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홍범(洪範) |
출생 | 1898년 3월 11일[1] |
경기도 풍덕군 군북면 풍천리 (현 황해북도 개풍군 대련리) | |
사망 | 1972년[2] 1월 30일[3] |
서울특별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838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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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장태수는 그의 9촌 아저씨, 즉 삼종숙(三從叔)이다.[4]
2. 생애
장경범은 1898년 3월 11일 경기도 풍덕군 군북면 풍천리(현 황해북도 개풍군 대련리)에서 아버지 장현수(張賢秀)[5]와 어머니 전주 이씨 이용찬(李容瓚)의 딸 사이의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농업에 종사하였다.그는 1919년 3월 29일 밤에 개성군 상도면 상도리와 대성면 풍덕리 일대에서 이기춘(李起春), 신선명(申善明) 등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를 주동했고, 일제 관헌들의 통신망을 차단하기 위해 개성과 광덕리 사이의 전신주 3개를 파손했다. 그러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된 그는 1919년 5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전신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에 불복, 공소하여 그 해 7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심 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2년으로 감형받았는데#, 여기에도 불복하고 상고하였으나 10월 16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당일 서대문형무소에 입소하여 옥고를 치렀다.
1919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
1921년 10월 15일 만기 출옥한# 그는 1924년 5월 동아일보사 정리부에 사원으로 입사하기도 했으며#, 이후에는 한의사로 활동하다가 1972년 1월 30일 서울특별시에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6년 장경범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최초 경기도 김포군 월곶면 포내리에 안장되었다가 2008년 5월 15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1] 1919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와 1919년 당시 판결문, 덕수장씨족보(갑인보) 소감공파 852쪽에는 3월 17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2]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1973년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3] 음력 1971년 12월 15일.[4] 족보상으로는 15촌 지간이지만 장경범의 아버지 장현수의 증조부 장세룡(張世龍)은 본래 장태수의 증조부 장세화(張世華)의 맏형이나 장세화가 재종숙인 장상협(張相協)에 입양되어 8촌 지간으로 바뀐 것이며, 결과적으로 15촌 지간으로 멀어지게 된 것이다.[5] 호적명은 장순수(張順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