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by(自,ruby=자)][ruby(歸,ruby=귀)][ruby(依,ruby=의)] [ruby(法,ruby=법)][ruby(歸,ruby=귀)][ruby(依,ruby=의)] [ruby(自,ruby=자)][ruby(燈,ruby=등)][ruby(明,ruby=명)] [ruby(法,ruby=법)][ruby(燈,ruby=등)][ruby(明,ruby=명)]
"스스로에게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라. 스스로를 진리의 등불로 삼아, 그 진리에 의지해 살아가라.”
대반열반경에 실린 석가여래의 마지막 설법
"스스로에게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라. 스스로를 진리의 등불로 삼아, 그 진리에 의지해 살아가라.”
대반열반경에 실린 석가여래의 마지막 설법
1. 개요
해당 발언은 디가 니까야 16경 <대반열반경>과 26경 <전륜성왕사자후경>에서 전하는 석가모니 부처의 유명한 가르침이자 석가모니 부처의 유언으로 알려져있다. 보통 한역(漢譯)으로 자등명 법등명 자귀의 법귀의(自燈明法燈明 自歸依 法歸依)으로 옮기거나 현대 한국어로는 "스스로에게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라. 스스로를 진리의 등불로 삼아, 그 진리에 의지해 살아가라.”라고 번역한다.a. | atta+dīpā | vihar+atha | |
재귀사+'디빠' | 살다+순접 | ||
"스스로를 '디빠'로 삼아 살고" | |||
b. | atta+saraṇā | an | añña+saraṇā |
재귀사+피난처 | 부정어 | 다른 것+피난처 | |
"스스로를 피난처로, 다른 것을 피난처로가 아니라" | |||
c. | dhamma+dīpā | ||
법+'디빠' | |||
"법을 '디빠'로" | |||
d. | dhamma+saraṇā | an | añña+saraṇā |
법+피난처 | 부정어 | 다른 것+피난처 | |
"법을 피난처로, 다른 것을 피난처로가 아니라" |
자현 비구는 <붓다 순례>에서 해당 발언이 나온 상황을 제시한다. 바이샬리[1]를 좋아해서 생의 마지막 안거도 바이샬리에서 했던 석가모니 부처는 그 무렵 바이샬리를 휩쓴 기근에 그 자신의 노쇠 탓에 극심한 고통을 겪다가 명상으로 감관을 제어해 고통을 이기고 기적적으로 회복하였는데[2] 제자 아난다가 "저는 부처님께서 회복하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석가모니가 근거를 묻자 아난다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아직 교단(상가)와 관련된 후계 문제를 언급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때 석가모니는 "스승에게는 사사롭게 쥔 주먹(師拳)은 없다."[3]고 대답하면서 "나는 교단(상가)의 지배자도 명령자도 아니며, 내가 열반에 든 뒤에도 따로 교단(상가)의 지도자는 세울 필요가 없다." 단언하고, 그때 그러면 누가 교단을 이끌어야 하느냐는 아난다의 질문에 석가모니가 바로 '자등명 법등명' 발언이 나왔다는 것이다. 즉 자등명 법등명이라는 구절은 자신의 사후 교단(상가)를 가톨릭이나 이슬람처럼 어떤 통합된 지도자가 선출되어 이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남긴 법과 가르침, 계율 대로 이끌면 된다는 취지로 말한 것.[4]
2. 번역
형식적으로 a-c와 b-d가 대구를 이루고 있다. 즉, atta dīpā | dhamma dīpā가 대구를 이루고 atta saraṇā | dhamma+saraṇā가 대구를 이루는 것. 문장 전체의 핵어(head)가 vihar '살다'로서 전체를 관할하는 것으로 무리없이 해석할 수 있으나 분석자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무리하게 번역하지 않고 '디빠'로 옮기는 팔리어 단어 dīpā는, 전통적으로 등불로 번역되었으나 섬으로 번역할 수 있다. 어떤 번역을 취하든,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와 법을 지침으로 삼으라"는 의미는 동일하다.전통적으로 '등불'로 번역된 dīpā는 팔리어에선 보통 '섬'을 뜻하기 때문에, 전통과 차별하더라도 원어를 그대로 옮기고자 하는 움직임에서는 이를 '섬'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다.
dīpā를 '섬'으로 번역하는 것을 선호하는 측에서는 그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dīpā의 번역어인 '섬'은 강물 사이에 있는 작은 섬을 의미한다. 불교에서는 감정을 강물에 비유하여 감정에 휘둘리고 괴로워하는 것을 '거센 흐름'이라 하였다. 또한 깨달음을 '감정이라는 강물을 건너는 것'에 비유하여, 감정이 격해지면 이 언덕에서 강을 건너 저 언덕으로 갈 때 감정이라는 강물에 휩쓸리지 말고 섬에 의지하여 건너라는 것이다. 결국 깨달음이란 감정이 격해졌을 때 스스로에 의지해서 평정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진리, 법(dhamma)은 '모든 법에 내 것이 없다'(sabbe dhammā anattā)는 것을 아는 것. 즉, 제법무아를 아는 것이다.
원전인 팔리어 경장에는 등불이 아니라 섬으로 되어 있다. 흔히 자등명 법등명 자귀의 법귀의(自燈明法燈明 自歸依 法歸依)로 알려진 이 구절은 "누구든 지금이나 내가 죽고 난 뒤에나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섬으로 삼고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말라"는 의미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 다음 구절이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는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가?
어떻게 비구는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서, 열렬하고, 정확하게 알고 기억하면서, 몸에서 몸을 좇으면서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서, 열렬하고, 정확하게 알고 기억하면서, 느낌에서 느낌을 좇으면서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서, 열렬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기억하면서, 마음에서 마음을 좇으면서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서, 열렬하고, 정확하게 알고 기억하면서, 현상에서 현상을 좇으면서 관찰하며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비구는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다.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다."
어떻게 비구는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서, 열렬하고, 정확하게 알고 기억하면서, 몸에서 몸을 좇으면서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서, 열렬하고, 정확하게 알고 기억하면서, 느낌에서 느낌을 좇으면서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서, 열렬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기억하면서, 마음에서 마음을 좇으면서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서, 열렬하고, 정확하게 알고 기억하면서, 현상에서 현상을 좇으면서 관찰하며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비구는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다.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않는다."
3. 기타
"Therefore, O Ananda, be ye lamps unto yourselves.
Be ye a refuge to yourselves. Betake yourselves to no external refuge.
Hold fast to the Truth as a lamp. Hold fast as a refuge to the Truth.
Look not for refuge to any one besides yourselves"
Be ye a refuge to yourselves. Betake yourselves to no external refuge.
Hold fast to the Truth as a lamp. Hold fast as a refuge to the Truth.
Look not for refuge to any one besides yourselves"
- 영어로는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아난다(제자)여, 이제 나는 늙어서 노후하고 긴 세월을 보냈고 노쇠하여 내 나이가 여든이 되었다.
마치 낡은 수레가 가죽 끈에 묶여서 겨우 움직이는 것처럼 나의 몸도 가죽 끈에 묶여서 겨우 살아간다고 여겨진다.
아난다여, 그대는 한 쌍의 살라 나무 사이에 북쪽으로 머리를 둔 침상을 만들어라. 피곤하구나, 누워야겠다.
(아! 나는 아직 배울 것이 많은데 나를 그토록 연민해 주시는 스승께서는 이제 돌아가시겠구나.)
그만하여라, 아난다여. 슬퍼하지 말라, 탄식하지 말라, 아난다여.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모든 것과는 헤어지기 마련이고 없어지기 마련이고 달라지기 마련이고 그처럼 말하지 않았던가.
아난다여, 태어났고 존재했고 형성된 것은 모두 부서지기 마련인 법이거늘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것을 두고 '절대로 부서지지 말라'고 한다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난다여, 그런데 아마 그대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스승의 가르침은 이제 끝나 버렸다. 이제 스승은 계시지 않는다.
아난다여, 그러나 그렇게 봐서는 안 된다. 내가 가고 난 후에는 내가 그대들에게 가르치고 천명한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아난다여, 그대들은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의지하여 머물고 남을 의지하여 머물지 말라. 진리를 섬으로 삼고 진리에 의지하여 머물고 다른 것에 의지하여 머물지 말라.
내가 설명한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괴로움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원인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방법이다.
참으로 이제 그대들에게 당부하노니 형성된 것들은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 게으르지 말고 해야 할 바를 모두 성취하라.
이것이 여래의 마지막 유훈이다.
마치 낡은 수레가 가죽 끈에 묶여서 겨우 움직이는 것처럼 나의 몸도 가죽 끈에 묶여서 겨우 살아간다고 여겨진다.
아난다여, 그대는 한 쌍의 살라 나무 사이에 북쪽으로 머리를 둔 침상을 만들어라. 피곤하구나, 누워야겠다.
(아! 나는 아직 배울 것이 많은데 나를 그토록 연민해 주시는 스승께서는 이제 돌아가시겠구나.)
그만하여라, 아난다여. 슬퍼하지 말라, 탄식하지 말라, 아난다여.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모든 것과는 헤어지기 마련이고 없어지기 마련이고 달라지기 마련이고 그처럼 말하지 않았던가.
아난다여, 태어났고 존재했고 형성된 것은 모두 부서지기 마련인 법이거늘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것을 두고 '절대로 부서지지 말라'고 한다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난다여, 그런데 아마 그대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스승의 가르침은 이제 끝나 버렸다. 이제 스승은 계시지 않는다.
아난다여, 그러나 그렇게 봐서는 안 된다. 내가 가고 난 후에는 내가 그대들에게 가르치고 천명한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아난다여, 그대들은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의지하여 머물고 남을 의지하여 머물지 말라. 진리를 섬으로 삼고 진리에 의지하여 머물고 다른 것에 의지하여 머물지 말라.
내가 설명한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괴로움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원인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방법이다.
참으로 이제 그대들에게 당부하노니 형성된 것들은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 게으르지 말고 해야 할 바를 모두 성취하라.
이것이 여래의 마지막 유훈이다.
- 자등명 법등명은 대반열반경의 일부 구절로, 석가모니의 마지막 유언 전체는 다음과 같다.
-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전당대회 돈봉투 의혹으로 프랑스에서 귀국했을 당시, 한 여성 지지자가 '자등명 법등명'이라고 쓰인 종이를 건네며 응원한 바 있다.
[1] 인도 비하르 주의 고대 도시.[2] 그래봐야 석가모니 부처가 당시 여든을 넘긴 나이였음을 생각한다면 아주 잠깐 동안의 회복이었다.[3] 석가모니 자신이 깨달은 것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전했으며 숨기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다. 이는 어느 특정한 제자에게만 따로 비밀스럽게 교리나 가르침을 전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4] 이를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사망한 뒤에 있었던 일화와 견주어 생각하면 의미심장하다. 무슬림 가운데는 무함마드가 죽은 뒤에 예수처럼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었고, 무함마드가 살아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무함마드가 죽었으니 이제 이슬람도 끝이다"라고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이때 훗날 이슬람 공동체의 초대 칼리파가 되는 아부 바크르가 나서서 "너희가 이제껏 믿고 섬긴 것은 무함마드였느냐, 주님(알라)이었느냐? 너희가 무함마드를 믿었다면 그는 이미 죽었고 다시 살아날 수 없다. 하지만 너희가 주님을 믿었다면 주님은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살아계시다. 무함마드가 아무리 성사(라술룰라)였다고 해도 그 역시 주님께서 선택하신 한 사람의 인간에 불과했을 뿐이다. 무함마드가 죽었다고 해서 영원하신 주님(알라)께 등을 돌릴 수 있겠느냐?"라고 진정시켰다는 일화에서 석가모니 부처와 다른 점은 교조 사후 이슬람이 교조가 강조한 '유일신에 대한 복종'으로 교단 통합의 수단을 삼았다면 불교는 교조가 깨닫고 설파한 가르침에 근거한 교단 구성원 각자의 깨달음과 합의에 따라 정한 계율을 따르는 것을 교단 통합의 수단으로 내세웠다는 것. 이런 점에서 불교가 오히려 전근대보다 훨씬 공화제에 가까운 것이 아니었느냐는 시각도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