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계로(季老) 또는 원선(元善) |
본관 | 연일 정씨[1] |
출생 | 1870년 11월 3일[2] |
경상도 영천군 자양면 월연동 (현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용산리[3] 월연마을 971번지) | |
사망 | 1941년 7월 15일[4] (향년 70세) |
경상북도 영천군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1묘역-512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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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1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정치석의 친동생이며, 정치화는 8촌 삼종형(三從兄)이다.
2. 생애
1870년 11월 3일 경상도 영천군 자양면 월연동(현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용산리 월연마을 971번지)에서 아버지 정유경(鄭裕璟, 1835. 6. 22 ~ 1888. 6. 22)[5]과 어머니 청안 이씨 이경이(李敬伊)[6] 사이에서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9살 되던 1878년부터 10년간 집안 어른들로부터 한학을 수학했고, 1892년부터 고향 마을의 추모당에서 훈장을 지내며 문중 및 마을 자제들을 가르쳤다.1906년 3월 고종황제의 밀지를 받은 시종관 정환직(鄭煥直)[7]이 그의 장남인 정용기(鄭鏞基)[8]에게 의병을 일으키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정용기가 고향 영천군으로 내려가 이한구 등을 규합하여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조직하자, 좌익장(左翼將)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산남의진 창의 초기에 군수품 조달 및 군자금 모집 등을 위해 각 초장(哨長)을 고향으로 파견하였는데, 그는 영천군 지역으로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1910년 산남의진이 해산되자 은거하다가 독립운동에 협력하였으며, 이후 1941년 7월 15일 경상북도 영천군에서 별세하였다.
201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당초 영천시 자양면 광연산에 안장되었고, 이후 임고면 평천리 뒷산에 이장되었다가 2013년 11월 21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1묘역에 재차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