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6-21 14:57:35

이렐리아/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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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문 배경2. 얼룩진 이름3. 구 설정
3.1. 장문 배경3.2. 리그의 심판

1. 장문 배경

잔 이렐리아는 어린아이었을 때부터 인간의 동작에서 드러나는 우아함과 아름다움에 매혹되었다. 할머니의 가르침으로 고대에서부터 나보리에 전해져 오는 비단 춤을 익혔지만, 이 춤이 아이오니아의 혼과 신비로운 연계를 맺고 있다는 설에는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춤을 사랑하는 이렐리아의 마음만큼은 진실했다. 그녀는 춤의 기술을 완벽하게 익히기 위해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아이오니아에서 가장 존경받는 공연가들이 모이는 나보리의 플레시디엄으로 갔다.

이렐리아를 비롯한 아이오니아 인들은 평화를 사랑했고 이웃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삶을 좋아했다. 그러니 해안가에서 외국 침략자들이 목격되었다는 소문에 플레시디엄 주민들은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렐리아는 집으로 돌아갔지만, 고향 마을은 이미 먼 녹서스에서 바다를 건너와 아이오니아를 침략한 군대에게 점령당해 있었다. 강철 투구를 쓴 녹서스 병사들은 창대를 틀어쥐고 거리를 돌아다녔고, 무기도 없는 주민들을 만나는 족족 학살했다. 녹서스 침략군의 듀칼 제독은 잔 가문이 살던 집을 빼앗아 함대 장교들의 숙소로 쓰고 있었다.

이렐리아의 형제들과 아버지 리토는 당연히 저항했지만, 모두 살해당해 정원 구석, 봉분도 없는 무덤에 파묻혀 버렸던 것이다.

아직 어린 소녀였던 이렐리아는 슬픔과 분노에 사로잡힌 채 듀칼의 부하들이 값나가는 물건들을 집에서 끄집어내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하지만 그 약탈품 중에 잔 가문을 상징하는 큼직한 금속 문장을 보는 순간, 이렐리아는 쏜살같이 뛰쳐나가 녹서스 병사의 손에서 그 문장을 낚아챘다. 듀칼 제독은 직접 이렐리아를 붙잡아 땅바닥에 패대기치고, 병사들을 시켜 묵직한 쇠망치로 문장을 산산조각내 버렸다. 그런 다음 정원 구석에 요 맹랑한 꼬마를 묻을 무덤을 하나 더 파라는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이렐리아는 땅에 흩어진 잔 가문의 문장 조각들을 응시했다. 그 순간, 그녀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부터 기이한 느낌의 리듬이 박자를 타기 시작했다. 금속 조각들이 실룩실룩 떨리더니 비틀렸고, 이윽고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렐리아의 온몸에 고대의 춤을 추며 느꼈던 고요한 기쁨이 다시 한 번 차올랐다...

이렐리아가 한 팔을 휙 휘두르자, 금속 조각들이 마치 모양이 들쑥날쑥한 칼날처럼 공중에 떠오르더니 순식간에 녹서스 병사 두 명을 해치워 버렸다. 듀칼과 장교들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놀라 얼이 나가 있는 동안, 이렐리아는 문장 조각들을 수습하여 마을에서 도망쳤다.

사방이 적막한 숲 속으로 들어간 이렐리아는 가족의 죽음을 애도하다가 문득 할머니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제서야, 자신이 배운 춤이 단순한 몸동작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 동작들은 훨씬 더 심오한 무언가를 표현하는 강력한 기술이었다.

녹서스의 침략과 점령은 얼마 안 가 ‘‘최초의 땅’’의 평화가 얼마나 무너지기 쉬운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종교 지도자 카르마조차도 치명적인 마법을 써서 침략자들에게 반격을 가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고, 그랬음에도 카르마를 따르는 이들은 불변의 제단까지 밀려나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운 상태라는 소문이 들려왔다. 하지만 드디어, 나보리 전역에서 서로 반목하던 사람들이 한데 뭉치기 시작했다. 저항 세력이 형태를 갖추었고, 아이오니아의 자유를 되찾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기세로 불어났다. 이렐리아도 이들에 합류했고, 삼림 지대의 야영지를 돌며 갈고 닦은 춤을 선보이고 사라져 가는 아이오니아 문화의 자취를 보존하려 애썼다.

이렐리아가 다시 플레시디엄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그녀의 나이는 열네 살이 조금 못 되었다. 이렐리아가 속한 저항 세력 투사들은 수도원과 야생의 신성한 정원을 지키겠다고 맹세한 민병대와 힘을 합쳤다.

하지만 녹서스는 플레시디엄이 아이오니아 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특히나 교활한 두뇌의 소유자인 녹서스의 제리코 스웨인이라는 장군은 플레시디엄을 점령하고 이 신성한 장소를 지키던 아이오니아 인들을 포로로 잡았다. 저항 세력이 반드시 증원군을 보낼 테니 그들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계략이었다.

그러나 스웨인의 계략이 성공을 거두려는 그 순간, 이렐리아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였다. 춤의 전승자로만 남겠다는 스스로의 속박을 떨쳐버리고, 고대로부터 전해내려오는 검무의 잠재력을 남김 없이 폭발시켰다. 우아하면서도 격렬한 그녀의 몸짓에 스웨인이 거느린 고참병 십여 명이 순식간에 쓰러졌다. 스웨인의 군대는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했고, 그 틈을 타서 포로들은 이렐리아가 있는 쪽으로 탈출했다. 승기를 잡은 이렐리아는 스웨인에게 곧장 돌진했다. 저항 세력의 어린 소녀가 잘려나간 녹서스 장군의 한쪽 팔을 머리 위로 높이 쳐드는 순간, 전세는 역전되었다.

역사에 ‘‘나보리의 위대한 저항’’이라고 기록된 이 승리로, 잔 이렐리아라는 이름은 아이오니아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갔고, 주민들은 이렐리아가 자신들을 이끌어 주기를 바랐다. 이렐리아는 내키지 않았지만 저항군을 지휘하는 역할을 받아들여 군세를 키워나갔고, 거의 3년을 고군분투한 끝에 달루 만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서 이렐리아는 듀칼 제독을 패퇴시키고 그토록 오래 갈망했던 복수를 마침내 실현했다.

전쟁은 오래 전에 끝났으나, 그 참화는 아이오니아의 형세를 영구히 바꾸어 버렸다. 최초의 땅은 이제 조각조각 갈라졌고, 그 한 조각씩을 차지한 파벌들은 녹서스 군대와 맞서던 기세 그대로 이제는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고 있다. 아이오니아 주민들 중에는 이 형국을 해결할 사람은 이렐리아밖에 없다고 믿는 이가 꽤 많다. 다른 사람이라면 즐거이 그 기대감에 부응하여 권력을 거머쥘 만도 하지만, 이렐리아는 여전히 사람들을 이끌고 지휘하는 역할을 거북하게 여긴다.

내비치지는 않지만 이렐리아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호젓한 곳에서 홀로 춤을 추는 것이다.

2. 얼룩진 이름

"난 너를 믿었단 말이다, 칼날 무희!” 남자는 입술을 움직여 쥐어짜내듯 말했다. ‘‘네가 우리에게 길을 보여줬는데…’’

이렐리아는 우뚝 선 채 꼼짝도 하지 않고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남자는 형제단의 추종자로, 진흙탕 속에 무릎을 꿇은 자세였다. 온몸은 이렐리아의 칼날의 공격을 받은 후였다.

‘‘우린 강해질 수 있었어... 하나로 뭉칠 수 있었단 말이다...’’

남자는 이전부터 마을에 들어와 계획을 실행에 옮길 때를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서투르고 어설펐다. 이렐리아는 너무나 손쉽게 그를 춤으로 제압할 수 있었다.

남자는 이렐리아를 죽이려 했다. 더욱 나쁜 사실은, 그녀를 암살하려던 사람이 이 남자가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렐리아의 칼날들은 이제 어깨 위 공중에 둥둥 뜬 채 그녀의 양손 동작에 맞춰 우아하게 원을 그리고 있었다. 한 손을 가볍게 흔들기만 하면 마무리될 참이었다.

남자는 땅바닥에 피 섞인 침을 뱉었다. 이렐리아를 올려다보는 눈은 증오심에 이글거리고 있었다. ‘‘네가 나보리를 이끌지 않겠다면, 우리 형제단이 나서겠어.’’

남자는 간신히 단검을 들어올려 이렐리아를 겨누려 했다. 살아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난 너를 믿었단 말이다.’’ 남자가 다시 말했다. ‘‘우리 모두가 믿었어…’’

이렐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난 믿어 달라고 부탁한 적 없어. 유감이군.’’

이렐리아의 팔과 다리가 물 흐르듯 나긋나긋 움직였다. 그녀가 몸을 한쪽으로 돌리자, 칼날들이 치명적인 활 모양을 그리며 남자에게 날아갔다. 이렐리아로서는 자신을 죽이려던 사람에게 맞서는 정당방위이자, 남자에게 마지막 자비를 베푸는 동작이기도 했다.

살짝 몸을 돌리며 우아하게 한 발 내딛는 것만으로 칼날들은 이렐리아에게 돌아왔다. 날은 붉은빛으로 번들번들거렸다. 생명이 빠져나간 남자의 몸뚱이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영혼이 그대를 평온으로 이끌기를.’’ 이렐리아가 중얼거렸다.


야영지로 향하는 이렐리아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자신의 천막 안으로 들어가 드디어 혼자 있게 되자, 그녀는 긴장감 섞인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갈대로 만든 깔개 위에 몸을 웅크렸다.
이렐리아는 눈을 감고, 가만히 속삭였다.

‘‘아버지… 오늘 또다시 가문의 명예를 피로 더럽혔어요. 저를 용서해 주세요.’’

이렐리아는 칼날들을 눈앞 허공에 펼쳐보았다. 한때는 훨씬 더 위대한 가치를 상징하는 단일체였으나 지금은 조각조각 갈라져 폭력이라는 목적에 동원되는 것이, 마치 아이오니아 그 자체와도 같았다. 그녀는 작은 나무 그릇에 물을 붓고 헝겊을 적셨다. 칼날을 닦는다는 단순한 일이 언제부터인가 전투를 끝낸 후에 반드시 치러야 하는 의식처럼 느껴졌다.

칼날을 닦아가는 동안 그릇 속 물은 서서히 붉은빛으로 변했다. 하지만 갓 묻은 피를 헝겊으로 닦아내도, 칼날의 금속은 오히려 더 어두운 색을 띠었다. 오래된 얼룩은 아무리 해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것은 이렐리아 고향 땅 사람들의 피였다. 나보리의 피였다.

이렐리아는 생각에 잠긴 채 칼날들을 천천히 움직여 원래의 단일체, 그녀 가문의 문장 모양이 되게 만들었다. 잔이라는 이름과, 고향 나보리와, 최초의 땅 전체를 나타내는 세 개의 상징이 금이 간 채 그녀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셋은 모두 조화를 이루며 살고 있었다. 이렐리아의 선조들은 늘 카르마의 가르침을 따르며 살았다. 어떤 환경에서도 아무도 해치지 않는 삶을 말이다.

그런데 지금, 아이오니아의 인장과 문장은 셀 수도 없이 많은 목숨을 빼앗은 무기로 전락했다.

이렐리아는 형제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 있는 것만 같았다. 지금쯤 아이오니아의 혼과 함께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있을 테지만, 그래도 그녀는 형제들이 자신을 보고 실망하고 분노할까봐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렐리아의 눈앞에 돌아가신 할머니의 얼굴도 떠올랐다. 손녀가 누군가를 처치할 때마다 비통해 하며 흐느끼시는 모습…

이렐리아 역시 얼마 전까지는 할머니가 우시는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눈물을 흘리기도 했었다.

칼날들은 절대 깨끗해지지 않을 것이었다. 이렐리아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는 자신이 해친 사람들에게 예는 다할 것이었다.


처치한 남자를 자루에 담아 매장지로 가는 길에, 이렐리아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추종자들을 무수히 지나쳤다.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이렐리아가 자신들을 이끌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이렐리아가 아는 얼굴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겨울이 한 번 지나갈 때마다 낯선 얼굴들이 점점 더 늘어났다. 가장 먼저 저항 세력에 합류했던 얼굴들은 스러졌고, 새롭고 더 열의가 넘치는 투사들의 얼굴이 그 자리를 채웠다. 그들은 각자 머나먼 지역에서, 이렐리아가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마을에서 왔다.

그래도 이렐리아는 몇 걸음마다 멈춰서서 그들이 건성으로 하는 경례와 절에 답례를 했고, 자루 끄는 일을 도와주겠다는 제안을 사양했다.

매장지에 도착하자 꽃이 흐드러지게 핀 어느 나무 아래 빈 땅이 보였다. 이렐리아는 시신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남편을 잃은 아내들과 아내를 잃은 남편들, 부모를 잃은 아들과 딸들의 슬픔에 합류했다.

‘‘극복하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이렐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흙이 채 마르지 않은 봉분 한 쌍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어느 남자의 어깨를 한 손으로 가만히 짚었다. ‘‘하지만 어떤 삶이든, 어떤 죽음이든 모두 영혼—’’

남자는 이렐리아의 손을 홱 뿌리치고는 그녀를 똑바로 쏘아 보았다. 그 서슬에 이렐리아는 뒤로 물러섰다.

‘‘꼭 필요한 일이었어.’’ 이렐리아는 혼자 중얼거리며 땅을 팔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 말투에는 확신이 없었다.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니까. 형제단이 그 무지막지한 수단으로 아이오니아를 휘어잡게 되면, 녹서스 점령 때나 다름 없는 세상이 될 거야…’’

문득 이렐리아의 눈에 나이 든 여인 하나가 나무 그늘 아래 놓인 납작한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여인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애도가를 부르고 있었다. 얼굴에는 눈물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옷차림은 간소했고, 한 손은 바로 옆에 세워진 묘석에 얹었다. 묘석 주변에는 죽은 이에게 바치는 음식이 놓여 있었다.

여인이 노래를 멈추는 바람에 이렐리아는 흠칫 놀랐다.

‘‘여기 묻힐 사람을 데려온 건가요, 잔의 딸이여?’’ 여인이 말을 걸었다. ‘‘보다시피 여긴 이제 남은 땅이 별로 없어요. 하지만 당신의 친구라면 곧 우리의 친구죠.’’

‘‘이 남자는 제가 모르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말씀 감사해요.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좋은 대접을 받아도 될 사람이니까요.’’ 이렐리아는 망설이다가 한 발짝 다가섰다. ‘‘아까 옛날 노래를 부르고 계셨죠?’’

‘‘나쁜 일들을 잠시나마 잊어버리게 해주거든요.’’ 나이 든 여인은 봉분의 흙을 토닥거렸다. ‘‘내 조카예요.’’

‘‘아… 애도를 표합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는 걸 알아요. 게다가, 이 모든 것도 영혼의 길의 일부인 걸요. 안 그래요?’’

여인의 다정한 태도에 이렐리아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가끔은 잘 모르겠어요.’’ 그녀는 불쑥 고백하듯 말했다.

나이 든 여인은 더 말해 보라는 듯 상체를 일으켰다. 이렐리아는 말을 계속했다. 오래 전부터 자신을 괴롭히던 의심이 드디어 구체적인 낱말이 되어 입 밖으로 나오는 느낌이었다.

‘‘가끔은… 가끔은 제가 우리의 평화를 해친 게 아닌가 싶거든요.’’

‘‘우리의 평화를 해쳤다고요?’’

‘‘녹서스가 침략했을 때 말이에요. 우리는 반격을 했지만, 그때 우린 뭔가를 잃어버렸는지도 몰라요.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무언가를.’’

나이 든 여인은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커다란 견과를 하나 들고 그 껍질을 벌리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나는 평화가 어떤 것인지 똑똑히 기억한다우.’’ 여인은 주름지고 마디 굵은 손가락 하나를 뻗어 이렐리아의 팔을 살짝 눌렀다. ‘‘참 좋은 때였지! 나보다도 더 사무치게 평화를 그리워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예요.’’

여인은 허리띠에서 작은 칼을 뽑더니 견과의 껍질 틈에 쑤셔넣었다.

‘‘하지만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지. 그때 되던 게 지금은 안 되는 게 많다우. 그런 걸로 고민할 것 없어요.’’

드디어 견과의 껍질 틈이 벌어졌다. 여인은 껍질 속 바스러진 알맹이를 꺼내 무덤에 놓은 그릇에 넣었다.

‘‘봤죠? 옛날에는 이 정도 견과야 손으로도 깔 수 있었는데, 지금은 칼이 있어야 해요. 젊었을 때의 나라면 안달복달하다 못해 껍질을 아예 깨버렸겠지. 하지만 그때의 나는 중요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때의 나는 지금 여기에서 살고 있지 않으니까.’’ 나이 든 여인은 다정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까 부르던 노래를 다시 부르기 시작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이렐리아는 미소를 지었다. 지금 등에 멘 가방에는 가문의 문장 조각, 그녀의 무기인 칼날들이 보호용 천에 싸여 들어 있었다. 그 날들은 절대 깨끗해지지 않을 것임을, 다시는 하나가 되지 않을 것임을, 이렐리아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칼날들은 언제라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할 터였다.

3. 구 설정

3.1. 장문 배경

룬테라에서 가장 뛰어나며 치명적인 아이오니아의 무술은 내면의 깨달음을 직관적으로 표현하는 흥미로운 방법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런 아이오니아에서도 검술이 만들어진 실질적인 이유는 역시 외세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였다.

리토 사부는 모든 도시의 귀족들이 배움을 청하는 검술의 대가였다. 그에게는 철칙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이 습득한 궁극의 비술을 철저히 비밀에 부친다는 것이었다. 운 좋게 그의 숨겨진 검술을 목격한 사람들은 사부가 손에 쥔 검을 살아 숨 쉬게 하는 것 같았다고 회상하곤 한다. 그는 이른 나이에 알 수 없는 불치병에 걸리고 말았는데, 룬테라에서 가장 솜씨가 뛰어난 의사들도 그의 병을 치료할 수 없었다. 그렇게 리토가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것은 아들 젤로스와 딸 이렐리아 그리고 아주 독특한 무기 하나가 전부였다.

이후 녹서스가 아이오니아를 집어삼키려는 야망으로 진군을 시작했을 때, 젤로스는 아이오니아군의 부사관이 되어 있었다. 그는 다가오는 전쟁의 기미를 느끼고 원군을 요청하러 데마시아로 향했다. 때문에 실제로 전투가 벌어지자 고향에 남아 있던 이렐리아만이 녹서스군에 맞설 수 있었다. 아이오니아 군대는 용맹스럽게 싸웠으나 얼마 가지 않아 녹서스 군의 발길 아래 피를 흘리며 쓰러져갔고, 더 이상의 희생을 피하기 위해 항복을 고려하게 되었다. 바로 그때 어린 소녀 이렐리아가 아버지의 거대한 검을 치켜들고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소녀는 큰 소리로 오빠인 젤로스가 돌아올 때까지만, 딱 그때까지만 버텨달라고 간청했다. 그 용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들은 마지막 전투에 모든 것을 걸기로 맹세했다. 그렇게 플레시디엄의 위대한 결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위기는 다시 한 번 찾아왔다. 혼란스러운 전장 속에서 녹서스의 흑마법사 하나가 이렐리아에게 사악한 저주를 걸어버린 것이다. 별의 후손 소라카가 그녀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최후의 주문을 외우지 않았더라면... 이렐리아는 정말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고향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이었을까? 이렐리아는 기적처럼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와 아버지의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녀가 재빨리 앞으로 돌진하자 녹서스의 병사들이 휙휙 쓰러졌다. 공포에 질린 녹서스 병사들은 춤을 추듯 검을 휘두르는 이렐리아의 손에 차례차례 섬멸당했다. 엄청나게 많은 병사를 잃은 침략자들은 플레시디엄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조국을 지키기 위해 용감하게 싸운 이렐리아는 아이오니아 근위대장으로 임명되었다.

3.2. 리그의 심판

원문 링크

후보: 이렐리아
날짜: CLE 20년 11월 12일

관찰

대전당으로 들어서는 이렐리아의 앞에서 날이 네 갈래로 갈라진 대검이 허공을 가르며 날렵하게 나아간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이 특이한 무기는 신기하게도 공중에 부양해서 자기 혼자 움직인다. 무신경하게 그 뒤를 따르는 이렐리아의 머릿속은 온통 당면한 과제에 쏠려 있다. 면접에 대비해서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게 갑옷을 손질해 둔 것 빼곤, 외모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머리칼이 물결치듯 나부끼다가 일순 얼굴이 드러난다. 앳된 얼굴인데도, 두 눈에 반짝이는 청춘의 생기는 숱한 전투를 치르면서 조금 퇴색한 듯하다.

이렐리아에게선 아이오니아 근위대장다운 용맹한 기상이 풍긴다. 아이오니아의 국방 총책임자라는 중책이 부담스럽기도 하련만, 아이오니아 최고 유공자에게만 수여되는 예우의 어깨보호대를 걸친 모습은 당당하고 믿음직스럽기만 하다. 어디로 갈지 예측하기 어려운 이렐리아의 검이 그녀를 앞서 대리석 문 앞으로 휙 날아가더니, 문 위에 새겨진 글귀 앞에 딱 서서 미세하게 떨며 아주 높은 고음의 윙윙 울리는 소리를 낸다. 불안해서 그러는지 아니면 흥분한 건지는 알 수 없다. 이렐리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검을 지나쳐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회고

칠흑 같은 어둠이 이렐리아 주위를 뒤덮고 있다. 면접을 치르기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검이 자기 주위를 빙빙 돌면서 이렐리아의 눈엔 보이지 않는 위험 요인이 없는지 확인하고 있다는 걸 느낌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리그 요원들이 이쪽으로 올 땐 부디 조심해서 다가와야 할 텐데, 갑자기 덮치기라도 했다간 불행한 결과가 오리란 걸 알고나 있으려나.
이렐리아는 강철과 교감하는 능력이 있어, 금속이 하는 소리를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위험한 것들이 있진 않은지 확인하려고 두 눈을 감고 오감을 증폭시켰다. 예전에 아버지가 가르쳐준 명상법이었다. 공기도 물이나 다름이 없단다. 파동이 번지는 걸 느껴 보렴. 아버지의 목소리가 마음속에서 메아리쳤다. 그다음은 뭐라고 하셨더라-
이렐리아는 뒤로 재주를 넘으며, 머리를 향해 날아든 날카로운 단검을 간발의 차로 피했다. 착지해 웅크리는 그녀를 노리며 곧바로 두 번째 단도가 허공을 갈랐다. 아버지의 검은 어딜 갔는지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위협을 감지하고 고개를 홱 숙이는데 단도가 스쳐 지나갔다. 이 예리한 칼날에 뺨을 벴지만 이렐리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파동은 그다음 일어날 일을 예고해 준다.”

리토 사부가 어둠 속에서 홀연히 나타났다. 비록 가리개로 덮고는 있으나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린 리토의 왼손에는 단도 두 개가 더 들려 있었다.

“피 냄새가 나는구나.”

이렐리아의 입이 놀라서 떡 벌어졌다. “아버지?”

“숨기려 할 것 없다. 기왓장에 피 떨어지는 소리가 다 들려.”

그 말에 이렐리아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붉은 테라코타 기와는 자기 집이 틀림없지만, 이미 몇 년이나 전에 자운산 마법횃불의 메스꺼운 녹색 불꽃에 삼켜져 송두리째 사라진 이 집이 실제일 리가 만무했다.

“무슨 뜻인지 알겠지.”

리토가 파란색 로브의 주름 사이에 숨겼던 칼집에 단도들을 집어넣었다. 그리곤 급히 숨을 들이쉬며 두 손을 뻗어 원을 그리듯 움직이며 기를 모았다. 이렐리아에게 훈련을 시작하려는 것이었다.

“아버지, 잠깐만요,”

이렐리아가 항의하려고 입을 뗐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커다란 기합과 함께 공격이 시작됐고, 이렐리아가 피하기엔 이미 늦어버렸다. 이십 보나 떨어져 있었지만, 아버지의 훈련용 도복 소맷자락이 휙 뻗쳐오며 순식간에 그녀의 가슴팍을 제대로 가격했다. 이렐리아는 기와를 타고 미끄러지며 뒤쪽으로 휙 밀려나다가 가까스로 균형을 잡은 다음, 몸을 굴려 다시 지붕 위로 올라갔다. 리토의 가차없는 공격이 우레같이 쏟아지더니, 일순 잦아들었다.

“엉망이로구나. 마음이 흐려져 있으니 그렇지.”

리토가 손목을 가볍게 젖히자 소맷자락이 지붕 끝까지 휙 뻗어와 이렐리아의 목에 감겼다. 그리고 손목을 다시 젖히자 이번엔 이렐리아의 몸이 휙 떠올라 아버지 쪽으로 날아갔다. 마침내 수련의 대미를 장식하는 아버지의 위력적인 한발 돌려차기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뭔가 붉은 것이 그 앞을 막아섰다.

“훈련받는 소리가 나던데. 애먹고 있는 거야 이리?”

고소해 하는 기색이 목소리에 역력했다.

“젤로스!”

이렐리아는 이제 말까지 더듬거렸다. 젤로스는 둘 사이에 끼어들어 오른팔로 아버지의 돌려차기를 막으며 왼손으로는 옷소매를 붙잡아 이렐리아가 몸을 빼낼 수 있게 도와줬다. 목을 단단히 조이던 천이 그제야 풀렸다.

“자, 이거 받아,”

오빠가 아버지 쪽을 보며 싱긋 웃자, 눈을 가려도 다 보이는 듯 아버지 역시 미소로 화답했다.

“그래야 공평하지.”

젤로스가 검 하나를 이렐리아에게 던졌지만, 채 받기도 전에 리토가 다른 쪽 소맷자락을 날려 가로채버렸다. 그리곤 공중으로 도약하더니 수평으로 빙빙 돌며 검을 둘둘 감아버렸다. 이 바람에 젤로스도 기왓장 위로 나가떨어졌다.

“좋아, 시작한다!”

젤로스가 등에 멘 칼집에서 검을 뽑아 아버지 쪽으로 휘둘렀다. 리토를 완전히 베어 버릴 듯한 일격이었다. 이렐리아가 벌떡 일어나 앞쪽으로 재주를 넘으며 도끼 차기로 강하게 내려찍었다. 그러나 위력을 모은 발꿈치는 리토가 그새 들어 막은 검의 편평한 면을 치는 데 그치고 말았다. 젤로스가 기를 모아 이번엔 한발을 거꾸로 돌려 찼지만, 역시 팔을 들어 막고 말았다. 옷소매에 꽉 붙들린 검이 달그락거리며 떨렸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렐리아가 무기 쪽으로 몸을 날렸다. 리토의 소맷자락이 포물선을 그리며 뻗어왔지만, 미리 수를 내다보고 있었기에 이쯤은 대비하고 있었다. 이렐리아는 오른손으로 옷자락을 짚고 착지하며 기왓장에 못박았다. 그리곤 몸을 비틀며 발로 칼자루를 걷어차 공중으로 가뿐히 날려보냈다. 다른 발로 허공을 가르며 칼등을 차자 검 끝은 이제 리토를 향해 쏜살같이 되돌아갔다.

검에 복부를 관통당한 리토가 눈을 덮고 있던 가리개를 풀었다. 두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이렐리아, 이게 무슨 짓이냐?!”

리토가 숨이 멎어가는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이렐리아는 무표정하게 아버지를 응시할 뿐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한가?”

“이렐리아, 진짜로 다치셨잖아!”

젤로스가 어이없어하며 쏘아붙였다.

이렐리아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검이 몸을 뚫고 나오긴 했네.”

그 말을 듣자 리토의 얼굴에서 고통스러운 기색이 싹 가시더니, 이내 능글맞게 씩 웃었다.

“리그에 들어오려는 이유가 뭔가, 이렐리아?"

“내가 힘이 부족해서 고향이 쑥대밭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아이오니아에 다신 그런 일이 닥치지 못하도록 내 목숨을 걸고 싸울 거야.”

그녀의 목소리는 소름 끼치도록 차가웠다.

“그래, 속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니 기분이 어떤가?"

이렐리아가 깔깔 웃었다. 실로 오랜만에 웃는 너털웃음이었다.

“가족을 다시 볼 수 있게 해 준 건 고맙군. 그런데 아버지였다면 우리 남매가 단 한 번이라도 가격하도록 두셨을 턱이 없어. 폭풍우 치는 날 바로 여기 이 지붕 위에 서서도 전혀 젖지 않는 경지를 인정받아 장로가 되신 분이다. 미동 하나 없이도 내리는 비를 전부 피해내셨지. 내 마음 속쯤 실컷 들여다봐도 좋아. 그래 봤자 내 본성은 절대 간파할 수 없을 테니까.”

이제는 벽이 움푹 들어간 대기실 안, 이렐리아 앞뒤의 문들은 모두 닫혀 있었다. 아버지가 물려준 검이 곁에 떠서 든든하게 그녀를 지켜주고 있다. 번쩍하고 섬광을 발하며 검이 네 갈래로 갈라지자, 주위의 문들이 죄다 활짝 열렸다. 이렐리아는 크게 숨을 들이쉬더니 성큼성큼 리그로 들어섰다.