2~30년간 많은 공을 세워온 서황도 부곡들과 함께 전사한다. 이번 전쟁의 패배로 적어도 조조 생전에는 유비가 먼저 들어오지 않는 이상 조조에겐 유비를 먼저 죽인다는 선택지는 사라지고 말았다.[23]

또한 동삼군(서성,상용,방릉)도 유비군에게 넘어가면서, 형북의 안정성도 크게 떨어졌다. 원역사에서는 유비군이 너무 시간이 촉박한 나머지 동삼군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으나, 여기서는 원역사보다 2년 먼저 동삼군을 얻어내면서 219~220년 공세의 주공격로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5만] [8만] [3] 강행군을 따라가지 못 해 낙오된 병력까지 합하면 7~8천이나 이들의 합류 여부가 불분명하다.[4] 1만 5천의 유비군 본대를 막을 때 도하라는 유리한 조건이라 해도 조조군이 별로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이나, 장비가 오환족 주력군을 유인했는데도 기병 1,2천기 정도는 끌고 올 거라고 생각하는 장면을 보면 4~5천 이상은 확실하다.[한수군] [6] 한수가 마초의 거병 당시 보유한 병력이 8천이었고, 염행이 2천 병력을 받아 서량에 와서 세력을 흡수했다.[7] 천수군의 치소 기성과 가까워 바로 마초, 황권과 합류할 수 있으며 황권이 이 길로 서량에 들어가 마초를 도왔다. 장비와 방통이 지지했는데 여기에 합류하면 3만 이상의 대군이 되어서 기존의 전술인 다방면 공세가 어느정도는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겨우 1만 언저리 차이기 때문에 위수를 건너려면 큰 피해를 각오해야 했다.[8] 법정이 지지했다. 다만 이 길도 간다고 바로 진창성이 나오는 게 아니라, 진창도를 간 다음 위수를 건너야 했다.[9] 원역사대로 위연이 지지했다. 다만 길이 너무 좁아 위험성이 높았기 때문에 방통과 법정, 장비 모두 합심해서 반대했다.[10] 사실 오해가 없었더라도 노석이 저지른 건 명백한 적전 탈영이라 처형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특히 적과 직접 대치중인 적전 상황에서 현장 최고 지휘관인 본인이 사적인 이유로 자리를 비운 것도 문제지만 그렇게 자리를 비운 사이에 유비군이 위수를 넘어 북원을 점령해 조조군의 보급을 끊어버렸으니 추후 전쟁 진행에서 결정적인 악영향을 끼칠 요인을 본인이 만든 꼴이 된지라 즉결처형 당해도 할 말 없는 죄다. 결국 군령을 가볍게 여기고 우습게 본다는 증명밖에 되지 않는 것.[11] 서량은 동탁, 이각, 곽사가 통치하고 이후 관중제장의 난까지 거치면서 붕괴해버렸고, 병주는 최대치 백만에 달한다는 설이 있던 삼국시대 최대 도적단체인 흑산적의 본거지였다. 그래서 태원군이나 일부 현들이 아니면 인구가 너무 적어서 기병 500기가 병주의 치소인 태원군으로 향하는 걸 막을 사람이 없었고, 유비도 이걸 알고 있어서 장비를 보냈던 것.[12] 그래서 조홍보다 직위가 낮은 장합이 그를 응대했다.[13] 실제로 이 시기에 삼국지하면 떠오르는 조조나 손권 측 인재들이 많이 죽었다. 상술된 이전, 사마랑, 진림은 물론이거니와 건안칠자 중 하나인 왕찬도 이때 죽었으며 손권 측에서도 노숙, 능통, 동습이 사망했고(다만 동습은 역병으로 병사한 게 아닌 사고사로 죽었다.) 병색을 보인다고 언급된 악진 역시 1년 뒤인 218년에 죽음을 맞는다.[14] 조조가 진짜 거의 도착했으면 밀서를 먼저 보내기 보단 기병부터 보내서 적진 후방을 흔들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 기미도 없는데 대뜸 밀서만 왔으니 조조가 당장 못 오는 건 기정사실이라 좌절감이 들 수 밖에 없는 것.[15] 현친현의 조홍도 진창성에 병력을 보내려 했다는 묘사가 있는데 유비군이 먼저 전장에 도착했다는 건 위수를 둔 수전에서 조조군이 유비군에게 패했다는 의미다.[16] 시간대상 진창 공방 와중.[17] 물론 이들도 이미 서량 전역이 유비에게 넘어갔다는 걸 알지만, 일단 거대 세력인 조조의 비위를 대놓고 거스르긴 뭣하다 보니, 딱 2달 정도만 조조 지지를 유지한 뒤 그 뒤에는 주저없이 유비-마초 동맹에 투항할 생각이었다.[18] 우연히도 이 때 참수당하는 국연, 장석, 전악은 후일 위나라에 반란을 일으키는 인간들이다. 심지어 국연은 반란을 두 번이나 일으켰다.[19] 1리의 단위는 시대별로 차이가 있으나, 대략 400미터로 잡으면 20킬로미터에 달한다.[20] 자리잡지 못하거나, 체계적인 군사교육을 못 받은 유비군은 군사가 많아질수록 오히려 빈틈이 생겨나는 식이라 인재가 많고 대군을 지휘하는 데 익숙한 조조는 그걸 볼 수 있었고 실제로 이를 이용한 집중 공격 전술로 서주와 여남에서 유비군을 많이 깨트렸다.[21] 이에 관우는 자신이 가고 싶다고 했으나 치고 빠지기를 잘해야 하는 습격전은 사생결단 전면전 스타일을 즐기는 관우와 맞지 않아 유비가 제외시켰다.[22] 사전에 공격하면 안된다던 정욱도 분개하면서 촉군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위여부와 상관없이 이는 유비가 조조를 매우 깔본다는 선포였기 때문.[23] 본작의 조조는 찬탈을 위해 장기원정을 절대로 하지 않는다. 이런 설정을 제하고 둔다고 쳐도 조조의 수명은 3년도 남지 않아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