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1 17:19:55

장융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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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융밍
张永明 | Zhang Yongming
파일:Zhang_Yongming.jpg
출생 1955년 8월 16일
윈난성 쿤밍시 진녕현 남문촌
사망 2013년 1월 10일 (향년 57세)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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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목 연쇄살인
피해자 12명
검거 2012년 5월 9일
처벌 사형(총살형)

1. 개요2. 생애3. 첫 번째 살인4. 실종 사건5. 수사6.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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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당시 기사

중화인민공화국의 연쇄살인범. 2008년부터 2012년까지 11명의 남성을 살해하고 시신의 일부를 개에게 먹이고, 시장에서 타조 고기로 판매하였다. 2013년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2. 생애

장융밍은 1955년 8월, 관광지로 유명한 중국 윈난성 쿤밍시 진녕현에 속한 남문촌이라는 시골마을에서 농부인 부모님 밑에서 네 남매 중 넷째[1]로 태어났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어릴 적부터 내성적이고 조용한 아이였다고 한다. 하지만 장융밍의 어머니는 매우 폭력적인 사람이었는데 항상 술을 마시곤 사람들에게 욕설을 내뱉었다. [2] 그리고 그의 둘째 형 또한 1980년 시장에서 말다툼을 하다 상대방의 머리를 곡괭이로 찍어 살해한 혐의로 수감된 적이 있었다. 한마디로 가족 대대로 살인자인 셈

그러던 1974년 12월 25일, 같은 마을에 살던 유일한 친구인 루쉬롱 (Lu Shirong)과 함께 밤늦게까지 놀다 집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너무 늦은 시간이라 루쉬롱의 집 대문은 굳게 잠겨있었고 이를 본 장융밍은 루쉬롱에게 자신의 집에서 자고 가라고 한다. 그렇게 루쉬롱은 장융밍과 함께 자게 된다.

하지만 새벽 2시경 루쉬롱은 엄청난 통증을 느끼며 잠에서 깨게 되는데 그는 눈앞에서 장융밍이 자신의 목을 칼로 난도질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만다. 루쉬롱은 놀라 소리를 질렀고 소리를 듣고 달려온 장융밍의 아버지가 피범벅이 된 그를 발견하고는 장융밍을 제지하고 경찰에 신고를 하게 된다.

장융밍은 체포된 후 경찰에게 몽유병 때문이지 고의적으로 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래도 살인미수였기에 장융밍은 고작 6개월의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았고, 루쉬롱은 치료비용의 1/10도 되지 않는 수십 위안 정도만 보상받게 된다.

3. 첫 번째 살인

1978년, 장융밍은 기와공장에서 일을 하던 중 양수용 (Yang Shurong)이라는 청년을 만나게 된다. 어느 날 장융밍은 양수용과 함께 쌀을 사기 위해 읍내로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마을에서 10km 정도 떨어진 식당에서 저녁을 먹게 된다. 하지만 식당에서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양수용은 실종되었다. 양수용의 가족들은 장융밍이 마지막으로 양수용과 같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곧장 그를 찾아가 양수용의 행방에 대해 묻는다. 장융밍은 자신이 양수용과 같이 저녁을 먹었던 것은 맞지만 그 이후로 헤어졌고 그 이상은 모른다고 말했다.

양수용의 가족들은 장융밍이 매우 의심스러웠지만 확실한 증거도 없던 상황이었기에 경찰에 신고를 할 수도 없었다.

그러던 보름 뒤 실종되었던 양수용의 시신이 근처 강가 동굴에서 발견되었고, 그제야 경찰은 장융밍을 용의자로 지목해 수사하기 시작했다. 심문 중 그는 자신이 양수용의 목을 졸라 살해했고, 시신의 손과 발을 잘라 강에 유기했지만 시신이 떠내려가 동굴로 들어간 것 같다고 자백한다. 경찰은 그의 집을 수색했고 집에서 양수용의 옷과 소지품이 발견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사형시켜야 한다고 시위까지 벌였으나 결국 법원은 그에게 사형 집행유예라는 판결을 내리게 되고 장융밍은 수감되어 있는 동안 모범수로 지냈다.

1997년 6월 경에 감형을 받아 석방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부모님이 모두 죽고, 형과 누나들 마저 결혼을 해서 타지로 갔기 때문에 혼자서 살게 된다. 그는 왕래도 거의 하지 않은 채 혼자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하며 살았고, 마을 이장이 50위안을 주면서 그에게 나무 베는 일을 시키기도 했다. 마을사람들은 그가 이미 살인 전과자라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에 그를 가까이하지 않았고 그렇게 그는 마을에서 외톨이로 지내게 된다. 가끔씩은 다른 이웃들이 그에게 함께 저녁을 먹자며 초대했지만 그는 항상 집에 먹을 것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하곤 했다. 또 한 번은 한밤중에 위궤양에 걸려 피를 흘리고 있는 그를 마을 간부들이 병원에 데려가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하기도 했다. [3]

2008년에는 그가 소유하고 있던 논밭이 정부의 토지개발계획으로 인해 강제수용이 되면서 3만 위안 정도의 보상금을 지급받게 된다. [4] 그는 농사를 그만두고 그 돈으로 집 근처에 냉동창고를 지어 임대업을 시작했다. 그 이후로는 시간이 날 때마다 집으로부터 30분 거리에 있는 문화공원에 나가 사람들과 함께 바둑을 두고 오후 5시쯤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함께 바둑을 둔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그는 바둑 실력도 좋은 편이었고 사람들과 다툰 적도 없는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또 그는 대형견 3마리를 기르고 있었는데, 이웃들은 매일 밤마다 그의 집에서 시끄러운 TV 소리와 개 짖는 소리를 들었다고 회상했다. 이웃들은 이상하게 생각하기도 하였지만 그냥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갔다. 또한 그는 가끔씩 읍내에 수레를 끌고 나타나 자신이 가져온 타조고기를 팔았으며 때로는 정신이 나갔는지 산에 있는 공동묘지를 도굴하여 훔쳐온 물건들을 팔기도 했다.

4. 실종 사건

  • 2007년 5월 1일, 12세였던 이한웅 (Li Hanxiong[리한숑])이라는 소년이 아버지와 함께 밭으로 일하러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밭에 외투를 두고 온 것을 알고 가지러 간 뒤 실종이 되었다. 이한융의 부모는 아들이 저녁이 돼도 돌아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경찰에 실종신고를 하였다. 하지만 경찰은 실종사건은 실종된 지 24시간이 지나야 접수가 가능하다며 부모를 돌려보냈다. 계속해서 아들의 행방을 찾던 부모는 한 할머니가 이한융이 사라진 시각에 이한융처럼 보이는 아이가 옥수수밭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러한 단서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고, 경찰마저 단순 가출로 여기고 제대로 수사하지 않아 끝내 아들을 찾지 못하게 된다.
  • 2011년 1월 27일, 15세였던 사해준 (Xie Haijun)이라는 남학생이 친구와 함께 집에서 약 5km 정도 떨어진 학교로 성적표를 받으러 가게 된다. 각자 성적표를 받고 교문 앞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시해준이 오지 않자 친구는 그를 찾으러 교실에도 가보고, 전화를 걸기도 하였지만 끝내 시해준을 만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런데 다음날이 되어도 시해준은 귀가하지 않았고, 가족들은 마을사람들과 함께 마을을 샅샅이 뒤졌지만 그를 찾지 못했다. 마침내 가족들은 1월 29일 경찰에 실종신고를 하게 된다. 그의 가족들은 아들을 찾기 위해 인신매매가 됐을 가능성까지 고려하여 주변 공장을 탐문을 하는 등 1년 가까이 전재산을 털어 아들을 찾아다녔으나 끝내 찾지 못하게 된다. 한 번은 살인전과가 있던 장융밍을 의심하여 경찰에 그에 대한 수사를 요구한 적도 있었지만 경찰은 대충 기본적인 수사만 진행 한 뒤 마무리 지었다.
  • 2011년 9월 30일, 17세의 첸타오 (Chen Tao)라는 학생이 친구와 함께 놀러 나갔다가 실종되게 된다. 9시에 어머니는 아들이 집으로 오는 것을 보았고, 9시 30분에 아들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지만 그 전화를 받지 못하였고, 다시 11시에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아들의 휴대폰은 이미 꺼져 있었고, 그렇게 실종되게 된다.
  • 2012년 2월 19일 오전 9시, 16세의 차이윈웨이 (Cai Yunwei)라는 학생은 공중화장실에 간 뒤 실종되었다. 친구들은 화장실에 갔다 온다던 그를 20분 가까이 기다렸으나 돌아오지 않자 그를 찾으러 화장실에 갔지만 발견하지 못하고, 전화까지 받지 않았다.
  • 2012년 4월 25일, 상술된 일련의 실종사건의 범인을 검거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19세의 한 야오 (Han Yao)는 윈난성 경영대학원 졸업을 앞둔 대학생이었으며 쿤밍시의 한 엔지니어링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사건 당일 그는 남문촌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오전 7시에 현장에 도착하여 8시 30분 정도에 현장소장의 지시에 따라 약 20분 거리에 있는 사무실에 서류를 전달하라는 지시를 받고 가게 되는데, 그 길로 사라져 버리고 만다. 한 야오의 가족들은 아들이 사라지자 즉시 경찰에 신고하고, 친척과 친구들까지 동원하여 그를 찾기 시작한다. 한 달 후, 가족들은 아들의 신분증이 근처 PC방에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사실 신분증을 사용한 사람은 한 야오의 친구였고, 그가 실종되기 전 친구에게 맡겼다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중요한 단서가 되지는 못했다. 가족들은 자신들도 찾을 수 있는 정보를 왜 경찰들은 찾지 못했고,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냐고 항의한다. 이제 실종자의 가족들은 더 이상 경찰을 믿지 못하였고 경찰의 도움 없이 직접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가족들이 조사 중 알게 된 내용은 충격적이었는데 2005년부터 쿤밍시 인근에서 80명이 실종되었고, 8년 동안 남문촌 일대에서만 17명이 실종됐는데, 실종자 대부분은 12~22세(80세 남성과 37세 남성 포함) 남성들이었다. [5]
파일:장융밍 피해자.jpg
당시 남문촌 일대에서 사라진 실종자 목록

5. 수사

실종자 가족들은 경찰에 8년 동안 17명이 실종되었는데 왜 수사하지 않았냐며 항의했고 이는 급기야 지역 방송국과 언론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며 전국으로 알려지게 된다.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윈난성 고위 간부들은 그동안 사건처리에 소극적이었던 공안과 담당 경찰들을 모두 파면시키고, 새로운 실종사건 조사팀을 만들어 수사를 진행하게 된다. 조사팀은 실종사건들이 주로 살인전과가 있던 장융밍의 집 700m 반경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수색영장을 받고 그의 집을 수색하게 된다.

집에 들어가자 경찰은 커다란 플라스틱으로 된 큰 통 5개를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통을 여는 순간 경찰은 경악하게 된다. 통 안에는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내장, 근육, 절단된 팔과 다리가 들어있었고, 부엌에서는 6개의 큰 마대자루를 발견하였는데 그 안에는 실종자들의 것으로 추정되는 옷과 휴대전화, 신분증 같은 소지품이 들어있었다. 안방에서는 문신을 한 사람의 피부가 벽에 테이프로 붙어져 있었고, [6] 집안에선 소금으로 절여지고 있던 사람의 대퇴부가 여럿 발견되었다. 가장 엽기적이었던 것은 집에서 직접 담은 담금주 한 병이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는 사람의 안구 40개가 들어있었다. 경찰은 집안을 수색하는데에서 그치지 않고 그가 소유하고 있던 냉동창고, 채소밭, 우물까지 샅샅이 수색하였다. 경찰은 채소밭과 우물에서 수많은 뼈들을 발견하였지만, 이상하게도 두개골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파일:장융밍 수색.jpg
자택을 수색 중인 경찰
그는 곧바로 체포되었고 경찰 신문과정에서 범행수법을 물어보니 혼자 지나가던 사람들을 뒤에서 가죽끈이나 손으로 목을 졸라 살해한 뒤 수레에 실어 집으로 가져와 먼저 시신의 무게를 잰 뒤, 토막 내어 먹을 수 있는 부위와 없는 부위로 나누었고 나머지 시신은 개에게 먹이거나 밭에 묻고 불에 태웠다고 진술하였다. 몇 명을 죽였냐고 물으니 정확한 수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얼마 뒤 법의학 수사팀이 DNA 감식을 통해 그의 집에서 발견된 유골과 실종자 17명 중 11명의 DNA와 일치하다고 발표하였다.

6. 재판

장융밍은 고의살인죄로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재판에서 유족들에게 사과는커녕 미안해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인간이 소와 돼지, 닭을 먹듯 사람도 먹을 수 있는 것 아니냐" 라며 반성하는 태도조차 전혀 보이지 않았다.

2013년 1월 10일 그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1] 3남 1녀[2] 한 번은 술을 마시다 술집 주인과 시비가 붙어 싸우다 살해한 적이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인지 확인된 바는 없다. [7][3] 수술 동의서엔 가족의 서명이 필요하기 마련인데 장융밍은 혼자 살았기 때문에 대신 서명을 해준 것으로 보인다.[4] 현재 가치 한화로 약 600만 원 정도의 금액이다.[5] 이 중 2명은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었다.[6] 나중에 이 피부의 주인은 집으로 돌아오다가 실종되었던 17세의 첸타오의 것으로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