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1 19:59:45

임형수

林亨秀
1514년(중종 9년) ~ 1547년(명종 2년)

1. 개요2. 일생3. 일화4. 그 외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사수(士遂), 호는 금호(錦湖).

2. 일생

임형수는 1514년 전라도 나주목 송현(현 전라남도 나주시 송월동 송현마을)#에서 북병사를 지낸 아버지 임준(林畯)과 어머니 안동 권씨 현감 권석(權錫)의 딸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1531년(중종 26) 18세 때, 식년시 생원시에 3등 34위로 급제하였으며#, 1535년(중종 30)에는 별시 문과에 병과 4위로 급제하여#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춘추관기사관(記事官)·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를 지내고, 1541년(중종 36)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하는 특전을 누리기도 했다. 그 후에 부제학[1]까지 올랐지만 명종 때 문정왕후의 동생이자 실권자였던 윤원형에게 미움을 받아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을사사화로 파직되었다. 그뒤 양재역 벽서사건이 터지면서 대윤파 윤임의 일파로 몰려 절도안치 된 뒤에 사사되었다.

선조때 신원되고# 정조 때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이런 이력만 보면 평범한 문신같아 보이지만 의외로 대범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장난스럽고 유머러스한 일화를 많이 남긴 독특한 인물이기도 하다.

3. 일화

어느날, 임형수의 친구가 신선을 만나보고 싶다고 탄식했다. 그 후 그 친구는 길을 가다가 산속에서 신선을 만났고 신선이 주는 사슴고기와 술까지 마시고 돌아왔다며 임형수에게 자랑했다. 그러자 임형수 왈 "그 신선은 나였네."
깜짝 놀란 친구가 그럼 사슴고기와 술은 뭐였냐고 묻자 다시 임형수 왈
"그건 육포와 내 오줌일세."
윤원형은 제주목사로 발령 난 임형수의 마음을 떠 보려고 송별연을 마련했다. 병 주고 약주고 였다. 두주불사의 주량인 임형수는 윤원형을 말끔히 노려보다가 한 마디 하였다. "공이 나를 죽이지 않는다면 내 주량대로 마시리다."
겁에 질린 윤원형은 그 자리를 떴고 이후 윤원형은 임형수를 제거하려고 마음먹는다.
임형수가 제주 목사로 가던 길에 심한 풍랑을 만났다. 배에 탄 사람중 승려는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했고 그 밖에 사람들도 각자 신령에게 빌자 뻘줌했던 임형수는 갑자기

"이중탕! 이중탕!" 이라고 외쳤다.
배가 풍랑을 헤치고 겨우 제주도에 도착한 후 배에 탄 사람중 한 사람이 임형수에게 왜 이중탕을 외쳤느냐고 묻자 그가 말하길
"배가 아플 때는 이중탕이 특효라서 말이지."[2]
임형수가 윤원형에게 미움을 사 마침내 사사 명령을 받고 금부도사가 그의 고향집에 도착해 사약이 든 약사발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임형수는 "조정에서 스스로 죽으라고 하였으니 하필 거북한 약을 먹을 것도 없지 않는가. 차라리 목 졸라 죽도록 허락해달라"라고 하여 금부도사가 허락했다.[3][4] 그러자 임형수는 방안으로 들어가서 벽에 구멍을 뚫고 나졸로 하여금 밖에서 잡아당기라고 했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록 기척이 없어서 나졸이 들어가보니 베개 하나가 벽에 붙어있고 임형수는 한쪽 구석에 편히 누워있다가 무릎을 치고 웃었다.[5] 물론 장난이었고 다음번은 장난치지 않고 죽음을 맞았다.[6]
사약을 먹기 전에 그는 전 어린 아들인 임구(林枸)를 보면서 "내가 나쁜 짓을 한 일이 없는데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다. 너희들은 과거에 응시하지 말라."하고는 "무과일 경우는 응시할 만하면 응시하고 문과는 응시하지 말라."라는 말을 재차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아들은 아버지가 죄인으로 몰려 생을 마감한 것도 있어 평생 글을 익히지 않다가 아버지의 누명이 풀리면서 무과에 급제해 충청도 정산현감(定山縣監)으로 임명되었는데, 글을 배우지 않았으니 관직 생활이 평탄할리가 없었다.[7] 어느 때는 충청감영에서 詩賦(시와 글)을 권장하라고 문서를 보냈는데, 주워들은 글솜씨로 賦(읆을 부)자를 賊(도적 적)자로 잘못 보고 도적이 나타났다면서 집결나팔을 불어 병졸들을 집결시키는 난리를 피우다가 수상함을 느낀 형방이 편지를 보고 이것은 도적 적 자가 아니라 읆을 부 자라고 알려주어 해산나팔을 불어 병졸들을 해산시키는 소동이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무과에 급제한 실력답게 양손으로 말 다리를 잡아 들어올려 편자를 박는 엄청난 용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때 이웃 현감이 이 때 방문해 여기는 현감이 말편자를 박는 일을 하냐고 묻자 그는 부끄러워서 말을 들고 도망쳤다는 이야기는 맹꽁이 서당에서도 소개되었다.
1547년 9월 21일 자 조선왕조실록에는 임형수의 사약 받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
위에 언급한 아들에게 남기는 유언을 마치고 조금도 동요하는 표정이 없었으며, 사약을 들고 마시려고 하다가 의금부 서리를 보고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도 한잔 마시겠는가?하였다. 또한 어떤 이가 집안에 들어가서 죽는 것이 좋겠다고 하니, 임형수는 나는 마땅히 천지(天地)의 신기(神祗)가 둘러서서 환히 보는 데서 죽을 것이다. 어찌 음침한 곳에 가서 죽겠는가 하고, 드디어 약을 마시고 생을 마감했다.

4. 그 외

  • 임형수는 젊은 시절의 퇴계 이황과 친하게 지냈다. 샌님 스타일인 이황에 비해 선비답지 않게 대범하고 호쾌한 성격이었다. 어느날 임형수는 이황에게 남자의 멋지고 장한 일을 알려주겠다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산에 눈이 하얗게 쌓일 때, 검은 돈피 갖옷을 입고 흰 깃이 달린 기다란 화살을 허리에 차고, 팔뚝에는 백 근짜리 센 활을 걸고, 철총마를 타고 채찍을 휘두르며 골짜기로 들어서며, 긴 바람이 일어나 초목이 진동하는데. 느닷없이 큰 멧돼지가 놀라서 길을 헤매고 있을 때, 활을 힘껏 잡아 당겨 쏘아 죽이고, 말에서 내려 칼을 빼서 이놈을 잡고, 고목을 베어 불을 놓고 기다란 꼬챙이에다 그 고기를 꿰어서 구우면, 기름과 피가 지글 지글 끓으면서 뚝뚝 떨어지는데, 고기를 걸상에 걸터앉아 안주로 저며 먹으며, 곧은 대접에 시원한 술을 가득 부어 한 잔 마시고, 술과 고기, 경치에 얼큰하게 취할 때에 하늘을 올려다보면 골짜기의 구름이 눈이 되어 취한 얼굴 위를 비단처럼 펄펄 스친다네."

    후에 이황은 임형수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 하늘을 보며 탄식하며 "기남아라, 참으로 기남아라" 라고 하며 호탕한 그를 그리워 했다 전한다.
  • 야담집 '기문총화'에는 주인의 원수를 갚은 말 이야기가 있다. 임형수를 모함하여 세상을 떠나게 한 정언각이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을 때 바로 임형수가 항상 타고 다니던 말을 타다가 말에서 떨어질 때 한 쪽 다리가 등자에 걸리자 말이 마구 날뛰면서 걷어차서 크게 다친 뒤 얼마 못 가 숨을 거둔 소식을[8] 모든 사람들이 그 말을 의마(義馬)라 부르며 통쾌해하고 하늘이 아는 것이라고 여겼다.[9]
  • 문무를 겸비했고, 특히 시문에 능해 조선 중기 문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가령 어우야담의 작가 유몽인은 자신의 저서에 임형수가 남긴 시를 몇 장에 걸쳐 할애하고 있으며, 모두까기 인형이였던 교산 허균도 극찬한 적이 있다.
수항정(受降亭 항복을 받는 정자라는 의미)

취하여 호상(胡床)에 기대어 물소뿔 술잔을 드는데

미인이 옆에 앉아 정답게 아쟁을 타네.

모랫벌에서 싸움 마치고 느지막히 돌아올 때

말 달려 얼어붙은 강에 이르니 칼과 창이 우는 구나.

허균은 이 시의 말미에 '호탕함이 지극하고 의협의 기질이 나부끼는 듯하다'고 평하고 있다.
  • 앞서 언급했듯이, 슬하에 임구(林枸)[10]라는 아들이 있었고 무과에 급제하여 통훈대부 행정산현감을 지냈으나, 글을 모른다는 사간원의 탄핵으로 파직당했다.

    한편, 국조인물고 임형수 편에는 임형수가 부인 하동 정씨 정홍필(鄭弘弼)의 딸과의 사이에 1남 2녀를 두었고 외아들 임구는 현감을 지냈으나 후사가 없다고 기재되어 있다.# 하지만 임용길(林龍吉)[11]이라는 아들이 있었으며, 이 인물은 주부(主簿)를 지내다가 1605년(선조 38) 증광시 무과에 병과 4위로 급제하여# 관직이 훈융진첨절제사(訓戎鎭僉節制使)에 올랐다. 그러나, 1617년(광해군 9) 재직 중에 군수물자를 특별히 마련한 공로로 당상직[12]에 제수되었는데, 점고(點考:수효 조사) 때 거짓임이 들통나 파직되었다.# 이후 1618년 병이 위중하다고 하여 보석으로 방면되었다.#


[1] 말이 부제학이라 해서 별 느낌이 안오지만 지금으로 치면 1급 공무원정도 되는 고위직이다. 거기다 부제학은 전국에 3명으로 집현전에 2명 홍문관에 1명 뽑았는데 그 홍문관의 1명이 임형수다. 그야말로 10년만에 9급에서 1급 공무원까지 미친듯이 올라간 괴물이다[2] 이 얘기는 흔히 임형수가 의원으로 바뀌기도 하며, 그 외 사항은 전과 동일.[3] 유분록에는 16사발을 먹였는데 죽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목을 메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4] 18사발이라는 이야기도 있다.[5]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 - 양반 편에도 이 장면이 유머러스하게 묘사돼 있다.[6] 물론 야사다. 실록에는 없는 기록이며 실록에선 사약을 받았고, 집안에 들어가라는 구경꾼의 말에도 "음침한 곳에서 죽느니 천지 귀신이 다 보는 앞에서 죽겠다"하고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너무 믿지 않는 게 좋다.[7] 실제로 선조실록 12권, 선조 11년(1578) 7월 2일 1번째 기사를 보면, 임구(林枸)가 정산현감 재직 중에 글을 모른다며 체차(遞差: 관원(官員)의 임기가 차거나, 부적당할 때 다른 사람으로 갈아서 임명함)할 것을 청하는 사간원의 탄핵이 있었고, 결국 파직되었다.#[8] 정말로 임형수가 탄 말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에서 떨어지다 한 쪽 다리가 등자에 걸려 걷어차여 사망한 것은 실록에도 나오는 사실이다.[9] 사실 정언각은 이보다 앞서 벌어진 양재역 벽서 사건과 이홍윤의 옥사의 각각 발단과 확대를 불러와 사람들에게서 '독침', '염라국의 사자' 라고 불릴 정도로 미움받기는 했다.[10] 생몰년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임형수가 사사될 당시 열 살이 안됐다고 했으므로 1537년 이후에 태어났을 것으로 보이며, 아들 임용길의 무과방목인 『을사증광별시문무과방목(乙巳增廣別試文武科榜目)』을 보면, 1605년 무과급제할 당시에 자시하(慈侍下)로서 모친만 생존해있다고 기재되어 있었으므로 1605년 이전에 사망했음을 알 수 있다.[11] 1576년(선조 9)생으로 자는 자운(子雲). 당시 거주지는 전라도 나주목.[12] 당상(堂上)이란 문신의 경우 정3품 통정대부, 무신의 경우엔 정3품 절충장군 이상의 품계를 가진 자를 말한다. 첨절제사는 종3품 무관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