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868년 2월 1일 |
평안도 덕천군 금성면 연당리[1] (현 평안남도 덕천시 남양리) | |
사망 | 1943년 1월 17일 |
본관 | 나주 정씨 (羅州 丁氏)[2]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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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정진원은 1868년 2월 1일 평안도 덕천군 금성면 연당리(현 평안남도 덕천시 남양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면(현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1904년 말에 한학자였던 그는 덕천군 지역에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일종의 의병 공동체인 종유계(宗儒契)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에 호응하고, 당시 평안도 지방의 종유계가 일제의 앞잡이 일진회를 타파하려는 계획에 동참하였다.
이후 의병장 유인석 휘하에 들어가 활동하기도 하였으며, 경술국치 후 1919년 3.1 운동 일어나자 덕천군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1920년에는 이윤실(李潤實)·정계록·정붕익(丁鵬翼) 등과 함께 다수 청년들을 규합하여 중화민국 봉천성 동변도(東邊道) 통화현(通化縣) 삼원보(三源堡)[3]에 본부를 둔 대한독립단 단장 조맹선과 연락을 통해 덕천지단(德川支團)을 조직하고 총무에 취임하여 군자금 모집 및 독립사상 고취에 주력하였다.
한편, 그는 진명단(盡命團)이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덕천면 덕주령(德州嶺)에서 우편차를 습격, 우편차를 호송하던 일본 경찰을 사살하고 군자금을 확보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인근 각 지단과 연락하여 덕천을 비롯한 맹산군·영원군의 일본 경찰주재소를 일시에 폭파하고자 하다가 1921년 6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1921년 10월 26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은닉 혐의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에 공소하여 1922년 2월 23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강도 등의 혐의로 징역 3년 23일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1943년 1월 17일 별세하였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