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장화진(張和鎭) |
생몰 | 1899년 5월 24일 ~ 1974년 12월 28일 |
출생지 | 충청남도 연기군 동면 예양리 |
사망지 | 충청남도 공주읍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포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6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장화진은 1899년 5월 24일 충청남도 연기군 동면 예양리에서 태어났다. 1917년 부친 장재학과 숙부 장재규가 일제에게 세금을 한 푼도 바칠 수 없다며 납세거부운동을 전개하다 거금도로 유배되었다. 일본 헌병은 그에게 “너의 아버지는 호적과 납세를 하지 않아 쫓겨났다. 너는 말과 행동을 조심하며, 생업에 힘쓰고 법을 어기지 마라”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는 헌병을 꾸짖었다.“아버지를 사지에 두고 그 아들에게 안업(安業)을 권장하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말의 순서와 뼈대(倫脊)가 없으니 오랑캐를 면하기 어렵겠구나!”
헌병들은 서로 보며 미친 놈이라 하고 그를 돌려보냈다. 이후 장화진은 1917년 2월 27일 우편법 위반으로 공주지방법원에서 법정 출두 호출을 받았으나 이에 응하지 않아, 동년 3월 3일 공주지방법원으로부터 벌금 20원을 받았다. 다시 3월 3일에 발송된 우편물 역시 수취를 거부하여 1917년 3월 30일 공주지방법원으로부터 우편법 위반으로 벌금 1원 95전(벌금을 완납할 수 없을 때는 4일간 노역)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1917년 3월 26일 연기군청에서 또다시 보낸 우편물의 수취 역시 거부했으며, 호적 입적과 납세도 거부했다.
결국 1917년 4월 공주지방법원은 그에게 유배 1년 판결을 내리고 제주도로 유배보냈다. 이후 귀향한 장화진은 공주에서 조용히 지내다 1974년 12월 2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장화진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8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