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47a0> 출생 | 1915년 11월 30일 |
경기도 파주시 | |
사망 | 몰년 미상 |
본관 | 공주 이씨[1] |
직업 | 독립운동가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clearfix]
1. 개요
일제강점기 인도네시아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한 독립운동가. 201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2. 생애
이억관은 1920년 4월 25일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났다.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억관은 일본군으로 징집되었으며 1942년 5월 연합군 포로감시원으로 인도네시아에 파견되었다. 부산에서 2달동안 다른 한인들과 함께 훈련을 받은 후 포로감시원이 될 1400명의 청년들과 함께 1942년 8월 14일 인도네시아 자바의 딴중 쁘리옥 항에 도착하였다.[출처]연합군 포로감시원으로 근무하고 있던 당시 동료였던 김현재는 일제가 곧 패망할 것이라는 것을 예견하고 다른 한인 감시원 동료들과 함께 연합군을 돕는 항일운동 조직을 만들기 위한 준비에 돌입하게 되었다. 당시 이억관은 김현재,임헌근 등의 다른 동료 독립운동가들과 협조하였으며 자카르타에서 활동하고 있던 문학선, 세마랑지구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상문, 암바라와 지구에서 활동하던 손양섭, 조규홍 등과 함께 무장투쟁을 위해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 세마랑주 스모워노의 교육대에서 재훈련을 받고 있던 한인 연합군 포로감시 군속들은 1944년 12월 29일 교육대 취사장의 뒤에서 고려독립청년당을 조직하였다. 이억관은 고려독립청년단의 총령으로 부임하였다. 당시 고려독립청년당은 군사부장에 김현재, 조직부장에 임헌근, 세마랑지구 책임자에 이상문, 암바라와 지부장에 손양섭, 암바라와 부지부장에 조규홍, 자카르타 지부장에 문학선, 자카르타 부지부장에 백문기, 반둥 지부장에 박창원, 반둥 부지부장에 오은석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총령인 이억관은 고려독립청년당의 강령, 선언문, 당가를 직접 만들었다.[출처]
고려독립청년당을 조직한 다음인 1945년 1월 4일 중부 자바 암바라와에서 손양섭, 민영학 노병한 등 세명은 일본군,감시원, 어용상인들을 암살하는 의거를 벌이며 저항을 시작하였다. 암바라와에서 일어난 의거로 인해 후 일본군은 그러한 의거를 막기 위해서 한인들을 대상으로 대규모의 전속을 실시하였다. 이때 이억관은 다른 고려독립청년당원들은 딴중 쁘리옥 항구에 정박 중이었던 수송선을 점거하기로 계획하였고 군사부장 김현재를 총지휘자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고려독립청년당의 계획은 일본군에 의해 발각되었고 결국 고려독립청년당은 일제에 의해서 소탕되고 말았다.[출처]
1945년 1월 28일 이억관은 일본 헌병대에 의해 체포되었고, 같은 날 조직 내 조규홍과 이상문 등의 다른 당원동료들도 일본군사령부로 끌려왔다. 이억관은 5월 19일 군법회의에 송치되었으며 7월 21일 일본군 제16군 군사법정에서 치안유지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그 후 일제가 패망하여 항복을 선언한 뒤인 9월 4일 다른 동료들과 함께 석방되었다.[출처]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2011년에 건국훈자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